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사랑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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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사랑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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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사랑인 거야!
2023.07.10.
“황, 황녀님을 뵙습니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곱슬거리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
여인의 얼굴을 본 델리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로 황녀, 그레이스였다.
“아, 분명…….”
“델리나 플로렌이라고 합니다.”
“맞아, 그랬지. 반가워.”
델리나를 알아본 듯 그레이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단아한 미소에 델리나가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족 지간인데 너무 다른 거 아니야?’
분명 아슈드와 외모는 닮았는데 행동이나 말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것이 못내 신기해서 델리나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레이스가 기사 쪽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여기 영애랑 할 말이 있으니까 자리를 좀 비켜 줄래?”
“하오나 황녀님…….”
“괜찮으니까 어서.”
그레이스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기사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델리나도 원숭이를 제 어깨에서 떼어 내고는 베티에게 넘겼다.
“베티도 잠깐만 원숭이 좀 데리고 있어 줘.”
“알겠습니다.”
델리나의 말에 베티는 가만히 원숭이를 품에 안고서 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답답한지 베티의 품 안에 있던 원숭이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끽!”
“가만히.”
“……끽.”
물론 베티의 낮고 단호한 음성에 곧 얌전해졌지만 말이다.
“그래, 델리나 영애.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저를요?”
그레이스가 반갑다는 듯 말하자 델리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번에 아슈드랑 마지막 춤을 추기도 했었지?”
“아, 그건,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어서…….”
“그리고 아슈드랑 같이 대공가에서 후원을 받고 있고.”
“!”
춤은 몰라도, 아슈드가 대공의 후원을 받고 있는 것은 극비였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를 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델리나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괜찮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내가 아슈드에게 먼저 권했는걸. 대공의 후원을 받아 보면 어떻겠냐고 말이야.”
“……아, 그러셨군요.”
“물론 아버님께서 알면 난리가 나겠지만.”
하이르는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말에 델리나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 아이는 황족이라는 의무감에 매여 있을 때가 많아서 가끔은 너무 어른처럼 행동하려고 하거든. 하지만 나는 아슈드가 좋은 또래 친구를 많이 사귀었으면 하는 바람이 커.”
“그러셨군요. 그래서 고른 곳이 대공가였고, 거기서 좋은 친구를, 친구를…….”
차마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다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었던 델리나는 말끝을 흐리며 침묵을 택했다.
“그런데 말이야. 최근에 아슈드가 많이 활기차졌어. 영애 덕분에.”
“……활기차지셨다고요?”
사람을 죽일 듯이 쫓아오는 것도 활기찬 범주에 포함되는 거라면 그 말이 맞긴 했다. 아슈드의 분노 어린 얼굴을 떠올리던 델리나가 어색한 표정을 짓자 그레이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슈드에게 영애에 관한 것도 많이 들었어. 듣자 하니 재미있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데. 벨리온의 광대라고.”
“예. 그렇죠. 사실 광대라는 게……, 벨리온이요?”
이제는 하도 들어 광대라는 말이 어느정도 익숙해졌다. 그런데 벨리온을 친근하게 부르는 그레이스의 말은 전혀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아, 몰랐구나. 우리 둘, 예전부터 친구 사이였거든.”
“…….”
“에드윈이랑 에스텔도 알고 있지? 그 두 사람도 같이 놀았어.”
추억을 회상하는 그레이스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지금은 서로 대화를 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지만.”
사실 아이들이 후원을 받도록 허락해 준 이들이 그들의 보호자였기에, 에드윈과 에스텔, 벨리온이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예상 밖이었다. 델리나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그렇지. 아무래도 황가와 대공가는 소리 소문 없이 대립하고 있는 곳이니까…….’
워낙에 말이 없는 데다가, 표정 변화 또한 적은 벨리온이었기에, 델리나는 그가 황녀와 친분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레이스가 작게 말했다.
“그냥 모두 함께 사이좋게 살아가면 안 되는 걸까?”
“…….”
“전쟁도 없고, 싸움도 없이……. 그렇게 살 수 없는 걸까?”
전쟁.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델리나 또한 간접적으로 느낀 적이 있었다.
제국을 들썩이게 했던 황가와 대공가의 싸움이 발발하면서. 그리고 델리나는 알고 있었다. 방금 그레이스가 입에 담은 이들의 최후를. 그리고 눈앞에 있는 그레이스 또한 그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그 이후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 아이들이 제국을 망가트리는 것이…….’
작위 계승이 사실상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오싹해져서 델리나의 어깨가 부르르 떨려왔다.
“나 좀 봐. 영애한테 괜스레 우울한 이야기만 꺼내 버렸네.”
민망한 듯 웃던 그레이스가 델리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일 공연을 한다던데? 무슨 공연을 하는 거야?”
