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The Death of You and Me (2)
왜일까.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을 때마다 종종 보였던 풍경.
누군지 모를 그 소녀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웃어 보이거나, 어느 병원의 병실에 누워 있기도 했고, 악마의 목소리로 내게 속삭일 때도 있었다.
그리그 그 소녀는,
지금 내 앞에 있다.
까만 후드를 뒤집어쓴 채, 은은한 보라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하염없이 나를 향해 비추고 있다.
골목길에는 지금 우리 둘뿐이다. 노을은 저문 지 오래라 그저 짙푸른 어둠만이 배경에 깔려 있다.
툭. 투둑―.
불현듯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신경 쓰이지 않는 잔잔한 빗소리가, 침묵 대신 우리들 사이에 고요히 울려 퍼졌다.
“괜찮아?”
그때쯤.
소녀가 입을 열었다.
“……뭐?”
“죽을 뻔했잖아. 아까 그 마법사한테.”
무미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청아하게 들린다.
“많이 다쳤네. 아파 보여.”
“…….”
“고쳐 줄게.”
소녀가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흠칫 당황했지만, 피하진 않았다.
스윽―.
소녀의 작은 손이 내 볼을 어루만졌다.
곧 그 손가락 틈에서, 보랏빛의 비누 거품 같은 것이 스멀스멀 흘러나와 피부를 부드럽게 감쌌다.
….
….
통증이 사라졌다.
상처는 온데간데없었다. 처음부터 내 몸에 다쳐서 생긴 상처 따위는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
나는 조심스레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소녀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오라버니랑 닮은 사람.”
“…….”
“근데 조금 늙었어.”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동일 인물이야?”
나는 순간 잠시 망설였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소녀도 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고 나서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빗속에서 아주 잠깐 머무른 그 미소를 보고서, 어째서인지 나는 눈물을 흘렸다.
모르겠다. 마치 죽을 만큼 그리워하던 뭔가를 돌려받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아무런 기억도 없는데.
추억만이 떠올라 있었다.
“울지 마. 오라버니.”
소녀는 자기가 내 동생인 것처럼 말했다.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은 무척이나 가련했다.
“뚝 그쳤어?”
“…….”
“그러면 나, 다녀올게.”
라고 말하더니, 소녀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홀로 어딘가에 가려 했다.
“자, 잠깐만! 어디 가는 거야!”
나는 소녀를 멈춰 세웠다.
소녀가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마법사.”
그러고는 말했다.
몹시 태평한 목소리로.
“죽이러 가야지.”
순간.
섬뜩한 기운이 뒷목을 붙잡았다.
“그게, 무슨……?”
“오라버니가 말했잖아.”
당황한 나와 다르게,
소녀는 그저 담담했다.
“마법사는 다 죽여야 한다고.”
당연한 진리를 굳이 말하듯이.
나에게 역으로 물음표를 던졌다.
“아니야?”
뭐라고 답해야 할까.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까.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데도.
거짓을 고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안 그래도 돼.”
“…….”
“네가 누굴 죽일 필요는, 없으니까…….”
소녀는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알겠어.”
왜인지 그 미소에,
구원받은 것 같았다.
***
웨스트록 7구역의 어딘가.
늦저녁의 빗길을 걸으며, 나는 옆에서 같이 타박타박 걷고 있는 소녀― 이가인을 몇 번씩 훔쳐봤다.
이따금 그녀와 눈이 마주쳤지만, 눈이 마주치더라도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계속 걸었다.
“…….”
나는 이 소녀를 알고 있다.
왜인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다 왔어.”
내가 발을 멈춰 선 곳은 매우 익숙한 장소.
즐거운 우리 집. <에덴 파크 모텔> 앞이었다.
“대저택.”
“모텔이야.”
“방이 엄청 많아.”
“모텔이니까.”
나는 이가인을 데리고 208호로 향했다.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철컥―.
