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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160화 (160/201)

160화. November Rain (1)

“……여동생……?”

어쩐지 그리운 울림이었다.

나는 생전 처음 듣는 단어인 것처럼 그 말을 읊조렸다.

여동생. 그런 게 나한테 있었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있었다고 한다면 아주 오래전의 얘기일 것이다.

눈앞의 소녀는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소름 끼칠 정도로 메리와 똑같은 생김새. 언젠가 몇 번이고 꿈에서 보았던 얼굴. 무의식 속의 소녀.

……’이가인’이라는 이름을.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이번이 끝이 아니야.”

소녀가 입을 열었다.

“다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 거야.”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나에게 말했다.

“가짜인 채로 만족하며 삶을 영위할지.”

“진짜가 되기를 탐내다 죽음에 이를지.”

그 목소리를 끝으로,

소녀의 모습은 사라졌고.

“너는 과연 어느 쪽을 고를까?”

그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떠올라 하늘을 덮었다.

슬픔을 못 이겨 하루가 멈췄다.

상실의 잔향마저 빗소리에 파묻혀.

라벤더 향기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

시간이 꽤 흘렀다.

변한 건 별로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점심부터 저녁까지 일을 하다, 밤 늦게가 돼서야 집에 돌아온다.

눈을 감으면 꿈을 꾼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허나 눈을 뜨는 순간 빌어먹을 현실감이 밀려온다. 깨어날 수조차 없는 이 악몽은 너무나도 생생하다.

“제기랄.”

투두둑―.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11월의 어스테이트는 장마철이다. 정체전선의 영향으로 이 시기에는 유난히 호우가 잦은 편이다.

그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직도 그칠 것 같지가 않았다.

찌뿌둥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집을 나섰다.

출구로 나가는 대신 먼저 210호로 향했다. 방문을 똑똑 두드린 뒤, 조심스럽게 열어젖혔다.

끼익―.

방 안에는 스칼렛과 시안이 있었다. 남겨진 그녀의 아이들. 이른 시간인지라 아직 자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

나는 아이들이 자는 동안에 내팽개친 이불을 제대로 고쳐 덮어준 다음, 식탁 위에다 100달러 지폐 한 장을 올려다 놓고, 그대로 곧장 방에서 나왔다.

참견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었다.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뿐이었다.

“젠장.”

갈 곳 없는 욕지거리만을 거기 둔 채,

비는 잔혹하게도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요즘 휴가를 하나도 안 쓰더군, 자네.”

오전 11시 30분.

근무 도중 사장님의 호출로 사장실에 불려 왔다. 오늘은 드물게도 그가 아침부터 내내 회사에 붙어있었으니, 여러모로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연말까진 다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연차수당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하인즈 사장은 뭔가 표정이 엄해 보였다.

어떤 식으로 돌려 말할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마 지금 나를 호출한 이유와 관련이 있을 테지.

“리타 양한테 들었네. 자네, 몇 주 전부터 계속 쉬는 날 없이 매일 회사에 나오고 있다면서.”

“일이 많이 밀려서요.”

“거의 한 달 가까이, 그것도 주말까지 몽땅 다 반납해 갈 정도는 아니라고 알고 있네만.”

“제 일머리가 나쁜 탓입니다.”

“정 일이 너무 많아 곤란하면 인력 보충을 더 하면 될 것 아닌가. 내가 권한도 다 줬을 텐데.”

“회사 사정이 어렵잖습니까. 저 혼자 조금 무리해서 해결될 문제라면 그냥 무리하는 편이 낫죠.”

따박따박 대드는 것이 못마땅해서였을까.

하인즈 사장의 눈빛에 진한 근심이 어렸다.

“유진 군. 혹시 무슨 일 있었나?”

그 시선이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

개인적으론 조금 불쾌하게 느껴졌다.

“지금 자네를 보면 꼭 입사 초기 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야. 그때도 자네는 이랬거든. 겉으론 무미건조하고, 속으론 알맹이가 텅 빈 모습이었지.”

“…….”

