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광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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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광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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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광대라고?
2023.07.06.
황궁의 응접실은 화려하면서도 웅장했다. 하지만 델리나에게는 응접실을 둘러볼 정신조차 없었다. 델리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아이들 역시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너도 그렇지만, 설마 나까지 들킬 줄이야.”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이는 노아였다. 델리나가 맞장구치며 말했다.
“맞아. 너도 원래는 조용히 후원받아 왔는데…….”
“그랬지. 그랬는데 이미 공작님한테 언질을 한 번 줬더라고.”
“이 정도로 우리를 찾는 데 열심인지는 몰랐지만.”
노아의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다른 아이들도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중에는 델리나만큼이나 잔뜩 얼어서 앉아 있는 아슈드가 있었다. 아슈드의 의외의 모습에 델리나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라 하더라도 자신의 할아버지를 만나는데 이토록 긴장하다니. 아슈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의문스러웠다. 그런 아슈드를 향해 델리나가 무어라 말을 걸려던 순간, 문이 열리며 하이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하이르의 등장에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멀뚱히 고개를 들고 있는 젠의 머리는 델리나가 손으로 푹 눌렀다. 잠시 아이들을 바라보던 하이르가 걸음을 옮겨 자리를 앉았다.
“앉지.”
하이르의 말에 도로 자리에 앉은 델리나는, 이제 보다 가까이에서 하이르를 볼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 흰 머리가 가닥가닥 보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금빛의 머리카락하며, 푸른 눈은 아슈드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그래, 너희들이 바로 그…….”
하지만 자신들을 훑어보는 눈빛만은 아슈드와 달랐다. 모든 것을 샅샅이 파헤치겠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하이르의 시선에 델리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뭐, 확실히 친자식은 아니더라도 친척이라서 그런가. 하나같이 닮았군.”
그렇게 말하며 한 번 더 아이들을 훑던 하이르의 시선이 델리나에게 닿았다.
“델리나 플로렌이라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그렇군. 아무래도 플로렌 백작가는 내가 많이 본 적이 없어서 얼굴을 잘 몰랐는데……. 지금은 대공가에 살고 있다고?”
바로 나오는 대공가라는 말에, 긴장 어린 얼굴로 델리나가 답했다.
“예.”
“대공이 재능 있는 아이들을 후원한다는 소문은 나 역시 들은 바가 있지. 그래서 묻는 건데 영애는 어떤 재능이 있어서 대공가에 들어갔지?”
하이르가 보기에 가장 수상한 인물은 바로 델리나였다. 다른 아이들이야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쉽게 짐작이 갔지만, 델리나는 완전히 평범한 영애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델리나의 입이 달싹였다.
“그러니까, 그게…….”
광대라는 말을 황제 앞에서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델리나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본 하이르의 눈이 빛났다.
“왜 그러지? 뭔가 나한테 숨기고자 하는 일이 있는 건가? 아니면 대공이 영애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거나?”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다만 후원을 받게 된 재능이 다른 사람들보다 좀 독특한 것이라서…….”
그 말에 더더욱 흥미를 가지듯 하이르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독특한 거라니 더 관심이 가는군. 그래서, 그게 뭐라고?”
어떻게든 델리나의 입으로 그것을 듣겠다는 양, 하이르는 집요하리만치 델리나를 압박해 왔다. 결국 델리나가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광대입니다.”
“…….”
델리나의 광대 소리에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광대라고 답한 델리나 또한 슬쩍 고개를 들어 하이르의 반응을 살폈다. 하이르는 잠시 제가 무엇을 들었는지 이해를 못 했다는 얼굴을 했다가, 가만히 한 번 입을 달싹였다.
“방금 뭐라고?”
“…….”
“광대?”
그렇게 되물은 하이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뭔가 숨겨진 뜻이 있는 단어인가? 광대가?”
“아뇨. 말 그대로입니다.”
델리나가 대답하면 할수록 하이르는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공가와 광대라는 단어가 연결되지 않는 듯했다. 하이르의 얼굴에 서서히 분노가 떠올랐다.
“날 놀리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관두는 것이 좋을 텐데, 영애.”
“아뇨. 제가 감히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말씀드리겠습니까.”
‘진짜 광대 맞다고요…….’
솔직히 델리나는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하이르가 그를 알 리 없었다. 델리나의 대답에도 표정을 풀지 않던 하이르가 말을 이었다.
“그래? 정말 영애가 광대라 이거지.”
“…….”
“그렇다면 공연도 할 줄 알겠군.”
“예?”
공연이라는 소리에 델리나가 놀라 물었지만 하이르의 어조는 확고했다.
“그래. 마침 곧 있으면 연회가 열리기도 하고, 아주 잘되었어.”
