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180화 (180/201)

180화. The Death of You and Me (1)

“……!”

제퍼슨 브리즈는 똑똑히 보았다.

미약한 떨림. 허나 분명한 움직임.

‘정지한 시간 속에서, 반응했다……?’

<시간 정지>는 물리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의 이동과 반응, 이어 우주의 근간을 이루는 절대적 법칙마저도 일순 불허하는 시공 마법의 극의.

우연히 움직였다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

생각을 깊이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제퍼슨 브리즈는 유진의 몸을 감싼 마력 칼날을 거뒀다.

만약 그가 정말로 스스로 움직였다면, 그것이 다시 한번 더 가능한 일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큭…….”

유진은 뒤늦게 뒷걸음질을 쳤다.

벌써 30여 분째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의 마도사로부터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었다.

상처로 얼룩진 피부.

엉망진창이 된 몸뚱이.

그럼에도 아직 유진은 뭐라도 해볼 셈이었다.

방금 전에 자기가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 따위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당신, 보이고 있었습니까?”

“…….”

“보이고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유진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허세로 보일 만큼 자신만만한 미소.

아까의 그 멍청한 표정과 이 건방진 미소 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괴롭힘의 성과가 슬슬 드러나는 모양이군요.”

확인할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제퍼슨 브리즈는 마력을 끌어모았다.

“당신이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 번.

단 한 번이면 된다.

조금이라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때는 이 자를 살릴 이유가 충분해지리라.

“부디, 제 신뢰를 망치지 말아주시길.”

―시간은 그대로 정지한다.

도심 한가운데의 널찍한 도로.

움직이는 사물은 아무것도 없다.

비디오테이프 속 정지 화면 같은 세계.

이 얼어붙은 시간의 주인인 제퍼슨 브리즈만이, 유일하게 숨을 쉬고 걷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그리고 유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것들처럼,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1초가 지났을 무렵.

―움찔.

유진의 손가락이 떨렸다.

파르르 하고. 아주 선명하게.

멈춘 시간 속에서 움직였다.

누가 봐도 그렇게 보였다.

“…….”

제퍼슨 브리즈는 유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눈을 마주쳤다. 허나 마주친 것 같지가 않았다. 유진의 동공은 그저 투명한 무반응이었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 손가락 쪽을 보았다.

<시간 정지>를 무시하고 움직인 그 손가락이다.

그극―.

그그극―.

손가락 사이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다.

보라색으로 들끓는 그것은 곰팡이가 뭉쳐 생긴 균 덩어리의 거품, 혹은 벌레의 군체처럼 보인다.

“<부름>이군.”

악마의 힘이 자아낸 최흉의 흑마법.

이 마법의 원천은 시공 마법이기에, 멈춘 시간 속에서도 상관없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었다.

“눈속임이었나.”

유진의 손가락이 움직였던 이유는, 시간이 정지하기 전 미리 발동시켜 둔 <부름>에 반응했을 뿐.

이는 단지 목숨 연명을 위한 수작질에 불과했으며, 정작 유진은 의식이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끝까지 실망만을 안겨주는군요. 당신은.”

무얼 기대한 걸까.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 텐데.

“…….”

그래도, 남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시간 감각이 가장 예민해지는 것은 바로 죽음 직전의 순간. 거기에 충분히 걸어볼 만했다.

제퍼슨 브리즈는 손아귀에 마나를 품었다.

그가 마력으로 빚어낸 것은 핏빛 칼날― 공간조차도 찢어버리는 고위 파괴 술식 <미스틸테인>.

이걸로 유진의 심장을 찌를 것이다.

운이 좋다면 <시간 역행>을 각성하겠지.

운이 별로 좋지 않다면.

뭐, 그냥 거기까지인 거고.

“유감이지만.”

미르각시의 애제자를 죽이게 된 것은 무척 가슴이 아팠지만, 이 또한 그녀가 원했던 일이었다.

무엇보다―

“당신이 원했던 일이기도 하니까요.”

스스로의 책임이다.

손이 닿지 않는 나무의 꼭대기에 감히 올라서려 했으니, 그 나무에 깔려 죽어도 할 말은 없을 터.

제퍼슨 브리즈는 오른손을 꽉 쥐었다.

지금부터 할 일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미안합니다.”

손아귀에 품은 <미스틸테인>을.

유진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았다.

내리꽂은 칼날이,

닿으려던 그 순간.

….

….

어째서인지.

닿지 않았다.

“……?”

닿기 직전에 손이 멈췄다.

멈추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어라. 뭔가 이상하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무슨……?’

손이 굳었다. 입이 굳었다.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다.

지금 여기 멈춘 시간 속에서.

또 한 번 시간이 멈춘 듯했다.

‘시간이, 멈췄다고……?’

5초의 카운트다운이 지났음에도.

<시간 정지>는 해제되지 않았다.

여전히 모든 게 정지된 상태 그대로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시간의 주인이라 자칭했던 제퍼슨 브리즈마저도, 그 마비의 대열에 합류해 있었다.

‘…….’

이 현상을 설명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시간 정지>를 발동했다.

‘누구지? 이쪽 시간대의 나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어. 10년 전의 나는 아직 자의로 <시간 정지>를 구사할 수 없는 단계야.’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난데없이 당면한 미스터리의 해답을 풀어내기 위해, 제퍼슨 브리즈가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찰나.

‘……잠깐…….’

‘……10년 전……?’

투웅―.

문득.

기이한 감각이 전해졌다.

퉁. 퉁. 투웅―.