안으로 들어서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두컴컴한 방 안. 브라운관 TV 앞에 앉아 게임기를 가지고 놀고 있는 두 여자아이가 보였다.
시안과 스칼렛.
메리가 두고 간 양녀들.
“얘들아.”
한창 게임에 몰두하고 있던 녀석들이 내가 집에 돌아온 것을 눈치챘는지 금방 고개를 돌렸다.
“아, 오빠 왔다.”
“에이 씨, 얀마! 오라방!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제 기어들어 와? 요즘 회사도 안 나가면ㅅ…….”
시안과 스칼렛의 시선은 처음에 내 쪽을 향했다가, 곧 내 옆에 자리해 있는 인물에게로 옮겨졌다.
“……마더……?”
메리와 똑같이 생긴 소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죽은 메리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줄 알았으니까.
“얘들은 누구야?”
“시안이랑 스칼렛. 내 동생들이야.”
“오라버니, 나 말고도 동생이 있었어?”
“으음. 최근에 생겼어.”
이가인은 천천히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행동에 시안과 스칼렛은 움찔했다.
“안녕.”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덤덤한 목소리. 그때 마주한 눈동자 속의 공허함을 목격한 뒤에야, 녀석들은 그녀가 자신들의 어머니가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시안, 언니한테 수건 좀 갖다줄래?”
“아, 으응…….”
“스칼렛은 가서 커피포트에 물 좀 끓여 줘. 선반에 티백이랑 과자 있으니까 언니랑 셋이 같이 먹고 있어. 나는 옆방 가서 갈아입을 옷 좀 챙겨 올게.”
아이들은 군말 없이 내 말에 따랐다.
나는 방에서 나와 210호로 들어갔다. 생전에 메리한테 사줬던 여벌 옷들이 아직 옷장에 있었다. 그중에는 그녀가 한 번도 안 입은 옷들도 많았다.
옷가지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빗물에 젖어 차가워진 이가인의 몸을 따끈한 보이차로 데우게 한 뒤, 화장실에 보내 더운물로 샤워를 하게 시켰다.
씻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이가인은 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곤히 잠이 들었다.
“오라방.”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스칼렛이 정색한 표정을 하고서 내게 다가왔다. 시안도 함께였다.
“저 여자 누구야.”
“…….”
“설명해 봐. 이게 다 뭔 일인지.”
스칼렛과 시안은 어린아이들이다.
그렇지만 알 권리는 충분히 있었다.
대충 둘러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다 털어놓았다.
1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 것, 정체불명의 소녀와 같이 원래 시간선으로 돌아온 경위까지.
“저 여자가, 진짜 암귀라고……?”
“확실하진 않아. 다만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했어. 그리고…… <부름>을 쓰는 것도 직접 봤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10년 전의 시간대에서, 제퍼슨 브리즈가 나를 원래 시간선으로 전송시키려고 마법을 구사한 순간.
검은 구체가 내 시야를 가득 메웠었다.
그 구체에 사로잡혀,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나는 언젠가 스스로 그것을 구사한 적이 있다.
수개월 전, 괴물 트롤 자그말렉 피터스와의 일전에서 멍청하게도 <부름>에 <강화>를 부여한 순간, 그때와 똑같은 구체를 내 손으로 만들어냈었다.
모든 것을 잡아먹는 기묘한 블랙홀.
아마도 그것이 ‘진짜 암귀’의 <부름>.
“그래, 뭐, 저 여자가 진짜 암귀라고 치자. 근데, 왜 암귀가 마더랑 똑같이 생긴 거야?”
“메리한테는 어렸을 때 헤어진 친딸이 있었다고 했지. 아마 그래서 저렇게 닮은 게 아닐까 싶어.”
“그러면 저 여자가, 마더의 진짜 딸…….”
스칼렛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꽤나 주눅 든 것처럼 보였다.
“언니인 거야. 스칼렛의 언니.”