“…….”
“영애가 내 탄신 선물로 연회장 가운데에서 공연을 해 주면 하는데.”
“예에?”
‘공연? 내가?’
제국의 귀족들이 참석하고, 각국의 귀빈들까지 오는 그 연회장 한복판에서 광대 공연을 하라는 소리에 델리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래, 할 수 있겠지? 영애의 말대로 광대의 재능이 있다면.”
얼른 그 광대의 숨은 의미를 말하지 않으면 공연을 시키겠다는 듯 하이르가 압박했지만 정말 델리나는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을 굴리던 델리나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예, 그럼요. 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아…….’
그렇게 델리나는 홀로 눈물을 삼켰다.
* * *
“전하!”
동쪽에 헬리움 제국이 있다면, 서쪽에서 가장 위용을 떨치고 있는 제국은 루넨 제국이었다. 그 루넨 제국의 황궁에서 사용인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한 남자를 찾고 있었다.
“어디에 계십니까?”
정원의 수풀이며 분수며 벽 위쪽까지, 사람이 가기 힘든 곳까지 사용인들은 살피고 있었다. 얼마 후 사용인들이 남자를 발견한 곳은, 어느 테라스였다.
“응? 나 찾았어?”
사용인들의 외침에 테라스 창틀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가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불어오며 남자의 남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남자의 은안은 사용인들을 향해 있었다.
“전하, 또 여기서 그러고 계시면……!”
“아, 내려갈게.”
사용인들의 경악 섞인 말에 남자가 태연히 창틀에서 내려왔다. 얼마나 이곳에 오래 앉아 있었는지, 허리까지 내려온 장발이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었다.
“머리라도 우선 묶어 드리겠습니다. 제복은 어디다 벗어 두셨습니까?”
“아, 그거 창틀에 아까 놔뒀었는데.”
하지만 창틀에는 겉옷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남자의 보좌관, 러비가 아래를 내다보자 바닥에 처참히 떨어진 제복이 보였다.
“……일단 돌아가시죠.”
밖에 떨어진 제복을 보고서 익숙하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쉰 러비가 남자를 재촉했다. 앞에서 걷던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난 왜 찾았는데?”
“즉위식에 대해 의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황제 자리에 오르셔야지요.”
“아.”
“폐하께서 갑작스레 서거하신 지도 꽤 되었고, 이제는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즉위하셔야 합니다.”
즉위식이니, 황제니 하는 중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음에도 지극히 태연한 얼굴로 있는 남자의 이름은 데카르. 현 루넨 제국의 황태자이자 곧 황제의 자리에 오를 자이기도 했다. 러비의 말에 데카르가 가볍게 답했다.
“안 할 건데.”
“예?”
그사이 방으로 돌아온 데카르가 편지를 주워 들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러비가 놀라 물었다.
“즉위식을 안 하시겠다고요?”
“정확히는 좀 미루겠다고. 갈 데가 있어서.”
“어디를 가시려고……?”
곧 러비의 눈에 데카르가 들고 있는 편지가 보였다. 편지 봉투에 선명히 찍혀 있는 헬리움 제국의 문양에 러비가 물었다.
“……설마 가실 예정이십니까? 헬리움 황제 폐하의 탄신제에요?”
“황제가 되면 그런 데 가기도 힘들어지잖아. 그러니까 즉위식을 조금 미루고 가는 거지.”
“예. 그렇기는 한데…….”
잠시 우물대던 러비가 물었다.
“그곳이 그렇게 즉위식을 미루고 갈 정도십니까?”
“응. 그곳 황제가 좀 만나자고 한 것도 있고.”
“예?”
“바보 같지 않아? 어떻게 자기 제국민을 치는 데 나한테 힘을 보태 달라는 말을 하냐고.”
“전하!”
타 제국이라 할지라도 황제는 황제였다. 데카르의 바보 소리에 놀라 러비가 외치다가 다시 목소리를 죽였다.
“그, 제국민이라 하심은, 설마 예전에 말씀하신…….”
“응. 울피림 대공가.”
울피림 대공가는 루넨 제국의 귀족들도 알 정도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러비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정말 힘을 보태 주실 겁니까? 상대는 그 울피림 대공가인데요.”
“글쎄? 어떻게 할지는 두고 봐야지.”
가만히 입꼬리를 올리던 데카르가 편지를 내려놓았다.
“간만에 그리운 얼굴들도 볼 수 있으면 보고, 겸사겸사 가는 거지.”
“……예, 그러면 참석하겠다는 답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러비는 제 주인의 고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데카르가 의자에 앉으며 씩 웃었다.
“뭐가 되었든, 탄신제에 뭔가 재미있는 게 있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