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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황궁 데뷔탕트 (9/94)


9화 황궁 데뷔탕트
2023.06.09.



 
“오늘부터 아가씨를 모시게 된 하녀, 베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응. 나도 잘 부탁해, 베티.”

델리나가 배정받은 방은 원래 델리나가 살던 방보다 몇 배는 더 크고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하녀까지 붙여 주다니, 델리나는 대공가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앞으로는 시킬 것이 있다면, 침대 옆에 있는 줄을 당겨 주시면 됩니다. 그 외에도 언제든 말씀만 하시면 바로 오겠습니다.”

하녀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절도 있는 몸짓의 여인이었다. 베티의 말에 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씻고 옷을 갈아입혀 드리겠습니다.”

이래저래 많은 일이 있었고, 감옥에도 갇혀 있었던 탓에 델리나의 몸은 꼬질꼬질했고 드레스도 여기저기 찢겨 엉망이었다. 베티는 놀라운 속도로 물을 떠 와 델리나의 몸을 깨끗하게 씻겨 주었다.

“저택에 드레스가 없어서 임의로 남자아이의 옷을 수선해 만들었습니다. 드레스는 주문을 넣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와…….”

남자아이의 옷을 수선했다고 했지만 베티가 내민 옷은 그냥 드레스 같았다. 새 옷을 입은 것처럼 델리나는 거울에 이리저리 제 몸을 비쳐 보았다.

“엄청 예뻐. 고마워.”

“아닙니다. 해체하고 꿰매는 것이 제 특기라서요.”

“아, 응. 그렇구나…….”

정확히 뭘 해체하고 꿰맨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왠지 물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델리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곧 베티가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를 가져와 책상 앞에 턱, 놓았다.

“뭐야, 이게?”

“이곳 대공가 저택의 내부 구조와 바깥 구조, 그리고 영지 주변의 지형들을 그려 놓은 것들입니다.”

“……근데 이걸 왜?”

“이제 아가씨께서도 이곳에 사시게 되었으니, 이 구조들을 머릿속에 정확히 넣어 두셔야 합니다. 곳곳에 침입자들을 막는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으니까요.”

장치라는 소리에 델리나는 지난 밤 자신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던 도끼를 떠올렸다.

“장치라면, 혹시 정문에 설치되어 있는 도끼 같은 거?”

“예. 대체로 침입자를 바로 죽일 수 있는 장치들이 많습니다.”

“응. 그렇구나. 그러면 빨리 펜 좀 줄래?”

갑자기 없던 공부 욕구가 샘솟는 기분이었다. 델리나의 학구열을 알아차린 듯 베티가 그림 속 한 곳을 가리켰다.

“이해하기 쉽게 우선 아가씨가 지금 있는 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현재 아가씨가 쓰고 계신 방은 이곳, 대공가의 여인들이 쓰는 방입니다.”

“뭐?”

어쩐지 방이 엄청 크고 좋더라니. 예상치 못한 파격 대우에 델리나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여길 내가 써도 돼?”

“어차피 대공가엔 남아 있는 여인들이 없으니까요. 전하께서도 허락하셨습니다.”

델리나는 베티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대공가에 여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 살지 않는 것일 뿐.

맞아. 내가 성인이 되고서…….

저의 생각이 맞다면 분명 몇 년 후 그녀가 올 것이다. 바로 벨리온의 딸인, 셀린이.

사실 제국이 본격적으로 망하기 시작한 건 그즈음으로 추측되었다.

셀린이 대공가에 오면서, 그녀의 곁에 있기 시작한 다섯 명의 흑막들이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게 되면서. 그리고 나중에 그 셀린이 살게 될 방에 버젓이 제가 있는 게 묘하게 느껴졌다.

‘그때가 되면 다른 방으로 가야겠지……. 아니, 그때까지 저택에서 잘 버티고 있을까? 아니, 아니야. 집중, 집중.’

순간 또 한 번 밀려 들어오는 부정적인 생각에 델리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다시 이글거리는 눈으로 책에 집중했다.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저택에서 허무하게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 * *

벨리온의 집무실은 오늘도 고요했다. 벨리온이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울리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를 하던 펠릭이 느닷없이 실실 웃음을 지었다.

“뭘 그렇게 웃어.”

“아, 그게요. 방금 전에 아가씨를 봤거든요. 저택 구조를 외우고 있는 것 같던데, 아가씨가 걷는 모습이 너무 재밌어서요.”

델리나는 침입자를 막는 장치가 어디 있는지 배우고 있었기에 베티의 도움을 받아 복도를 한 발 한 발 아슬아슬하게 내딛고 있었다. 마치 갓 걸음마를 배운 아기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퍽 진지한 델리나의 얼굴에 펠릭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지금 며칠째 계속 저택 구조를 외우고 계십니다. 상당히 열정적으로 배우시고 있고요.”

“…….”

“전하도 보셨습니까?”

“다음 거 보고해.”

펠릭이 물었지만 벨리온은 관심 없다는 듯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물론 자신의 주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펠릭은 더 이상 델리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기야. 원래 가르치고 있는 분들께도 별 감정 없으신 분인데.’

