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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94화 (94/201)

94화. The Masterplan (2)

사우스아치 14구역 제4공단.

한태경은 후미진 도로변의 경찰차에 홀로 틀어박혀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아, 따분해 죽겠네.”

그녀는 이 야근이 도무지 맘에 들지 않았다.

오랜만의 현장 출동이라 해서 잔뜩 들떴건만, 막상 와 보니 자기 역할은 2선도 아닌 3선 대기.

“이럴 거면 장비 지급은 왜 한 거야…….”

전투복 풀세트를 갖춰 입으면 뭐 하나. 전투는커녕 말싸움할 양아치 하나 주변에 뵈지를 않는데.

하여간 임무다운 임무는 죽어도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할 만한 경찰다운 일이라곤 잠복근무 클리셰마냥 단팥빵을 씹어 먹는 것뿐이었다.

꽉 막힌 속을 뚫어내고자,

커피 우유를 쭉 들이켠 무렵.

「고, 공격받는 중!」

「지원 바란다, 여, 여기!」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공용 작전 채널에서,

대뜸 무전이 들려왔다.

「이쪽은 2팀!」

「키웰에 추가 습격 발생으로 교전 중이다!」

「여기 3공단에도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적들은 까만 마스크를 쓴 무리이며, 전원 무장 상태!」

갑작스럽게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무전들.

아무래도 꽤나 긴급한 사태가 벌어진 듯했다.

“뭐, 뭐야?”

한태경은 당황했다.

허나 그러고 있을 틈도 없었다. 어찌 됐건 일이 터졌으니, 매뉴얼대로 움직여야 했다.

「어이!」

「한태경이!」

그때.

아서 깁슨에게서 개별 무전이 들어왔다.

“에, 경위님?”

「너 지금 위치에 있지?」

“아, 네. 지금 3팀 쪽으로 지원 가려고…….”

「거긴 가지 마. 너는 따로 움직여.」

“예에? 그럼 어디로 가라고요?”

「15구역 경찰국 데이터센터.」

“데, 데이터센터요?”

「창고 습격은 미끼야. 일부러 경찰 병력을 분산시킨 뒤에 거기로 쳐들어가는 게 놈들의 진짜 노림수지.」

경찰국 데이터센터는 열화상 카메라와 레이저 감지기 등 우수한 경계 설비가 갖춰져 있지만, 침입 대응에 있어서는 주변 경찰서에 크게 의존한다.

사우스아치와 웨스트록의 경찰 인력들이 모조리 이번 작전 계획에 투입되어 있는 지금, 데이터센터의 보안은 텅 비어 있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데이터센터 내부에 침입해서 해킹을 시도하면 말 그대로 끝장이야. 범죄 기록이고 뭐고 다 사라질 수도 있다고. 지금 데이터센터 주변에 있는 우리 쪽 인원은 너밖에 없어. 당장 그리로 이동해. 경로는 순찰차 내비에 즐겨찾기가 되어 있을 거야.」

“아니, 잠깐만요. 이거 정식 작전 계획 맞아요? 본부에 연락은 한 거예요?”

「했겠냐? 좆같은 절차 밟을 시간이 어디 있어. 이 지랄 하는 것도 너랑 나 말곤 아무도 몰라.」

“…….”

「책임은 내가 진다. 움직여, 빨리!」

한태경은 느지막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오늘 그녀가 쉰 마지막 한숨이었다.

부아앙―!

경찰차가 야밤의 도로를 질주했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출발한 지 정확히 10분 만에 그곳에 도착했다.

데이터센터 건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늦은 밤의 음산한 거리는 지나다니는 차 한 대도 없이 그저 미지근한 밤바람만 불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 조용한데…….”

살짝궁 의심이 드는 와중에도,

한태경은 차분히 맘을 다스렸다.

형사로서 아서 깁슨의 감은 믿을 수 있다.

그간 옆에서 지켜봐 온 것도 있고, 뭣보다 경찰국 본부 최고의 베테랑 중 한 명 아니던가.

“경위님. 센터 도착했습니다.”

「뭔가 보이나?」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데요. 건물도 멀쩡해요.”

「일단은 주변 상황 체크한 다음 안전한 데서 계속 지켜봐.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튀고.」

“옙.”

그녀는 차에서 나가기 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보호용 헬멧을 뒤집어쓰고서 총을 챙겼다.

하인라인 MP7. 전투 요원에게 지급되는 경찰 제식 기관단총. 참 오랜만에도 만져보는 총이었다.

“발포 허가는 나 있었지…….”

이번 작전은 교전 상황 발생 시 현장 전투원의 판단하에 비교적 자유롭게 총기 사용이 가능했다.

한태경은 사격술에 별로 자신이 없었다.

물론 경찰학교에서 지겹게 훈련을 받긴 했지만, 애당초 그녀는 총을 쓸 필요가 없는 마법사였다.

다만 한태경은 현재 파워 레벨 2 이상의 마법을 사용해서는 안 됐다. 과거에 벌였던 몇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받게 된 무기한 징계였다.

엄청나게 긴급한 경우엔 본부에 사용 허가를 요청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아서 깁슨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참으로 ‘좆같은 절차’였다.

어쨌거나―

더는 심심할 여지도 없었다.

한태경은 차에서 나와 데이터센터로 향했다.

조용했다. 주변 거리에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응?”

