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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다정남 (10/94)


10화 다정남
2023.06.10.



 
“완벽해, 완벽해!”

종이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델리나가 외쳤다. 기어이 이 넓고 복잡한 대공가의 내부 구조를 외우는 데에는 성공했다. 오늘의 쾌거를 이루기까지는 여러 위험을 겪어야 했다.

‘진짜, 정원에서는 공중으로 날아오르질 않나…….’

베티가 아니었다면 멀쩡하게 두 발로 돌아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몸으로 익혀 보는 것이 좋다며 각종 장치란 장치는 다 건드리던 베티를 떠올리며, 델리나는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비밀 통로 이야기는 없구나.’

책의 마지막 장까지 살펴보았지만, 자신이 타고 내려왔던 비밀 통로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납득은 갔다. 분명 벨리온이나 그의 최측근들만이 아는, 더 비밀스러운 통로들이 이곳 저택에 있을 테니.

‘그리고 난 그걸 타고 내려와서 버젓이 침실로 들어갔고.’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오싹해서 델리나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난 델리나는 설렁줄을 보다가, 문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혼자 나가 봐야지.

언제까지고 베티의 도움을 받으며 저택을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델리나는 어디를 가 볼까 하다가, 칼릭스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칼릭스도 이 저택에 살고 있는데.

다른 아이들이야 제집이 있다지만 칼릭스는 이곳에 살았다. 하지만 베티와 저택을 휘젓고 다니는 동안, 칼릭스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건 또 나름대로 신기한 일이었다.

싫든 좋든, 일단은 가까이 있어야 하니까…….

그 다섯 명이 제국을 와장창 말아먹기 전에 곁에서 지켜볼 의무가 있었다. 델리나는 칼릭스가 머무는 방까지 가는 길의 구조를 떠올리며 힘차게 문을 열었다.

“……!”

곧바로 힘차게 위로 솟구쳤지만 말이다.

“뭐야? 그물?”

저를 허공에 떠오르게 한 것은 그물이었다. 어느새 공중 그물에 매달린 델리나가 당황한 채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이런 장치가 있는 건 못 봤는데?

물론 그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곧 그물 아래로 다가온, 익숙한 붉은 머리카락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

“아, 안녕? 반센트…… 맞지?”

반센트의 등장에 델리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하지만 반센트는 델리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거 네가 한 거 맞지?”

“…….”

“좀 풀어 주면 안 될까?”

나름대로 웃음까지 지으며 말했건만 반센트는 팔짱까지 끼며 델리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진짜 이상한데.”

“응?”

“멧돼지나 걸릴 법한 뻔한 장치에 걸려드는 애한테, 내가 당했다고?”

“…….”

분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반센트는 여전히 의아하다는 눈이었다.

“시험 날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어, 어?”

반센트의 입에서 나온 ‘시험’이라는 말에 델리나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이상하리만큼 그때 기억이 안 나거든.”

“…….”

“이런 불쾌한 경험은 난생처음 있는 거라 짜증이 나.”

그 불쾌한 경험, 그대로 그냥 계속 가지고 있는 게 나을 텐데.

당시의 참사를 떠올리던 델리나가 곧 죽어도 말 못 하겠다는 듯 눈을 꽉 감았다.

“너, 광대라며. 그래서 네가 나한테 무슨 이상한 짓을 했다는 건 알겠어.”

“…….”

“근데 왜 무릎이 아픈지는 모르겠고.”

‘그건 너네들이 네발로 기어 다녔으니까.’

“이빨도 욱신거렸고.”

‘그건 막대기를 입으로 물고서 나한테 던져 달라고 했으니까…….’

갑자기 왜 이리 그물 안이 안락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델리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의 똑똑한 머리도 가끔은 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아무래도 모든 걸 다 기억하려면 뇌가 힘들잖아.”

“난 다 기억하는데.”

“……어, 그렇구나. 근데 그래도 말해 줄 수가 없어. 이건 가문의 비법이라서.”

그리고 기억 못 하는 게 너의 뇌에 훨씬 더 좋단다?

델리나는 마지막 말을 꾹 삼켰다. 그녀의 말에 반센트가 잠시 델리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잠깐만, 이거 안 풀어 주고 가?”

“너도 말 안 해 주는데, 내가 널 풀어 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뭔 논리가 그따위야?

진심인 듯, 반센트가 천천히 등을 돌리려고 했다. 저택엔 가뜩이나 사람도 별로 없는데, 이러다가는 하루 종일 매달려 있을지도 몰랐다. 델리나가 다급히 창을 열어 키워드를 찾았다.

<다정남>

‘먹혀라, 먹혀라, 제발…….’

델리나가 키워드를 선택하자 반센트의 머리 위로 키워드가 떠오르더니 곧 사라졌다. 델리나 쪽으로 다시 몸을 돌린 반센트의 얼굴은, 놀랍도록 풀어져 있었다. 델리나의 얼굴도 덩달아 환해졌다.

