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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내 미래의 신랑감! (85/94)


85화 내 미래의 신랑감!
20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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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제의 날이 밝아왔다. 대공가의 정문은 마차와 사용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 수많은 이들의 사이로 델리나가 걸어오자 펠릭이 델리나의 옷차림을 보고 감탄했다.

“이야, 아가씨. 오늘 옷 정말 멋지신데요?”

사냥제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니만큼 오늘 델리나의 옷은 드레스가 아니었다. 양 허리춤에 단검과 총으로 무장한 델리나가 어색한 듯 웃었다.

“이런 옷은 훈련장에서만 입어서 이렇게 밖에 나가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괜찮아?”

“네. 이 정도면 오늘 1등 사냥감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펠릭이 열렬히 델리나의 옷을 칭찬하는 사이, 그들 곁으로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어느새 곁에 선 벨리온도 델리나의 차림을 가만히 감상했다.

“제 옷 어때요?”

“광대다운 옷인데.”

“칭찬으로 들을게요.”

벨리온이 델리나의 옷을 보고 짧은 감상을 이야기하는 사이, 칼릭스와 젠이 다가왔다. 하지만 델리나는 그 두 사람보다, 뒤에 있는 셀린에게 더 주목했다.

“어머, 델리나. 너도 이번에 사냥제 참여한다고 했었나? 드레스가 아니네.”

“……응. 그렇게 됐어.”

“그랬구나. 난 아무래도 몸을 쓰는 건 잘 못 하니까, 대신에 열심히 응원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사냥제에 갈 이들이 모두 오자 사용인과 기사들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델리나는 마차 근처로 가는 셀린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결국 그날 젠한테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못 밝혀냈지.’

하지만 델리나는 확신했다. 젠의 스카프를 가져가고, 또 젠의 몸의 변화를 일으킨 이는 바로 셀린이라는 것을.

‘그럼 뭐해. 애초에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으니.’

젠의 사건이 있고 나서 델리나는 능력을 써서 하녀로 위장해 셀린의 방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하녀로 위장해서는 제대로 된 수색도 하기 힘들었고, 셀린이 어지간히 꼭꼭 숨긴 것인지 의심될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델리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젠이나 칼릭스가 셀린과 단둘이 있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자, 아가씨도 얼른 타시죠.”

“응.”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잠시 제 옷매무새를 다듬던 델리나가 사뭇 비장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 * *

헬리움 제국의 사냥제.

건국제 행사이니만큼 사냥터에는 수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냥터 한가운데 있는 단상에 주목하고 있었다. 곧 단상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아슈드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황태손 전하께서 사냥제의 시작을 알리는 불꽃을 올리겠습니다.”

사냥제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불꽃을 쏘아 올리는 기둥에 아슈드가 불을 붙이자, 단상 밑에 있던 이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델리나!”

의식이 끝나고 본격적인 사냥을 하기에 앞서 다른 비공식적 행사가 남아 있었다. 바로 영애들의 손수건 건네주기 시간이었다. 그리고 영애들 중 가장 흥분한 이는 바로 에일리였다.

“너 뭐야?, 그 옷차림? 사냥 참여하는 거야?”

“응.”

“뭐야, 그러면 넌 손수건도 안 만들었겠네? 그건 좀 아쉽다.”

델리나의 사냥복 차림에 아쉬워하면서도, 에일리는 보란 듯 델리나에게 제 손수건을 꺼내 보였다.

“좋아. 그러면 대신 내 아름다운 손수건 후기를 들려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알겠지?”

“누구한테 주려고?”

“그게 있잖아. 사실 아직까지도 못 정했거든?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줘 봐. 도대체 이걸 누구한테 줘야 할까? 레몽 영식? 아니면 프럼 영식? 아, 진짜. 너무 고민돼.”

너무 힘들다는 듯 머리까지 싸매는 에일리였다. 그 모습을 익숙한 듯 바라보던 델리나는 문득 제게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바로 데미안이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데미안이 다가오자 주변이 술렁거렸다. 후작가에서 있었던 공개 프러포즈 사건을 잘 아는 사람들이 데미안과 델리나에게 시선을 모았다.

“오늘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영애.”

“감사합니다.”

‘거참. 할 거면 눈에 감정 정도는 넣으라니까.’

어김없이 시작되는 데미안의 구애를 받아 주면서 델리나는 데미안의 공허한 눈을 마주했다. 그때 데미안이 한쪽 무릎을 꿇더니 델리나의 손에 입을 맞췄다.

“!”

데미안의 행동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델리나도 조금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곧 입술을 떼어 낸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이번 사냥제에서 영애의 가련한 눈망울을 닮은 꽃사슴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러니 기대해 주시죠.”

‘세상에나.’

