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황족이 못 하는 일 (17/94)


17화 황족이 못 하는 일
2023.06.17.



 
“데뷔탕트를 시작하기에 앞서, 황제 폐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황제의 곁에 있는 아슈드는 어린아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슈드 옆으로는 그의 고모이자 보호자인 그레이스도 함께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황족들. 델리나는 불길로 휩싸여 가던 수도를 떠올렸다.

폭군 아슈드.

수도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고서 그것을 가만히 구경하던 모습이 생생했다. 그때 그의 눈은 어떠한 감정도 담지 않은 채 공허했다.

무엇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눈앞에 있는 저 작은 아이가 훗날 제국을 멸망시킬 이가 될 수 있음을. 하지만 지금은 모두 웃는 낯으로 손뼉을 칠 뿐이었다.

“데뷔탕트를 치르는 모든 영애와 영식들을 축하하며, 이 연회를 부디 즐겨 줬으면 하네.”

짧은 축사와 함께 하이르가 잔을 올렸다. 본격적인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아, 그러면 이제…….’

연회장 안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첫 춤을 추는 이들은 데뷔탕트를 치를 영애와 영식들이었다. 아이들이 하나둘 홀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델리나는 아이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걸어가면서 빠르게 제이크와 제인이 있는 곳을 훑었다.

다행히 그 둘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데뷔탕트 춤 동선을 알고 있는 델리나는, 그들과 마주치지 않을 곳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모든 영애와 영식이 한 줄로 나란히 섰다. 남녀 파트너가 박자에 따라 바뀌는, 단체 춤이었다.

‘처음부터 이 곡이라고?’

파트너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고, 곡의 특성상 박자도 빨랐기에 많은 이가 실수를 하는 곡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음악을 들은 몇몇 아이들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다른 영애들과는 다르게 몇 년이고 춤을 연습했던 델리나도 약간 긴장한 채 음악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서서히 몸은 춤을 기억해 냈고 동시에 델리나의 표정에도 다시 여유가 생겼다.

‘그래도 이만하면 나쁘지는 않은…… 으응?’

여러 차례 파트너가 바뀌면서 금빛 머리카락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아슈드?’

그 정체는 물론 아슈드였다. 다만 아슈드 주변 상황이 조금 특별했다.

‘왜 다들 표정이……?’

아슈드는 춤의 정석이 무엇인지 알려 주듯 반듯한 자세와 정확한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나이와 오늘 처음으로 황궁 홀에서 춤을 춘 것을 감안하면 더욱더 나무랄 데 없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슈드와 춤을 춘 영애들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아슈드와 춤을 추게 된 것에 대해 무척 기뻐했으나 그것도 잠시, 영애들의 웃는 얼굴은 곧 사라졌다. 이유는 영애들의 미숙한 춤 실력에 있었다.

“다음.”

“…….”

“다음.”

구두 앞코를 밟거나, 춤 동작을 조금이라도 틀리는 즉시, 아슈드는 바로 다른 영애들과 춤을 췄다. 그의 태도에 울음을 터트리는 영애들도 있었다.

‘허…….’

상황이 그렇다 보니 아슈드 주변으로 영애들이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아슈드 주변이 텅 비었고, 델리나는 그를 황당한 듯 바라보았다.

‘하여간 누가 예비 폭군 아니랄까 봐…….’

그사이 음악이 바뀌었다. 이번 곡은 처음 파트너와 끝까지 춤을 춰야 했다. 그래서 더욱 아슈드에게 다가가는 영애가 없었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던 아슈드의 시선이 델리나와 마주쳤다.

“!”

순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델리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어느새 아슈드가 델리나 앞으로 성큼 다가왔고, 결국 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황태손 전하를 뵙습니다.”

“…….”

며칠 전 시험장에서 만났을 때 아슈드는 얼굴을 가린 채였다.

그렇다면 지금 델리나는 아슈드를 모른 체할 수밖에 없었다. 아슈드 또한 그런 델리나를 보고 아는 체를 할지 망설이다가 주변을 한번 보고는 별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누가 봐도 춤 신청인 걸 알 수 있었다. 델리나는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잘 부탁드립니다.”

곧 춤이 시작되었고 델리나와 아슈드는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움직였다.

다행히 이번 곡도 과거에 몇 번 춰 본 적이 있는 곡이었다. 다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델리나는 한 발 한 발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역시 아슈드는 춤도 발군이었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두 사람의 춤은 자연스럽게 홀을 점령했다. 몇몇 이들은 그런 두 사람의 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델리나는 아슈드의 발을 안 밟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실수만 하는 다른 영애들보단 낫군.”

