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새로운 보호자
(16/94)
16화 새로운 보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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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새로운 보호자
2023.06.16.
델리나는 드디어 황궁에 도착했다.
아슈드가 폭군이 되고부터는 모두가 오기를 꺼리는 곳이었다. 멀쩡한 황궁은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연회 같은 것은 아슈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들을 숙청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고, 매번 피가 흐르는 잔혹한 연회에 모두 덜덜 떨었다. 오죽하면 연회 초대장만 봐도 벌벌 떠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제 내리시면 됩니다.”
그래서인지 이토록 활기찬 황궁은 델리나에게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데뷔탕트조차 치른 적이 없기에 제대로 된 황궁 구경도 이번이 처음인 셈이지만.
“저희는 여기까지 모셔다드리고, 그 이후로는 혼자 가셔야 합니다.”
“응.”
펠릭이 말한 대로 수도에 오자마자 델리나는 다른 마차로 갈아타고서 황궁으로 향했다. 이후 플로렌 백작가의 마차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서 움직인 결과, 델리나는 거의 맨 마지막으로 황궁에 입성할 수 있었다.
“명단에는 없으신데, 하지만 신분 패는……. 네, 알겠습니다. 적어 놓겠습니다.”
명단을 관리하던 사용인이 델리나가 내미는 신분 패를 보고 별말 없이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제야 델리나도 조심스레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가면서 주위를 둘러보던 델리나의 눈이 빛났다.
“우와.”
화려한 샹들리에와 고급스러운 벽지부터, 저마다 들뜬 듯 걸어가는 귀족들과 바삐 움직이는 사용인들의 모습까지. 연회장 내부는 참으로 활기찼다.
동시에 델리나의 마음도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델리나는 제가 쓴 가발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이후 델리나는 니엘과 샬롯이 있을 법한 곳을 피해 반대로 움직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니엘과 샬롯이 델리나를 제대로 된 사교 모임에 데리고 나간 적이 없었기에 다른 귀족들은 그런 델리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설령 델리나를 안다 해도 어린 시절에 본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가발 쓴 델리나를 알아보는 이들은 없었다.
“원숭이.”
물론 몇 사람만 빼고 말이다.
“……!”
원숭이라는 말에 그 누구보다 빠르게 델리나의 몸이 돌아갔다. 그곳에는 노아가 웃으며 서 있었다.
‘오…….’
매번 대공가 저택에서 보다가 이런 황궁 안에서 보니 새삼 새로웠다.
노아 또한 처음으로 귀족들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셈이었지만, 그의 화려한 외모는 주변에 있는 영애들의 시선을 받기 충분했다. 하물며 델리나조차 노아가 단장한 모습에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나인 거 알았어?”
“그럼. 가발 써도 원숭이는 원숭이인데.”
“……혹시 내 이름 잊은 건 아니지?”
저놈의 원숭이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표정 관리를 못 하는 델리나의 얼굴에 눈매를 휘며 웃던 노아가 답했다.
“알지. 델리나 플로렌.”
이름까지야 그렇다 쳐도 성까지 들으니 어딘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델리나는 노아에게 제 성을 알려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아의 가문인 디아몬 공작가는 제국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길드를 보유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길드의 주인은…….
“여기서 뭐 하고 있지?”
그때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올려 보니 노아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노아가 제 또래 여자아이와 대화하고 있는 것을 흥미롭게 보는 동시에 델리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 영애랑 아는 사이인가?”
“채무자예요.”
“이런, 우리 소중한 고객님인 건 또 몰랐네.”
채무자니, 고객님이니 하는 소리에 델리나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동시에 문장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디아몬 공작가에서는 물 한 모금도 그냥 마시지 말라.
‘에드윈 디아몬……!’
노아의 보호자이자 디아몬 공작가의 공작. 제국 최대 규모 정보 길드의 수장.
제국 내에서 비공식적으로 돈이 가장 많은 이가, 델리나의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에드윈은 델리나를 보면서 가만히 눈을 빛내고 있었다. 델리나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님. 플로렌 백작가의, 델리나 플로렌이라고 합니다.”