“…….”
“시안의 언니이기도 하고.”
곧 녀석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다행히도 위로가 통한 모양이다.
“오라방이랑은 무슨 관계인 건데?”
“잘은 모르겠지만, 내 여동생인 것 같아.”
“친동생은 아닐 거 아냐. 둘이 하나도 안 닮았어.”
“그렇겠지.”
“하지만 둘 다 자색 마력을 갖고 있는 거지. 똑같이 흑마법사고. 비슷한 <부름>도 쓸 줄 알고.”
같은 색의 마력인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자색 마력은 기타 색채 중에서도 특이한 색채로 꼽힌다. 연구에 따르면 자색 마력 보유자는 전체 마법 인구의 약 0.01%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더군다나―
“…….”
흑마법 성물로 악마와 계약할 수 있는 흑마법사는 성물 하나당 한 명뿐. 동시 계약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녀도 나처럼 ‘카인의 단도’를 통해 흑마법을 익혔다고 한다면, 지금 현재 이 시간선에 그녀는, 이가인은 살아 있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즉―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란 거다.
“오라방. 어떡할 거야?”
“…….”
“알잖아. 저 여자가 진짜 암귀라면 절대 감당 안 돼. 지금은 얌전해 보이지만, 언제 갑자기 헤까닥 돌아서 우릴 다 죽여 버릴지 어떻게 아냐고.”
스칼렛의 말이 옳다.
그녀는 분명 위험 요소다. 애초에 집까지 데려오거나 해서는 안 됐다. 지금이라도 제퍼슨 브리즈나 미르각시와 처리 방식을 의논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답답했다.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나는 진짜 암귀가 아니다.
진짜 ‘유진 연’조차 아니다.
영혼만 빙의한 가짜이기에.
그 어떤 것도 알 턱이 없었다.
“저기.”
그때.
줄곧 가만히 있던 시안이 입을 열었다.
“기억나게 할 방법이, 있기는 한데.”
“……?”
“오빠가 그러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
스칼렛이 끼어들었다.
“잠깐. 너 설마, 그거 쓰게?”
“으응. 스칼렛도 도와줘야겠다.”
“에이 씨, 위험 부담이 좀 큰데…….”
“잘못되면 뭐, 오빠 책임인 걸루.”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 걸까.
어쩐지 아이들은 진지해 보였다.
“야, 오라방.”
영문을 모르고 있는 나에게,
스칼렛이 툭 말을 집어던졌다.
“나랑 시안이 초능력자인 거, 알지?”
“…….”
“나는 <상대가 거짓말을 믿게 하는 능력>이고, 시안은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이잖아.”
“그런데?”
“우리들 말이야, <슬로터하우스>에서 실험 받는 동안 아주 갖가지 별 지랄을 다 겪어 봤거든. 그중에 ‘사자 기억 재생술’이라고, 죽은 사람 시체에서 살아 있을 때의 기억을 추출해내는 정신 나간 짓거리도 해봤어. 그러니까 대충 그거의 응용판 같은 건데…… 뭐어, 쉽게 말하자면 이거야.”
녀석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오라방의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낼 수 있어. 너무 옛날 일이라 기억이 안 난다고 한 부분까지도.”
“……진짜로?”
“구라 까서 뭐 하겠어. 우린 지금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저 여자가 누구인지. 마더랑은 무슨 관계인 건지. 그리고, 오라방이랑 저 여자 사이에 과연 뭔 일이 있었던 건지.”
“…….”
“오라방은 알고 싶지 않아?”
대답을 고를 필요 따위는 없었다.
알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것 전부를.
“방식이 쪼끔 위험하긴 해.”
“뭘 할 건데?”
“아까 말했다시피, 이건 ‘사자 기억 재생술’을 응용한 거라, 죽은 사람 뇌가 필요하거든? 그래서.”
스칼렛은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단 오라방을 죽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