“위태로워 보인다는 말일세. 앞만 보고 걷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바닥을 보고 걷고 있지 않나.”

나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있었다.

하인즈 사장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자네, 내일부터 회사 나오지 말게.”

그러고서 냅다 던진 말은,

꽤나 충격적인 한마디였다.

“……예?”

“못 들었나? 회사 나오지 말라고.”

“……짜, 짤린 건가요, 저?”

“자네는 도대체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뭘로 들은 겐가? 당분간 일 좀 그만하고 집에서 쉬란 얘기잖아! 무슨 말인지 몰라? 휴가라고, 휴가!”

“……하지만 저, 지난달에 입원해 있는 동안 벌써 일주일 넘게 쉬었는데요.”

“그거는 다쳐서 그런 거잖나. 아파서 끙끙대면서 노는 거랑 그냥 무지성으로 머리 비우고 노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 내가 맨날 해봐서 알지.”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깐 정도는 전부 내려놓고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걸세.”

순간 벙쪄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튼 이건 사장으로서 명령이니까. 토 달 생각은 하지도 말게. 알아듣겠나, 유진 군?”

“……예에. 알겠습니다.”

하인즈 사장 나름의 배려일까. 차라리 이렇게나마 가야 할 방향을 정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좋아. 지금 당장 퇴근하게.”

“그, 저기, 오늘까지 무조건 끝내야 하는 일이 있어서, 그것만 마치고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흠. 무어, 그래. 그렇게 하게나.”

적어도 오늘 하루는 회사에 붙어있으려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서, 나는 사장실 밖으로 나왔다.

“아, 팀장님.”

그즈음, 저편의 책상에 앉아있던 스몰필드 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스르륵 일어나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시죠.”

“저어, 방금 밤비타운 채석장에서 마석 발주 건 때문에 연락이 왔는데요. 아무래도 물량 확보가 어려울 것 같다고, 기간을 조금만 늦춰달라는…….”

“그쪽 사정 봐줄 필요 없습니다. 기존 일정 유지하고, 위약 사안은 계약서대로 처리할 거라 통보하세요.”

“아, 네…….”

“점심시간이네요. 식사하고 오세요.”

내가 시계를 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자, 스몰필드 씨는 잠시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저기, 팀장님은, 식사 안 하세요……?”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표정.

나는 그녀의 속마음을 알았다. 그녀 역시 내가 거리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 알아채겠지.

하지만―

“전 괜찮습니다.”

“…….”

“신경 쓰지 마세요.”

더는 내게 다가오지 말라고,

상냥한 말로써 벽을 세웠다.

사장님은 좋은 분이다.

스몰필드 씨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몇 걸음 물러서야만 한다.

토마에게, 그리고 메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이 끝이 아니야.”

나는 언젠가 또다시―

그들을 죽이고 말 테니까.

“너는 과연 어느 쪽을 고를까?”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

소중한 사람이 생겨서는 안 된다.

원래부터 품고 있었던 감정마저 불현듯 투명하게 퇴색되어 버릴 정도로, 인연이란 게 두려워졌다.

그리고 나는 어느샌가 내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그 모든 것들을 저만치로 밀어내야만 했고.

살아가는 의미조차,

점차 흐릿해져 갔다.

***

늦은 저녁.

홀로 남은 사무실.

“후우.”

나는 정신없이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다, 문득 멈칫하고는 숨을 크게 한 번에 몰아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본래 하고 있던 업무에 집중했다.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잡생각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게 최근에 내가 일부러 기를 쓰고서라도 아침부터 밤까지 회사에 내내 붙어있었던 이유다.

다만, 사장님께서 하달하신 특별 휴가 명령.

내일부터는 회사에 나오지 못한다. 때문에 나는 오늘 밤을 새울 기세로 일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뭐, 하인즈 사장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멈춰 줘야 할 타이밍이었을지도.

서류를 작성하고, 연락을 돌리고, 보고서를 체크했다.

딱히 급한 일은 없었음에도 급한 척을 하며 일을 했다.

쉬는 날도 없이 며칠간 이어진 야근과 잔업.