휘파람처럼 귀 아랫부분을 스쳐 지나간.

출처도 원인도 알 수 없는 아리송한 감촉.

주륵―.

무슨 일일까.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일종의 반사 작용처럼. 뒷목이 오싹해졌다.

‘이건…….’

어렴풋하게 확신이 들었다.

그는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시간 정지>가 아니야…….’

그것은 <정지>의 영역을 넘어선.

<가속>도 <역행>도 아닌 무언가.

굳이 단어를 지정하자면― <혼돈>.

시간의 법칙을 죄다 무시하고 미쳐 날뛰는.

마치 지옥의 짐승이 벌여 놓은 듯한 난장판.

그래.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도 겪은 적이 있다.

이건 틀림없이.

그자의 짓이다―.

***

눈을 깜빡인 순간.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응……?”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스트포레스트의 거리에 있던 나는 어느새 컴컴한 뒷골목에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제퍼슨 브리즈가 시간이 멈춘 사이에 뭔가 또 공간이동 마법 같은 걸 쓴 모양이다.

“유진 연 씨. 내 말 잘 들으세요.”

그리고 문제의 당사자는, 어째서인지 나를 보자마자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당신을 원래 시간선으로 전송시킬 겁니다.”

“뭐?”

“수업은 끝났습니다. <시간 역행>을 각성시키는 일은 지금 당장은 포기하세요.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니, 갑자기 뜬금없이 뭔 소리야? 당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날 죽이려고 했잖아? 근데 왜…….”

“그자가 오고 있어요.”

제퍼슨 브리즈가 말했다.

긴장한 듯 숨을 헐떡이면서.

“경솔했습니다. <역행>을 타고 온 흐름이 역으로 탐지될 가능성을 배제했어요. 아니, 아예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죠. 이 시점에 날아온 이상 그자의 존재를 최우선적으로 주의했어야 했는데…….”

“‘그자’라니.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건데?”

내가 묻자, 그는 나를 보았다.

어쩐지 원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당신의 원류.”

그 차가운 시선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꾸물거릴 시간 없습니다. 바로 시작하죠.”

“…….”

“숨을 참고 마나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역전 술식 발동에 술사 외의 마력이 개입됐다간 잘못된 시간선으로 전송될 우려가 있습니다.”

일단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적어도 지금의 그는 내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제, 전송을…….”

술식 발동을 시키기 위해 마력을 모으던 제퍼슨 브리즈가, 돌연 무언가를 감지한 듯 흠칫 놀랐다.

“젠장, 벌써.”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서둘러 술식을 펼쳤다. 어떻게든 늦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

….

그리고 그즈음부터.

나에게도 느껴졌다.

뒷목에 내려앉은 싸늘한 냉기.

피부를 옥죄여 오는 진득한 살기.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봐, 제ㅍ…….”

위험을 감지하고서 경고하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늦을 수밖에 없었다.

투우우웅―.

시야가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리더니.

공포심이 허파 깊숙한 곳을 찔러 왔다.

골목의 저만치 앞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뚜벅. 뚜벅―.

푸른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 하늘 아래.

나지막한 발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존재는,

검은 후드를 눌러 쓴 괴한이었다.

두근―.

심장이 떨린다. 가쁘게. 또 가파르게.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제퍼슨 브리즈는 <시간 역행>을 되돌리기 위해, 역전 술식으로 만들어낸 시공 마법을 펼쳤다.

하지만 늦었다.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검은 구체가 있었다.

공간 그 자체가 지워진 흔적.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

제퍼슨의 마법이 발동되기 전에,

검게 물든 죽음이 우리를 덮쳤다.

***

“형님, 형님!”

제퍼슨 브리즈는 눈을 떴다.

어두운 골목의 한가운데, 쓰러진 자신의 몸을 흔들며 울고 있는 동생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체스터? 네가 왜 여기에…….”

“그, 그게, 죄, 죄송해요. 형님이랑 보, 보스가 걱정돼서, 다시 <역행>을 써서 따라왔어요…….”

제퍼슨은 일어서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자 역시 없었다. 골목에 있는 건 자신과 체스터뿐이었다.

“저어, 근데, 형님? 보스, 아니, 유진 씨는 어디 있죠? 둘이 같이 있는 것 아니었어요……?”

유진이 여기 없다는 것은 전송에 성공했다는 뜻.

다행히 늦지 않게 돌려보낼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 친구는, 원래 시간선에 보냈…….”

순간.

그는 깨달았다.

“……어……?”

그자도 여기에 없다.

유진과 같이 사라졌다.

그건, 즉…….

“혀, 형님? 왜 그러세요? 어디 아파요?”

제퍼슨 브리즈의 두 눈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기겁했다.

오랜만에 동생과 얼굴을 마주한 기쁨보다도, 진한 두려움의 기억만이 감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8년 전의 기억.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겨우 얻을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죽음. 잊을 수 없는 절망의 결말.

“…….”

제퍼슨 브리즈는 깨달았다.

뒤늦게도. 깨닫고 만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그때 그 악몽스러웠던 과거를,

미래로 보내 버리고 말았음을―.

***

눈을 떴을 때.

내 옆에는 그자가 있었다.

새까만 후드를 눌러 쓴 소녀.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

“너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메리와 똑 닮은 얼굴.

“누구야……?”

소녀는 가만히 있었다.

아련한 무표정을 짓고서.

“이가인.”

그러고는 말했다.

스며드는 목소리로.

“다들 암귀闇鬼라고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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