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재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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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재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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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재판장
2023.07.25.
델리나는 일어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벨리온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델리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응…….”
델리나가 잠꼬대를 하는 듯 몸을 뒤척이자, 벨리온이 이불을 정리해 목 끝까지 잘 덮어 주었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펠릭이 안으로 들어왔다. 벨리온이 물었다.
“그 둘은?”
“두 분 모두 수도까지 무사히 모셔다드렸습니다. 지금은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은 참입니다.”
펠릭의 보고에 벨리온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이 곤히 자고 있는 델리나를 바라보았다.
“의사에게 물었더니 지친 것 외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곧 깨어나실 겁니다.”
“그렇겠지.”
“이번 사건도 그렇고, 정말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아찔했을 겁니다. 매번 느끼지만 참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럼. 누구 광대인데.”
그 말에 펠릭이 잠시 웃더니 곧 대화 주제를 다른 것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말씀하신 건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
“전하께서 예상하신 대로, 역시 황태손 전하를 살해하려 했던 것은 황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벨리온의 미간이 구겨졌다.
“당시 저와 베티가 처리했던 자들은 황실이 보낸 이들이었고, 마차에 대기 중이던 저희 기사들을 죽인 자들은 배후 세력이 달랐습니다.”
“그림자들과 싸운 이들 말이군.”
당시 델리나와 아슈드가 복면을 쓴 남자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델리나를 호위하고 있던 그림자들 또한 다른 적들에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그러자 벨리온이 물었다.
“생존자는?”
“없습니다. 수세에 몰리자 절벽에서 뛰어내려 시체조차 찾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가씨와 전하를 공격한 자에게서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았습니다.”
펠릭이 품에서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델리나가 남자의 품에서 찾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병 중 하나였다.
“아가씨가 찾은 주머니 속 병들의 내용물을 조사해 봤습니다. 그중에 이 독약이 있었습니다.”
“독약?”
“예. 독초로 만들어진 약인데, 문제는 이 독초가 헬리움 제국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루넨 제국에서 자라는 것이죠.”
루넨 제국이라는 말에 벨리온의 눈에 광채가 번뜩였다.
데카르.
대공가의 영지를 겁 없이 돌아다니며 황태손의 목숨을 노릴 수 있는 이는 그밖에 없었다. 펠릭 또한 데카르를 떠올리듯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황태손 전하를 암살하려 하시는 것을 눈치채시고 그들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자연스레 묻어갈 속셈으로요.”
“그것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을 놈이니까.”
그것은 벨리온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도발이었다.
“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요. 게다가…….”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아가씨도 납치해 가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살기 어린 벨리온의 얼굴을 본 펠릭은 그대로 뒷말을 삼켰다. 그 말을 입 밖에 낸다면, 이후의 일은 저도 감당하기 어려웠기에.
“아무래도 이 일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어럽겠지요?”
“안 돼.”
만일 데카르가 대공가에 침입한 사실이 알려진다면, 자연스레 황태손의 암살 사건도 알려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황제가 황태손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일 또한 알려질 터였다. 그렇게 되면 제국은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놈은 그걸 또 노릴 테니까.”
혼란스러운 헬리움 제국을 가만히 둘 데카르가 아니었다. 벨리온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은 그냥 조용히 처리해.”
“……알겠습니다.”
펠릭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데카르가 또 이런 일을 반복한다면, 벨리온이 그때는 더 이상 참지 않으리란 것을. 그렇게 더더욱 아슬아슬해진 두 사람의 관계를 느끼며, 펠릭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방 안을 빠져나갔다.
* * *
“으으음…….”
눈을 뜨니 보이는 익숙한 천장에 델리나는 잠시 멍하니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뭐야, 내가 왜 여기 누워 있지?”
몇 초간 상황 파악을 하던 델리나는 곧 자신이 의식을 잃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분명 능력을 써서 아슈드의 상처를 꿰맸고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델리나는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고 다급히 줄을 당겼다.
“깨어나셨습니까?”
델리나가 줄을 당기기 무섭게 베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델리나가 급하게 물었다.
“베티! 나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 그러니까 황태손 전하는 어디에 있고?”
“아가씨께서 전하와 같이 쓰러져 계신 것을 발견하고 대공가에 모시고 왔습니다. 황태손 전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저택에서 치료를 받으신 후 황궁으로 돌아가셨고요. 아가씨는 이틀 내내 잠들어 계셨습니다.”
“내가 이틀 동안이나 잤어?”
베티의 짧은 보고에 델리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예. 이런저런 일을 겪으셔서 많이 지치셨던 것 같습니다.”
