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내가 왜 이걸 줬는지
(83/94)
83화 내가 왜 이걸 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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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내가 왜 이걸 줬는지
2023.08.22.
밤이 내려앉은 정원은 고요했다. 델리나는 정원 한가운데에서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나.’
바람에 날아온 잎들까지 정리하니 테이블은 깨끗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디저트 타임을 즐길 수 있을 터였다. 쿠키가 다 식으면 가지고 온다는 칼릭스를 기다리며, 델리나가 막 의자에 앉을 때였다.
“……?”
하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노아의 모습에 델리나의 눈이 커졌다.
“뭐야, 전하랑 대화를 지금까지 한 거야?”
대공가에 오고 시간이 상당히 지났는데도 노아가 남아 있어서 델리나가 놀란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아가 델리나 앞까지 서서히 다가왔다.
“대화는 아까 끝났어. 그리고 간만에 대공가 구경 좀 했지.”
“아, 하긴. 오랜만이긴 하겠다.”
노아로서는 몇 년만의 대공가 구경이었을 터였다. 대공가 정원에 있는 노아를 보자니, 델리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무슨 생각해?”
“그냥. 우리 예전에 만났을 때가 갑자기 떠올라서.”
무시무시한 첫 만남 뒤, 놀이방에서의 강렬한 재회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노아도 그를 떠올린 듯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 그때는 하는 행동이 진짜 원숭이 같았는데.”
“지금은?”
“원숭이랑 사람 중간 사이?”
‘저, 저…….’
세월이 흘렀음에도 한결같은 노아의 태도에 델리나가 눈을 흘겼다.
“생각보다 전하랑 그렇게 오래 대화하지는 않았나 보네.”
“응. 별말 안 했어.”
“진짜?”
여전히 궁금한 듯 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무슨 이야기 했는지 알려 줄 수 있어?”
“누가 누가 더 잘생겼나 이야기했지.”
“……말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진짠데.”
델리나가 얼굴을 찌푸리자 노아가 큭큭대며 웃었다.
“그래서, 너는 누가 더 잘생긴 것 같아?”
“……전하랑 너 중에?”
노아의 질문에 델리나가 생각에 빠진 얼굴로 눈을 굴렸다.
“음……. 너랑 전하는 서로 느낌이 다르잖아. 넌 좀 온화한 느낌이라면, 전하는 냉철한 쪽이고.”
“내가 온화해?”
“얼굴, 얼굴이.”
얼굴만임을 빠르게 강조한 델리나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상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의 질문급이었다.
“진짜 이건 못 고르겠는데. 솔직히 객관적으로 둘 다 미남인 건 맞는데, 사람 취향이라는 게 다 다르니까. 거기서 답이 또 갈릴 것 같고.”
“그럼 너는 어느 쪽 취향인데?”
“응?”
“온화, 냉철. 둘 중에 하나는 있을 거 아니야.”
“나는, 그러니까…….”
생각지 못한 질문에 조금 전보다 델리나의 침묵이 더 길어졌다. 그러자 노아가 한 걸음 성큼 다가오더니 델리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훅 가까워진 거리에, 델리나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왜, 왜 이래?”
“결정하는 게 힘들어 보이길래, 가까이서 보고 감상하라고.”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네 얼굴 정도는 잘 알고 있거든?”
“그런데 왜 결정을 못 해?”
한 걸음씩 물러서다 보니 어느새 나무 기둥에 등이 닿은 델리나였다. 노아가 또 가까이 다가오려 하자, 델리나가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너! 네 쪽이 더 잘생겼어!”
“그래?”
“어! 그러니까, 내 여자에게는 차갑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네 얼굴이 더 나으니까, 그만, 그만 와.”
정신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던 델리나가 손을 뻗으며 말하자 노아도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만족스럽다는 듯 손으로 제 턱을 쓸었다.
“그럼 됐어.”
“…….”
“자, 정답 맞췄으니까, 상품.”
노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델리나에게 건넸다. 얼결에 그걸 받아 든 델리나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이건…….”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한눈에 봐도 익숙한 케이스에 델리나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케이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반지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반지야?”
“응. 껴 봐.”
얼마 전에 후작가에서 생일 선물로 언급된 반지가 델리나 손 위에 있었다. 노아의 말에 델리나가 조심스레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끼웠다.
“…….”
반지와 노아를 번갈아 보던 델리나가 입을 달싹였다.
“진짜 선물로 주는 거야?”
“응. 준다고 했었잖아.”
“그래, 그랬었지. 그런데 왜……”
반지는 정말 절묘하게도 델리나의 손가락에 꼭 맞았다. 그것도, 네 번째 손가락에 말이다. 반지를 잠깐 멍하니 보던 델리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 알았다. 너 지금 그때 그거 놀리는 거지? 후작가에서 내가 황자님한테 반지 받은 거.”
“…….”
