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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철벽남 (41/94)


41화 철벽남
2023.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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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 것일까.’

같은 순간, 연회장 한복판에 선 델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왜 이것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델리나의 얼굴과 머리카락은 가면과 가발에 잘 가려진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저를 보며 수군대는 사람들 때문에 조금씩 어깨가 말려 왔다. 당장이라도 황궁 창문을 깨고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저를 바라보고 있는 하이르의 시선 때문에 그저 소리 없는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델리나. 사람 많아.”

“……응. 그래. 젠. 잠깐만 가만히 있어.”

물론 델리나 홀로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델리나 양옆으로는 조수가 된 젠과 칼릭스가 서 있었다.

칼릭스 또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기는 했지만, 그의 특징인 흑발이며 평소 입던 옷 스타일 그대로 입고 있던 탓에 사람들은 쉽게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울피림 대공자가 아닌가요?”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런데 왜 저기에……?”

‘……기왕 가면을 쓸 거면 좀 다른 가면으로 쓰든가.’

하필 또 칼릭스가 쓴 가면이 벨리온이 평소에 쓰던 가면과 비슷한 탓에 이래저래 들통이 난 칼릭스였다. 물론 젠은 그 어떤 것도 뒤집어쓰지 않은 채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끽.”

동물도 한 마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보고서 잠시 놀라다가도 곧 원숭이는 자연스레 델리나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델리나, 뭐해?”

“일단 인사해, 인사. 고개 이렇게 꾸벅.”

델리나 일행이 여전히 얼떨떨해하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고개 숙여 무대 인사를 하는 사이, 델리나 앞으로 다양한 공연 기구들이 들어왔다.

어마어마한 종류와 크기에 잠시 델리나는 말을 잃었다. 진짜 광대들이 이러한 지원을 받았다면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몰랐다. 정작 델리나는 다른 의미로 울고 싶어졌다.

‘모르겠다. 일단 해 보지 뭐.’

지금에 와서 하기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짧은 기간 동안 제가 준비한 것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델리나가 무대 한복판으로 나갔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듯 음악 소리가 서서히 울려 퍼졌다. 그제야 델리나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린 듯 귀족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공연이라도 하는 걸까요?”

“보니까 어린 여자아이 같은데……. 저 아이가 도대체 무슨 재주로 황궁 연회까지…….”

사람들의 말이 들려오자 더 부담스러워졌다. 델리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곳을 응시했다. 바로 벨리온이 있는 곳이었다.

“…….”

벨리온은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하지는 않았다. 델리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만히 입을 달싹일 뿐이었다.

광대.

이런 상황에서도 광대 소리라니. 참 한결같은 벨리온에 델리나가 피식 웃었다. 이윽고 델리나는 제 손에 있던 것을 만지작거렸다. 공연 당일에 받은 반센트의 총이었다.

‘방아쇠를 당기면 재밌는 게 나올 거라고? 총알이 아니라?’

아까 받았기에 델리나는 총을 사용해 보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이 나올 거라는 반센트의 말을 떠올리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총구로 불이 뿜어져 나왔다.

“!”

갑자기 분사된 불에 놀란 것은 델리나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델리나의 손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고 생각하듯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의 사이에서 델리나는 반센트를 발견했다.

‘재밌다는 게 이런 거였어?’

제 발명품을 선보였다는 것에 기분이 좋은 듯 반센트는 만족스레 웃고 있었다. 델리나는 여전히 불이 뿜어져 나오는 총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근처로 있던 거대한 원 모양의 고리를 바라보았다.

“……!”

델리나가 총구에서 솟구치는 불길을 고리에 가까이 대자, 순식간에 불이 그곳으로 옮겨붙었다. 그걸 잠깐 멍하니 보고 있는데 곁으로 쪼르르 다가온 젠이 델리나에게 물었다.

“저거 넘어가?”

“……어, 잠깐, 잠깐만.”

<능력남>

갑자기 고리 통과에서 불 고리 통과가 되어 버렸지만 젠은 무섭지도 않은지 재밌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젠에게 능력을 걸어 주면서 델리나가 속삭였다.

“잘 기억하고 있지? 힘을 너무 많이 쓰면 지난번처럼 기절해 버리니까 조심하고.”

“응!”

능력이 걸린 젠은 가벼워진 몸을 체감하듯 뛰어오르더니 불 고리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경이로울 정도로 높고 빠르게 뛰어오르는 젠을 보며 귀족들이 입을 쩍 벌렸다.

“끽, 끽!”

원숭이는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각종 도구들을 주워 들고서 혼자 놀기 시작했다.