“있잖아! 나 이것 좀 풀어 주면…….”

“내가 널 왜 안 풀어 주는지 설명해 줄게.”

“뭐?”

“첫째, 아직까지 네 힘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 네가 이걸 푸는지 못 푸는지 확인해 보려고. 둘째, 그 광대 기술이 뭔지 조사하고 싶어졌거든. 그래서 실험 삼아. 셋째, 넌 아직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아니, 나 못 풀어 주는 이유 다정하게 설명하지 말고!

뭔 놈의 능력이란 게 멀쩡한 것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저를 못 풀어 주는 이유를 100가지라도 댈 기세여서 결국 델리나는 도로 능력을 풀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묘한 표정으로 반센트가 델리나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뭐야? 왜 내가 너한테 일일이 설명했지?”

“어?”

“이게 네가 말한 비법인가 하는 건가?”

기억을 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는 반센트 때문에 델리나 또한 당황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때는 정신까지 개가 된 거였으니까…….

어떤 의미로는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 제 능력을 알리기에 효과적일 것 같았다. 델리나가 당당히 말했다.

“어. 이게 내가 말한 가문의 비법이야.”

“…….”

“그러니까 이거 안 풀어 주면 또 쓴다? 이번에는 내가 뭘 할지 몰라.”

나름 협박한다고 한 건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입을 다문 반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번 더 해 봐.”

“어?”

“내 의지대로 안 되는 가문 비법이라니, 이건 재밌네.”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제 몸도 실험하는 반센트의 반응에 당황한 델리나가 입을 뻐끔댔다. 그리고 반센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도 머뭇거리는 걸 보니 혹시 제약이 있나? 횟수 제한이 있다거나.”

“……!”

“그런데 지난번에는 네 명한테 한 번에 했으니까, 한 사람에게 걸 수 있는 횟수 제한이 있나? 아니면 한 사람한테 하루 한 번씩?”

말하는 족족 델리나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제야 반센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해 볼 가치가 있네.”

“…… 잠깐, 잠깐만.”

이대로라면 진짜 못 풀려날 것 같아서 델리나가 다급히 말했다.

“난 제국 7대 수학 난제를 어떻게 푸는지 알아!”

델리나의 말에 그동안 줄곧 무감했던 반센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어떤 난제?”

“이거 풀어 주면 알려 줄 수 있지.”

가문 비법 이야기를 할 때도 덤덤하게 반응한 놈이 눈을 반짝이자 델리나도 내심 놀랐다. 그 순간, 빠르게 델리나의 몸이 공중에서 내려왔다.

“와악!”

“말해 봐. 뭔데?”

……얘 진짜 진심인데?

바닥에 찧은 엉덩이를 문지르기도 전에 반센트가 물었다.

“3번 난제 문항인데 크아프 항정식을 적용하면 돼.”

“그 공식은 어떻게 나온 건데?”

“그, 그냥 내 생각으로?”

“그래서 그 공식을 대입하면 어떤 답이 나오지?”

“……아직 거기까지는…….”

내가 알겠냐.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실제로 3번 난제가 풀리기는 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 델리나가 그걸 꼼꼼히 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자세히 본다 해도 이해할 리 만무했지만.

“…….”

계속 답하다가는 밑바닥인 수학 지식이 들통날 것 같아 델리나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사이 반센트는 점점 델리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그 3번 난제는 내가 풀고 있던 건데.”

“…….”

“그 방법 생각한 것도 나랑 같네.”

그거 푼 사람이 너였니.

그제야 미래의 3번 난제를 누가 풀었는지 알게 된 델리나는 침묵하며 시선을 피하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뭐가 되었든 이놈에게는 제 능력보다 장치나 공식 같은 것이 더 잘 먹힌다는 것을 뼈저리게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원하던 실험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얻은 건 있네.”

“그래. 그거 정말 축하하고, 난 이제 좀 들어갈게?”

“안 나가고?”

“응. 갑자기 나도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져서.”

저놈과 계속 이 있으면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실험당할 위기에 처할 것 같았다. 웃으면서 뒷걸음질을 치던 델리나는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방문을 쾅, 하고 닫았다. 그리고 문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하하…….”

잠깐 동안 흑막 한 놈을 만나는 데만도 이리 힘이 빠지는데, 다른 놈들은 또 어떨까 싶었다. 그들을 생각하는데 순간 어떤 생각이 델리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반센트도 잃어버린 기억이 거슬려서 날 찾아왔는데,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순간 델리나는 상상했다. 제 방으로 하나씩 찾아오는 다른 흑막들을. 델리나는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가 앉았다.

복습, 복습하자.

뭐가 되었건 오늘은 나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델리나는, 그동안 배운 것을 복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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