“아무리 그래도 너무 정성스럽게 놀리는 거 아니야? 딱 보니까 반지도 비싸 보이는데. 게다가 어차피 거기 황자님도 진심도 아닌데, 뭘.”
“알고 있어.”
“응?”
“거기 황자가 진심이 아닌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 순간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노아였다.
“눈빛이나, 행동으로 상대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얼추 알 수 있으니까. 워낙 연기도 못하고.”
“…….”
“그런데, 그런 짓은 예상 밖이었지만. 다른 놈도 아닌 설마 루넨 황자한테 선수를 뺏길 줄은 더더욱 몰랐고.”
데미안을 떠올리며 기가 찬 듯 웃었지만 노아의 시선은 계속 델리나를 향한 채였다. 델리나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너 그러면…… 나한테 이걸 준 게…….”
“아까도 정답 잘 맞추던데, 또 맞혀 봐.”
“…….”
“내가 왜 이걸 줬는지.”
이윽고 노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답은 나중에 만나면 들려주고.”
노아의 시선을 따라 델리나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칼릭스가 서 있었다. 칼릭스는 쿠키와 우유가 놓인 쟁반을 든 채 가만히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 칼릭스. 언제 왔어?”
그제야 칼릭스가 온 것을 알아챈 델리나가 놀라 물었지만, 칼릭스는 별다른 말 없이 노아를 응시했다. 미묘한 분위기를 깨고 노아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만.”
칼릭스에게, 그리고 델리나에게 인사를 한 노아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델리나가 곁에 있는 칼릭스의 존재를 깨닫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지어 보였다.
“언제 왔어. 왔으면 기척이라도 좀 내지.”
“…….”
“얼른 앉자. 우유 다 식겠다. 우유는 데운 게 더 맛있는데 말이야, 그렇지?”
부러 목소리를 높인 델리나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칼릭스의 시선은 델리나의 반지 낀 손가락을 향해 있었다.
“…….”
그리고 달빛 아래 보이는, 미미하게 붉어진 델리나의 귓가로 천천히 옮겨 갔다.
* * *
“아가씨.”
“…….”
“아가씨.”
“어, 응? 나 불렀어?”
방에 멍하니 앉아 있던 델리나가 베티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델리나가 놀란 듯 베티에게 답하자 베티가 걱정스레 물었다.
“어디 몸이 안 좋으십니까?”
“아니, 아니. 완전 좋아. 그냥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고 그래. 무슨 일인데?”
베티의 말에 과장스레 제 온몸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건강하다는 걸 알려 주는 델리나였다. 그제서야 베티가 용건을 꺼냈다.
“이번에 입고 가실 사냥제 옷 말입니다. 완성이 다 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한번 입어 보시고 불편한 곳이 없는지 확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그게 벌써 그렇게 됐구나. 응. 이따가 확인해 볼게.”
어느덧 사냥제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델리나도 사냥제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베티는 그 옆에서 델리나를 보조하고 있었다.
“예. 그리고 혹시 이것도 필요하실까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베티가 델리나의 앞에 내민 것은 손수건이었다.
“이건?”
“사냥제용 손수건입니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수를 놓으시면 됩니다.”
손수건의 용도를 알아차린 델리나가 그것을 살며시 집어 들었다. 수가 놓여 있지 않은 흰 손수건이 델리나의 손에서 펼쳐졌다.
“더 필요하시면 여러 장 가져다드릴 수도 있습니다.”
“…….”
“혹 필요하지 않으시면 가져갈까요?”
“아니, 아니야. 혹시 모르니까 이건 남겨 둘게.”
델리나가 손수건을 재빨리 서랍에 넣었다.
“옷 완성됐다고 했지? 그거부터 입으러 가보자. 지금 도착했어?”
“오늘 오후 내로 보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곧 있으면 도착할 겁니다.”
“음, 그래? 그러면 그건 조금 있다가 입어 보고. 그러면…….”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까 생각하던 델리나의 눈에 빈 꽃병이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비어 있는 꽃병을 본 델리나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젠은 어딨어?”
매번 꽃을 들고서 방을 찾아오는 젠이었다. 그런데 어제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아챈 델리나가 중얼거렸다.
“혹시 산에라도 간 건가?”
“아뇨. 산에 가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그러면 안 보이는 이유가 없을 텐데?”
산에 간 것도 아니라니. 델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베티가 답했다.
“조금 전에 정원에 계시는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
“아, 그래? 그러면 또 꽃이라도 심고 있나 보네.”
“아뇨. 그런 목적으로 정원에 계시는 건 아닌 듯했습니다.”
“그러면?”
베티는 어딘지 말을 아끼는 기색이었다. 델리나 또한 긴장한 얼굴로 베티의 말을 기다렸다.
“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얼굴이 심각해 보이셨습니다.”
“뭐?”
베티의 말에 델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