쉬쉬하고 있긴 하지만 나중에 아이들의 신분이 드러나면 제국이 뒤집어질 것이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이 내로라하는 귀족 집안 출신인 것은 물론 황족인 아이도 있었기에.

아슈드가 현재 벨리온에게 후원을 받고 검술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은, 황제조차 몰랐다. 사실 황궁과 대공가는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아니,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을 뿐 늘 서로를 향해 칼을 갈고 있었다.

황제 측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황태손 아슈드를 보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황제에게 있어 아슈드는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 존재니까. 게다가 그가 죽기라도 하면 그것을 빌미로 대공가를 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물론 벨리온 또한 그런 황제의 속내를 알고 있었고, 도리어 아슈드를 가르치게 되었다. 어른들의 정치 싸움에 휘말려 죽기에는 아슈드의 재능이 출중했고, 아슈드 또한 벨리온의 가르침을 좋아했다.

‘하물며 칼릭스 님은 또 어떤가.’

벨리온의 먼 친척뻘이긴 하지만 울피림 대공가의 후계자로 거론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검술 쪽으로는 천재적이었고, 그 외의 능력도 발군이었다.

‘그리고 노아 님도.’

제국 내에서 비공식적으로 돈이 가장 많다는 디아몬 공작가의 차기 후계자. 그래서인지 정보나 돈을 수집하는 데에 있어서 노아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노아는 지금 겨우 열두 살이었지만, 아마도 그가 자신보다 자산이 훨씬 많을 것이라 펠릭은 확신했다.

‘뭐 마지막 반센트 님도…….’

제국 내에서 비공식적으로 가장 괴짜라는 엘피샤 후작가의 핏줄이었다.

‘늘 뭔가를 발명하는 데 집착하며, 저택 내에 기계음이 끊이지를 않는다고 해서 괴짜라고 불리고 있지.’

물론 반센트 또한 그 분야에서는 제일 뛰어났다.

사실 제국을 뒤흔들 만한 인물들이 대공가에 모여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벨리온은 늘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서류를 볼 뿐이었다.

심심해서.

그것이 벨리온이 다른 아이들을 후원하고 가르치는 이유였다. 그의 무감한 눈을 보자면 정말 그런 것 같긴 했지만.

그나저나 경매장에서 만난 아이는 도대체 왜 데려왔는지 펠릭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너무도 왜소한 데다 금방이라도 죽을 듯 위태로운 아이였다. 그런 이를 제 주인이 데려왔다는 것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펠릭은 곧 수긍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재능을 보셨겠지.’

벨리온은 사람들의 숨겨진 재능을 알아보는 데 탁월했다. 그렇기에 그 아이 또한 허투루 데려왔을 리 없었다.

‘그런데 설마 그 애를 아가씨께 선물할 줄이야.’

속을 알 수 없는 주인의 행보도 재밌지만, 최근에 들어온 델리나라는 작은 소녀도 펠릭은 무척 재미있었다.

“……많이 한가한가. 자꾸 웃는 걸 보니.”

“아니요.”

“웃음이 더 나올 만큼 일을 얹어 주지.”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제법 살벌한 벨리온의 경고에 그제야 펠릭도 서류에 집중했다.

“곧 황궁 데뷔탕트가 열립니다.”

“…….”

“이번에 칼릭스 님의 데뷔탕트를 치르기로 하셨죠?”

황궁 데뷔탕트.

일반적으로 귀족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 진행되는, 12세부터 16세까지의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사교계의 데뷔를 알리는 신고식이었다.

황궁의 큰 연례행사이니만큼, 대부분의 귀족들은 데뷔탕트에 참석했다. 그리고 칼릭스의 보호자인 벨리온 또한 참여해야만 했다.

“이번 데뷔탕트에서 네 분 모두 데뷔탕트를 치르신답니다. 노아 님도요.”

디아몬 공작가에서 숨겨 왔던 노아 또한 데뷔탕트를 통해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릴 예정이었다. 벨리온이 별다른 말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준비 같은 것은 이후에 하고……. 참, 그러고 보니까 아가씨도 데뷔탕트를 치를 나이긴 한데요.”

올해 열두 살인 델리나도 엄연히 데뷔탕트를 치를 수 있는 나이였다. 물론 대부분은 열다섯 살이나 열여섯 살에 치르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방금 펠릭이 말한 네 명의 아이들이 그러한 예였다.

“한번 여쭤볼까요?”

“…….”

“여쭤보겠습니다.”

벨리온은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펠릭이 싱긋 웃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호칭을 다 쓰신다고 하십니까?”

“뭘.”

“광대 말입니다. 후원하는 분들 중에 그렇게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광대를 광대라 하지, 뭐라고 해.”

“하긴. 그건 그렇죠?”

그 말에 잠시 델리나를 떠올린 듯, 펠릭이 큭큭댔다. 그때 집무실 창문으로 무언가가 붕 떠올랐다.

“아아아아아악!”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델리나였다. 찰나의 순간 델리나와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이 가만히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정원에 있는 장치를 건드린 모양입니다.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없는 걸 보니, 베티가 잘 받은 모양이네요.”

말하면서도 펠릭은 웃음을 참지 못했고, 벨리온은 창문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처럼 오늘도 울피림 대공가는 고요할 뻔했다.

“아아아아악!”

한 여자아이의 비명 소리만 없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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