그동안에 누적된 피로가 몸을 짓눌러, 그만 깜빡 졸아 버리고 만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쓰러지듯 책상에 엎드려,

기절하듯 잠이 들었을 찰나.

….

….

향긋한 냄새가 났다.

믹스커피의 익숙한 내음.

눈을 뜨고서 고개를 들었다.

책상 안쪽 구석, 혹시나 실수로 엎지르지 않을 위치에 다소곳이 놓인 머그잔이 눈에 들어왔다.

자주 보았던 풍경이다.

야근하던 중에 나를 위해 커피를 타서 가져다주던 사람은, 주로 스몰필드 씨.

그리고―

「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우리 사무실의 고물 깡통 로봇.

아니, 이제는 깡통에서 벗어난 녀석.

“……타이퍼?”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았다.

단정한 금발에 반짝거리는 핑크색 안구, 클래식한 메이드복 차림의 미녀 로봇이 거기에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위화감 하나 없는 깔끔한 톤의 목소리.

무표정하지만 인간미가 돋보이는 얼굴.

“……타이퍼, 맞지?”

첫 대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퍼 녀석의 화려한 변신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접니다. 주인님. 타이퍼입니다. 기체 모델은 프로젝트 이브 알파 타입 EVE-003TH로 이전하였지만, 시스템 기반 OS는 틀림없는 고전파 프로토타입 자가지능성장형운영체제 TYPE-R이 맞습니다.」

“……어. 그래.”

「<슐츠텍>에서의 연구 참여를 마치고 오늘 <윌슨앤코>로 복귀하였습니다. 탁송은 야간에 이루어질 것이라 미리 고지하였습니다만. 이 시간까지 주인님께서 사무실에 남아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2시 18분. 확실히 늦은 시간이긴 했다. 설마 다섯 시간 넘게 잠들어 있었던 건가.

“미안. 너 온 줄도 모르고 있었네.”

「일거리가 많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괜찮아. 거의 다 끝냈으니까.”

「그렇습니까.」

타이퍼는 주위를 슥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안 계시는 겁니까.」

‘어머니’란 단어에, 나는 괜히 움찔했다.

“……스몰필드 씨 말이지. 한참 전에 퇴근했어.”

그때.

왜인지 녀석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

마치 토마스 기차를 닮았던 그 시절의 깡통 로봇 타이퍼가 연상될 정도로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주인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게다가 그런 질문까지 던져 왔다.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잘못 짚었다면 죄송합니다. 허나 감정 모듈 센서의 판단에 따르면, 주인님께서 현재 짓고 계신 표정에 약 89%의 ‘우울함’이 관찰되고 있습니다.」

“……너 이젠 그런 것도 알 수 있냐.”

「혹시라도 만약에 누군가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있으시다면 제게 털어놓아 주십시오.」

“……없어, 그런 거.”

「저를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실제로 통계에 의하면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들은 사람보다도 안드로이드에게 상담받는 것을 선호하였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 있어 널리 퍼져 있는 타인에 대한 불신감과 더불어 로봇 원칙에 기반한 안드로이드에 대한 신뢰성이 동시 작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고민이고 뭐고, 나한텐 좆도 없으니까 그만하라고.”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욕설을 뱉고 나서야 뒤늦게 그러지 말 걸 하고 생각했다. 나는 항상 이렇다. 저지르고 나서 후회한다.

….

….

다소의 침묵이 흐른 뒤.

타이퍼가 재차 입을 열었다.

「주인님.」

“왜.”

「한 가지 정정해 드리자면, 주인님께서는 현재 신체에 남근을 지니고 계십니다. 제 안구 카메라에 내장된 온도 감지 센서가 그것을 포착했습니다.」

“…….”

「기어오른 점은 죄송합니다. 주인님께서 힘들어하시는 부분에 있어 제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숱한 업그레이드를 거쳤음에도, 저는 아직 사람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부족함을 느낍니다.」

로봇 녀석은 말했다.

무표정과 무심한 말투 그대로.

「혹시.」

「소중한 존재를 잃으신 겁니까.」

심장의 깊숙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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