“아, 이번에 대공가에…….”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 뒤까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제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좀 더 대화를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에드윈이 주변을 살폈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지만 에드윈과 노아의 존재감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덩달아 그 시선을 느낀 델리나도 슬며시 가발을 만지다가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음에 볼까, 영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어서 델리나도 다급히 에드윈과 인사를 끝내고서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 사람들의 시선은 에드윈과 새로 등장한 노아에게 쏠려 있었기에, 몸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무래도 식이 시작될 때까지 좀 더 구석에 있어야…… 응?’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간 곳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다. 델리나는 익숙한 붉은 머리에 급히 걸음을 멈췄다.
“…….”
붉은 머리의 반센트 또한 델리나의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그뿐이었다. 도로 밑으로 시선을 옮긴 반센트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
눈이 마주쳐서 바로 다른 곳으로 가기도 뭐했던 델리나가 슬며시 물었다. 그러자 반센트가 무심하게 답했다.
“이런 거 안 하고 집에서 연구를 하면 얼마나 더 생산적일까에 대한 생각.”
“……그거참, 효율적이기는 하겠네.”
다들 처음으로 사교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니만큼, 설레고 긴장되는 얼굴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반센트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지극히 평소와 같은 반응이었다.
“어차피 데뷔탕트 할 거면 빨리하는 게 좋으니까. 그래서 빨리하기는 하지만 차라리 집에서 연구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야.”
말 그대로라는 듯 반센트는 지루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델리나가 답했다.
“그러면 다른 연구거리를 찾아보는 건?”
“다른 거?”
“응. 뭔가 흥미 있는 게 여기에 있을 수도 있잖아.”
델리나의 말에 반센트가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정확히는, 이제 반센트는 델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널 굳이 저택 안에서만 연구할 필요는 없지.”
“?”
퍽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반센트의 말에 델리나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선 순간이었다. 델리나 뒤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센트! 너 또 여기 있었네? 내가 구석에 있지 말라고 했지!”
“싫어.”
“싫기는, 너 또 연구거리 생각하고 있었지? 그건 이따 생각하고 얼른 와.”
난데없이 나타난 여자는 반센트를 끌고 가려고 팔을 덥석 잡았다. 그러다 앞에 있던 델리나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머, 뭐야? 반센트 친구야?”
“연구 샘플.”
“아니긴, 너 자꾸 친구 가지고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지?”
“하지만 쟤는 바본데.”
“내가 일반 사람들은 우리랑 생각하는 게 다르다고 항상 말했지? 너 여기서도 자꾸 이러면 실험실 출입 금지시킨다?”
실험실 출입 금지라는 말에 그제야 반센트가 조용해졌다. 고분고분해진 반센트와 반센트와 퍽 닮은 여자를 보고서, 델리나는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에스텔 엘피샤.
현 반센트의 보호자이자 사촌 누나. 그리고 엘피샤 후작가의 후작. 그 특징은…….
반센트만큼 실험하는 걸 어마어마하게 좋아하는 거겠지.
반센트가 장치를 다루는 쪽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지만 에스텔 역시 만만치 않았다. 델리나가 알기로는 대공가의 장치 몇 개들도 에스텔의 손을 거쳐 탄생한 것이기에.
“미안해, 친구. 반센트랑은 나중에 놀고, 일단은 내가 데려갈게?”
“아, 네…….”
“나중에 시간 나면 후작가에 한번 놀러 와도 좋고!”
델리나가 무어라 대답할 새 없이 에스텔은 반센트를 데리고 자리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델리나는 문득 위쪽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칼릭스가 있었다.
“……?”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 건가 싶어서 델리나가 칼릭스의 시선을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델리나 근처에는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칼릭스는 디저트에 끊임없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칼릭스를 보며 델리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저택에서나 황궁에서나 참 한결같은 이들의 태도에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었다.
‘그나저나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다 들어온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연회장에 모인 이들이 어느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하이르 헬리움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동시에 연회장 문이 서서히 열렸고, 모든 이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하지만 델리나는 하이르의 뒤에 있는 이에게 주목했다.
아슈드.
당시엔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제대로 된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