공을 공중으로 던지거나, 봉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후에 아슬아슬한 장대 위에서 중심을 잡은 채 작은 고리들을 통과하며, 저만의 공연을 이어 갔다. 귀족들이 재밌다는 듯 원숭이를 쳐다봤다.

“우리도 준비할까?”

“…….”

젠과 원숭이가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사이, 델리나 또한 단검을 집어 들었다.  델리나의 말에 칼릭스가 체념한 듯 과녁으로 걸어가더니 한복판에 섰다.

‘어차피 과녁에 맞추기는 힘들고.’

지금 실력으로 던졌다가는 칼릭스의 팔다리가 달아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델리나는 아예 반대 전략을 택했다.

휙, 소리를 내며 델리나가 던진 단검이 그대로 칼릭스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경악한 귀족들이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거나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들이 상상한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튕긴다!’

날아간 단검은 칼릭스의 얼굴에 가기도 전에 튕겨져 나왔다. 희한한 현상에 귀족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어서 델리나는 수십 개의 단검을 내던졌지만, 단검이 칼릭스에게 꽂히는 일은 없었다.

<철벽남>

‘확실히 끝내주는 철벽이지.’

능력을 쓰는 순간 1미터 이내의 물체나 사람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철벽에, 델리나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단검 공연까지 본 귀족들의 탄성과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그때 델리나가 군중을 향해 말했다.

“다음 공연을 도와줄 분을 찾고 있는데요. 혹시 지원하실 분 계신가요?”

말하면서도 델리나는 누군가를 향해 걸어갔다. 바로 반센트에게 말이다.

“실험하고 싶지 않아?”

자연스럽게 사람을 찾듯 걸어간 델리나가 반센트에게만 들리게 소곤거렸다.

“평생 못 해 볼 실험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데.”

반센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내가 만약에 실험 이야기로 지원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할 거지?”

“하지.”

이윽고 반센트가 자원하듯 앞으로 걸어 나가자 사람들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사이에도 델리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 멀리 보이는 노아를 보고서 빠르게 입을 달싹였다.

고용!

고용 비용이 심히 걱정되기는 했지만 지금은 한 명 한 명이 절실했다. 게다가 지난 밤 정원에서 그레이스에게 한 말도 있었기에, 최대한 아이들을 많이 끌어모아야 했다. 그리고 델리나의 입 모양을 알아차린 노아가 씩 웃었다.

“아슈드, 너도 한번 자원해 보는 건 어때?”

아니나 다를까 델리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무대 위로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눈을 빛내며 바라보던 그레이스가 곁에 앉아 있던 아슈드에게 말했다.

“……네?”

“공연이 재미있어 보이는데 같이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아뇨. 저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요.”

흥미 있어 하는 그레이스와 달리 아슈드는 전혀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다른 이가 입을 열었다.

“가 봐.”

하이르의 말에 아슈드가 눈을 크게 떴다. 하이르는 델리나에게 계속해서 시선을 보낸 채 이를 으득 갈았다. 예상외로 델리나의 공연을 선전하자 그는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가서 무슨 속임수를 썼는지도 알아보고.”

“……예, 알겠습니다.”

하이르의 말에 아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말에 따랐다. 아슈드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한가운데로 나서자 귀족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다들 이렇게 자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요?”

‘물론 완전한 자원은 아니겠지만.’

다양한 표정을 하고 서 있는 세 사람을 보며 델리나가 어색한 듯 웃었다. 델리나가 제일 먼저 부른 사람은 반센트였다.

“자, 들어가.”

델리나는 반센트를 큰 상자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상자를 보고서 반센트가 중얼거렸다.

“평생 못 할 실험, 맞지?”

“그럼. 날 믿어.”

반센트 등을 떠밀어 들어가게 한 후, 델리나는 상자를 닫았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잠시 기합을 넣듯 상자 곁으로 손을 쭉 뻗고서 델리나가 잠시 뜸을 들인 후 도로 상자 문을 열었다.

“세상에!”

믿을 수 없다는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개중에는 저가 보고 있는 것이 진짜인가 싶은 듯, 눈을 비비는 이들도 있었다. 델리나는 상자 아래에 있던 반센트를 안아 올렸다. 정확히는, 이제 아기가 된 채 기어 다니는 반센트를 말이다.

<연하남>

연하가 되다 못해 아기가 되어 버린 반센트를 품에 안아 들고 있는 델리나를 귀족들이 멍하니 쳐다봤다. 잠시 후 작은 손뼉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손뼉 소리는 점차 거대한 함성과 박수 소리로 바뀌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델리나는 생각했다.

‘……연상남은 나중에라도 절대 쓰지 말아야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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