“하긴…… 죽을 뻔했으니까.”
“예. 그때 제가 다른 적이 있는지 잘 봤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베티도 싸우느라 바빴잖아. 그럴 수밖에 없지.”
델리나가 베티를 달래듯 말하고는 이어 물었다.
“그러면 황태손 전하께서는? 황궁으로 아예 다시 가신 거야?”
“예. 스스로 그렇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랬구나…….”
황궁으로 돌아갔다는 게 조금 걱정스럽기는 해도 스스로 결심했다는 말에 델리나는 아슈드를 믿어 보기로 했다. 그때 베티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델리나 상태를 살피고는 말했다.
“배가 고프시면 바로 식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아, 그럴까?”
“예. 이틀이나 주무셨으니 위에 부담이 없도록 수프를 준비하겠습니다. 방에서 드실 수 있도록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그럼. 부탁할게.”
델리나의 말에 베티가 곧장 방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혼자가 된 델리나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창을 켰다.
<델리나>
<능력녀, 햇살녀, 철벽녀…….>
‘역시…….’
정신없었던 그날의 일은 꿈이 아니었다. 델리나는 정말로 스스로에게 능력을 써서 아슈드의 상처를 꿰맸다. 이제 델리나는 아이들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키워드의 능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근데 능력녀는 좋긴 한데 체력 부담이 너무 심하잖아…….”
능력 한 번 썼다고 무려 이틀을 자다니. 물론 제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체력적으로 약한 건 맞았지만, 새삼 능력의 부작용이 원망스러웠다.
‘그나저나 1차라고 했었지?’
그때 안내 창에는 분명 흑막들의 1차 위기를 막으며 주는 보상이라고 했었다. 1차라는 것은, 분명 2차도 있고, 어쩌면 3차까지도 있을지 몰랐다. 그 사실에 델리나는 힘이 쭉 빠졌다.
‘1차도 버거웠는데, 2차 이상도 있을 수 있다고?’
상상만 해도 지쳤다. 델리나가 한숨을 푹 내쉬는데 문이 열리며 벨리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대.”
“전하!”
델리나가 반가운 듯 외치자 벨리온이 다가와 침대 곁에 앉았다.
“몸은 어떻지?”
“배고픈 거 빼고는 멀쩡해요.”
괜찮다는 것을 과시하듯 델리나가 온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보여 주었다. 그런 델리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벨리온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아직 멀쩡한 건 아닌데.”
“그렇죠. 밥을 먹으면 이제 멀쩡해지죠.”
‘웃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표정이 풍부해진 벨리온을 델리나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벨리온이 델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을 받은 델리나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참, 전하께서는 괜찮으신 게 맞죠?”
사실 상태를 따지자면 아슈드 쪽이 더 심각했다. 그를 다시 떠올린 델리나가 한껏 부스스해진 머리로 벨리온에게 물었다.
“아마 당분간은.”
“당분간이요?”
“황녀가 그렇게 말하니까 황제 쪽에서도 무어라 말 못 하겠지.”
“황녀 전하께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요?”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델리나의 눈이 커졌다. 그러자 벨리온이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주었다. 편지를 받은 델리나가 빠르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황녀님이 보내신 거야.’
그레이스가 보낸 편지에는 아슈드가 황궁으로 돌아간 다음의 일이 적혀 있었다. 그중 델리나는 한 대목에 주목했다.
<……아버지는 아슈드를 암살하지 못하고 그 일을 너한테 들켰다는 것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시기 시작했어.
화를 참지 못하고 벌인 일에 대해서 후회하기 시작하신 거지.
혹시라도 이 일이 발설된다면 이래저래 혼란스러워질 테니까 말이야. 나도 단단히 말해 뒀어.
만약 아슈드에게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그래서 아슈드가 혹시라도 죽는다면 나도 아슈드를 따라서 죽을 거라고.>
단정한 그레이스의 글씨와는 다르게 알리는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 더 지켜봐야겠지만.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일이 또 일어나지 않도록 나도 최선을 다할 거야.>
그 뒤로 고맙다는 내용이 이어졌고 곧 편지는 끝이 났다. 편지를 전부 읽은 델리나가 입을 열었다.
“황태손 전하는 황궁에서 사는 걸 택하셨네요.”
“황제는 손주는 아니라도 딸은 아끼지. 이제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거야.”
“그건 다행이네요.”
결과가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숨은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델리나가 베개에 몸을 기대는 걸 보며 벨리온이 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같이 갈 곳이 있는데.”
“네? 어딜요?”
“재판장.”
‘재판장?’
뜻밖의 말에 델리나가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