“별건 아니고요. 그냥…… 폐하께서 제가 광대라는 것에 무척 관심을 가지고 계셔서요. 탄신제에서 공연을 좀 해 달라 하셨거든요.”
“정말? 그러면 영애 혼자서 공연을 다 하는 거야?”
“저 혼자 하는 건 아니고요. 공연 조수도 있어요. 칼릭스라고, 아시죠? 그 아이랑, 함께 대공가에서 후원받는 젠이라는 아이요.”
그레이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친구들이 도와주는 거구나?”
“……예?”
“그러면 아슈드도 같이하니?”
‘친구, 그 다섯이랑 친구……. 같이 놀면서…….’
순간 그 다섯 명과 하하 호호 웃으며 초원을 함께 뛰어노는 상상을 한 델리나가 양손을 벌벌 떨었다.
“친구까지는 아니고, 그냥…….”
‘아니다, 잠깐만.’
순간 그레이스의 말을 부정하려던 델리나의 머릿속으로 무척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친구보다 더 친밀한 평생의 단짝이죠. 저희가 찐한 우정으로 얽힌 사이라서요. 사실 모두가 제 공연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그랬구나. 역시 좋은 친구들이네.”
“네. 그런데요. 사실 전하께서는 조금 부끄러우신지 아직 제 공연 도와주는 걸 망설이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말씀이지만, 혹시…….”
공연에는 제 능력이 통하는 아이들이 절실했다. 아슈드가 공연을 도와준다면 정말로 더할 나위 없었다. 델리나는 그레이스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 * *
헬리움 제국 황제의 탄신제.
제국에서 손꼽히는 행사이니만큼 황궁 연회장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제국 내의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각국의 귀족과 귀빈들이 모여들었고 모두 들뜬 얼굴로 황궁 연회장 안으로 하나둘씩 입장하고 있었다.
“기드온, 기드온!”
그리고 연회장의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누군가가 기드온을 불렀다. 제 이름에 반응한 기드온이 고개를 돌리자 바로 에일리의 얼굴이 보였다.
“뭐야?”
“어, 일단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고.”
에일리와 델리나가 오랜 친구이니만큼, 두 사람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그런데 기드온을 부른 에일리는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서도 다른 누군가를 찾듯 연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델리나는 어디에 있어?”
“…….”
“아, 지금 시골 친척 집에 가 있다고 했었지? 그러면 얘는 아예 안 오는 거야?”
“걔는 왜 찾는데?”
“왜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에일리의 말을 이었다.
“너 소식 못 들었어? 아, 하긴. 이건 영애들 사이에서 많이 퍼지긴 해서 너는 모를지도 모르겠다.”
“무슨 소식?”
“델리나가 이번에 로즈립 후작가 사교 모임에 초대받았었는데, 거기서…….”
에일리는 영애들 사이에 쫙 퍼진 사교 모임 이야기를 열성적으로 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기드온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래서, 그 다섯 명이 델리나 걔를 데리고 갔다고? 사교 모임 하던 와중에?”
“그렇다니까! 황태손 전하랑 그 유명한 영식들이 와서는 데리고 갔대! 그때 엄청 난리가 났었다고 했는데!”
그 자리에 있지 못했다는 것이 분한 듯 에일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덩달아 기드온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그런 곳에 갑자기 걔를 데리고 나갔다는 건, 역시…….”
“그래, 뭐겠어. 하나밖에 없지.”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협박 같은 거 아니야?”
“사랑인 거야!”
물론 둘의 생각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에일리의 사랑이라는 말에 기드온의 얼굴이 한없이 구겨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왜 말이 안 돼. 가능하지!”
“제국 영식들 눈이 그렇게 낮은 줄 알아? 차라리 다섯 명한테 단체로 협박당하고 있다는 게 훨씬 그럴 듯하지.”
“웃겨. 그럼 너도 눈이 높다는 거야?”
“적어도 너보다는 높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높거든!”
델리나로 시작한 대화가 누가 더 눈이 높을까의 싸움으로 번졌다. 한참을 그렇게 으르렁대다가 에일리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진짜 델리나 얘는 뭐야? 오늘 연회도 오기는 오는 거야? 애초에, 너 델리나가 오는지 알고는 있어?”
“…….”
“뭐야, 갑자기 왜 말을 못 해? 진짜야?”
갑자기 입을 꾹 다문 기드온을 보며 에일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에일리가 기드온을 추궁하려는 순간 연회장의 불이 꺼지며 암흑이 찾아왔다.
“……뭐야? 불이 꺼진 건가?”
갑자기 어두워진 탓에 당황한 에일리와 기드온이 주변을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다른 귀족들 또한 술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기드온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연회장의 한가운데에 불빛이 모이더니 누군가를 비췄다. 그리고 에일리와 기드온은 볼 수 있었다. 빛 한복판에 나와 있는 한 명의 소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