30년도 더 된 로맨스 책에서나 볼 법한 대사를 태연하게 읊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델리나가 입꼬리를 부르르 떨자 자리에서 일어선 데미안이 작게 소곤거렸다.

“방금 대사, 어땠어.”

“10점이요.”

“10점 만점에?”

“아뇨. 1000점 만점인데요.”

두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리 없는 귀족들은 열렬한 구애 장면을 지켜보기 바빴다. 동시에 그들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기가 울피림 대공가군.”

“바로 알아보시네요.”

“그럼. 당장이라도 내 입술을 잘라 버리고 싶어 하는 얼굴들인데.”

데미안의 말마따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세 사람이 굉장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약혼장 사건을 알고 있는 젠과 칼릭스, 그리고 벨리온이었다.

“대공이 어지간히 영애를 예뻐하는 모양이야.”

“그럼요. 전속 광대인데. 그리고 워낙에 루넨 황가랑 대공가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있고요.”

“그래, 그럼. 난 일단 살고는 싶으니 이쯤 할까.”

데미안은 마지막까지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고서 델리나에게 인사한 후 사라졌다. 그제야 근처에 있던 에일리가 히죽거리며 다가왔다.

“뭐야, 진짜 이러다가 루넨 제국으로 시집가는 건 아니지?”

“아니라고 했잖아. 그리고 못 들었어, 방금 대사? 너라면 더더욱 치를 떨 대사 아니야?”

“괜찮아. 얼굴이 잘생겼으니까. 그러면 무슨 말을 해도 멋지게 들리거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레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에일리의 말은 더욱 거칠 것이 없었다.

“아! 그래서 진짜 손수건은 누굴 주지? 다들 너무 내 마음에 쏙 드는데?”

“정 못 고르겠으면 제비뽑기라도 하든가.”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그래, 기왕 이리된 거 운명에 맡겨 보겠어! 내 미래의 신랑감을 말이야!”

델리나의 의견에 찬성한 에일리가 한구석에 있던 종이와 펜을 찾아와 부지런히 글자를 적었다. 그때 막사의 문이 열렸다. 기드온이었다.

“여기 있었냐? 가련한 꽃사슴.”

“그 꽃사슴한테 뿔로 치이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 무슨 일인데.”

기드온의 등장에 델리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에일리는 기드온을 쳐다보지도 않고 영식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적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드온도 델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뭔데? 돈 달라고?”

“손수건 달라고. 가족들한테도 주는 거잖아.”

“없는데.”

“뭐? 왜?”

“애초에 의무도 아니고. 보통 가족들보다는 영애 영식들끼리 주고받는 거잖아. 그러니 딱히 오빠한테 줄 이유가 없는데?”

“…….”

“아니다, 그러면 오빠 혹시…….”

이윽고 한 가지 결론을 내린 델리나가 이죽거렸다.

“영애들한테 손수건 한 장도 못 받았어?”

“아닌데.”

“어쩜 세상에. 자기 아는 척도 하지 말라면서 그렇게 이미지 관리하면 뭐해. 영애들한테 손수건 한 장 못 받는데.”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는 기드온이었으나 슬프게도 그의 손목은 깨끗했다. 곧 델리나 옆에 있던 손수건을 본 기드온이 그걸 덥석 집어 들었다.

“있으면서 괜히 안 주기는. 가져간다.”

“응?”

“그리고 착각하지 말라고. 나한테 손수건 줄 영애들이 수십인데, 특별히 가족이니까 달아 주는 거야. 알겠어?”

“아니, 그 손수건…….”

“간다, 시든 꽃사슴아.”

혹시라도 손수건을 뺏을까 싶어 델리나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나가 버리는 기드온이었다. 그사이 영식들의 이름을 다 쓴 듯 에일리가 뿌듯한 얼굴로 외쳤다.

“다 썼다!”

“…….”

“좋아. 그러면 이제 여기서 한 장 뽑기만 하면 되겠지? 그런데 기드온 쟤는 갑자기 왜 온 거래?”

“손수건 달라고 왔어.”

“아, 그래?”

“근데 네 손수건을 내 걸로 착각해서 들고 갔고.”

“뭐?”

그제야 자기 손수건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에일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일리가 외쳤다.

“내가 며칠 밤을 새워서 정성껏 만든 손수건이! 내 미래의 신랑감! 내 미래의 가정이!”

“나간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빨리 쫓아가 보든가.”

“기드오오온!”

손주 이름까지 상상하며 손수건을 만든 듯한 에일리는 기드온을 찾기 위해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델리나는 익숙하다는 듯 두 사람이 나간 입구를 바라봤다.

손수건 건네주기 행사는 델리나가 있는 막사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델리나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엘피샤 후작가의 막사 안에, 두 여인이 앞에 손수건을 꺼내 놓은 채 앉아 있었다. 그 두 여인은 그레이스와 에스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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