그리고 그런 델리나의 춤이 의외라는 듯, 아슈드도 한마디를 내뱉었다. 칭찬인 것 같아서 델리나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이려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저 또한 여러 실수를 하고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춤도 그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요. 다른 영애들도 나중에 더 좋은 춤을 선보일 수 있겠지요.”

어떻게 해서든 귀족들과 아슈드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델리나는 열심히 영애들을 옹호했다. 하지만 아슈드의 반응은 서늘했다.

“그러면 애초에 실수하지 않을 정도로 연습을 하고 나왔어야지.”

“……그렇긴 하지만 누구나 실수는 하기 마련이니까요. 가령 저와 전하 또한 이렇게 춤을 추다가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고…….”

“난 실수 같은 거 안 해.”

델리나의 말에 딱 잘라 아슈드가 답했다. 델리나는 체념했다. 예비 흑막이라는 것들이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개성 있게 고집스러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음악이 끝을 달리고 있었다. 델리나는 다음 동작을 상기했다.

‘분명 남자 파트너가 여자 파트너의 허리를 잡고서 한 바퀴 돌리는 동작인데…….’

이 곡에서 가장 난이도가 있는 동작이기도 했고 힘이 상당히 드는 동작이기에, 보통은 성인들만 그대로 동작을 했고, 아이들은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점차 델리나의 허리 쪽으로 내려가는 아슈드의 손에, 델리나가 작게 말했다.

“전하. 설마 저 들어 올리시려고요?”

“당연하지.”

“아뇨. 안 그러셔도 돼요. 애초에 아이들은 굳이 안 해도 되는 동작인데요?”

“황족이 못 할 건 없어.”

델리나의 다급한 거절에도 아슈드는 델리나의 허리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델리나의 발이 공중에 붕 떴다.

“……!”

들어 올렸으니 이제 돌리는 일이 남았다. 하지만 왠지 아슈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전하.”

“…….”

“무거우시죠.”

“아니.”

부정하기에는 이미 아슈드의 팔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몸을 돌리기는커녕 당장 주저앉지 않을까 싶어서 델리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떠올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 여기저기 달려 있는 보석들을. 그리고 그것 때문에 상당히 무거워진 드레스를.

몇몇 영애 영식들이 허공에 뜬 채 정지해 있는 델리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델리나는 입이 바짝 말라 왔다.

“그만…… 저 내려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

델리나의 말에 아슈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천천히 델리나를 내려 주었다. 발끝으로 땅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둘 사이로 작은 침묵이 흘렀다. 델리나는 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방금 일어난 일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듯, 저와 아슈드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서 델리나는 너무도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

분명 기드온이었다. 순간 기드온과 눈이 마주친 델리나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어떻게 여길……!’

분명 과거에 기드온은 황궁에 데뷔탕트를 치르러 오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기드온이 황궁에 있었다. 델리나는 설마 싶어 입을 작게 벌렸다.

‘설마 나 찾으려고 황궁까지 따라온 건…….’

기드온이라면 분명 가발을 써도 자신을 알아볼 터였다. 델리나가 급히 돌아서려는 순간, 누군가가 델리나를 붙잡았다.

“어디 가.”

“네?”

“돌리는 거, 꼭 할 거야.”

“네?”

이미 결심을 한 듯, 아슈드의 눈이 열의로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델리나의 관심사는 저 멀리 있는 기드온뿐이었다.

“황족은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야 돼.”

“아무리 그러셔도 이제 곡이 거의 끝났는데요.”

“그래도 할 수 있어.”

“하지만 전하…….”

아슈드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 기드온이 서서히 델리나 쪽으로 다가왔다. 속으로 경악한 델리나가 다급히 아슈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뭐가 되었든, 그 돌리는 동작만 하면 된다는 거죠?”

“뭐?”

시간이 없었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음악에 맞춰, 한껏 비장한 표정을 한 델리나가 아슈드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이게 뭐하는……!”

아슈드가 델리나를 제지하기도 전에 일은 일어났다. 아슈드를 위로 번쩍 든 델리나가 몸을 한 바퀴 돌려 자연스레 아슈드를 내려놓았다. 그에 맞춰 절묘하게 음악이 끝났고, 이후 홀은 정적에 휩싸였다.

“…….”

아슈드가 기가 막히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만,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전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입만 달싹이는 아슈드를 뒤로하고서, 델리나는 급히 인사를 올리고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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