입구 쪽 CCTV에 불빛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가만 보니 보안문도 이상했다. 카드키 리더기와 비밀번호 입력장치 전부 다 먹통이었다.

“……설마……?”

한태경은 닫힌 철문을 손으로 밀어보았다.

그러자, 문은 아주 간단하게도 스르륵 열렸다.

“미친.”

한태경은 급하게 무전을 쳤다.

“제기랄, 한발 늦은 것 같아요. 건물 보안 시스템이 죄다 망가져 있어요.”

「…….」

“저기요? 경위님? 제 말 들려요?”

응답이 없었다.

망할 고물 무전기 같으니. 채널 주파수를 다시 맞춰보고 별짓을 다 해도 그대로였다.

한태경은 열린 문 너머로 건물 내부를 살폈다.

완전한 암흑. 조명 설비도 맛이 간 모양이었다.

벌써 털린 건가?

안에 들어가서 확인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어서 손전등을 차에 두고 온 걸 알아챘다.

그녀는 우선 돌아서서 시설 밖으로 나왔다.

건너편 갓길에 주차해 둔 차로 향하려던 그때.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 누군가와 마주쳤다.

검은 가면을 쓴 남자였다.

“……어……?”

한태경은 움찔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검은 가면의 정체를.

―카이트.

다시 돌아온 마법사들의 악몽.

암귀라 불린 미치광이 흑마법사.

……왜 여기에 있지?

……이 녀석이 흑막이었나?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교차했다.

허나 곧바로 아까 들었던 무전들의 내용이 떠올렸다. 창고를 지키고 있는 다른 지역의 경찰들 역시 ‘검은 가면을 쓴 남자’를 목격했다고 말했다.

눈앞에 있는 놈은 카이트가 아니다.

단지 가면을 쓰고 흉내 낼 뿐인, 가짜.

“손 들어.”

철컥―.

한태경은 기관단총을 들어 남자를 겨냥했다.

100일 남은 할로윈을 대비해 코스프레를 한 게 아니라면, 놈은 창고를 습격한 녀석들의 동료일 터.

놈은 손에 너클을 끼고 있었다.

근접 타입. 이 거리라면 문제없지.

“양손 머리에 올리고, 바닥에 엎드려.”

가면을 쓴 남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한태경은 놈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하기에 앞서, 발포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남자가 사라졌다.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코앞에 있었다.

“……?!”

눈치채기도 전에,

놈이 주먹을 뻗었다.

슈우욱, 파삭―!

헬멧 옆구리를 스친 너클.

이음새 부분이 뜯겨져 나갔다.

다행히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여 정타를 피할 수 있었다.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그 한방으로 끝장이 났을 터였다.

한태경은 주먹을 피함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겨 총을 마구 발사했다.

투두두두두―!!

그러나 한 발도 맞히지 못했다.

쏜살같이 조준선 밖으로 몸을 슥 움직여 피한 남자가, 이어서 그녀의 손과 총기 몸체로 빠르게 펀치를 날려, 그 충격에 총을 놓치고 말았다.

“큭?!”

그리고 연타. 연타. 연타.

수도 없이 쏟아지는 연격.

‘젠장, 이 새끼 졸라 쎄잖아!’

한태경은 나름대로 격투술에 제법 자신이 있었지만, 상대는 주먹싸움에 있어 완전히 격이 달랐다.

반격을 노리기는커녕 방어하는 것만도 벅찼다. 중간부터는 아예 주먹이 보이지도 않았다.

‘마법을 쓸 수밖에 없어.’

파워 레벨 2를 넘는 마법은 사용 불가.

그녀는 호흡을 모아, 체내의 마력을 주먹 끝에 온전히 담았다.

‘일단은 이거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파워 레벨 1의 초급 마법.

<강화>

파아아아앙―!

한태경이 주먹을 휘두르자,

강한 충격파와 굉음이 터졌다.

가면을 쓴 남자의 몸은 그 충격파에 직격당한 반동으로 몇 발짝가량 뒤로 날아가 휘청였다.

그녀의 주먹이 지나간 자리에는 적색 마력의 불꽃이 넘실댔다. 출력에 비해 상당한 위력이었다.

“후우.”

오랜만에 맛본 마나 방출의 감각.

자제해서 쏜 것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이 정도 출력만으로 저놈을 이기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아 보였다.

다양한 마법을 다루는 것보다 위력에 올인하는 파이어볼러Fireballer 스타일인 한태경의 입장에서, 마나 출력을 제한한다는 건 너무나 큰 페널티였다.

그녀는 상대가 물러선 틈을 타 서둘러 무전을 날렸다.

“본부? 들립니까?”

「듣고 있다. 무슨 일인가?」

“여기는 한태경. 진짜 리얼 긴급 사태 발생. 파워 레벨 2 이상의 마법 사용 허가를 요청한다.”

「현재 위치가 어떻게 되는가?」

“14구역. 경찰국 데이터센터 앞이다.”

「귀관은 현재 작전 지역을 벗어났다.」

“알고 있다.”

「작전 지역 외에서의 개별 행동으로 인한 긴급 요청에 대해서는 허가할 수 없다.」

“아, 쫌.”

「대신 지원을 보내겠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예상 소요 시간은…… 38분.」

“아주 장례차도 함께 보내라. 오버.”

한태경은 무전을 끊고,

다시 싸울 태세를 갖췄다.

“쯧.”

걸리적거리는 헬멧을 벗어 버릴까도 싶었지만, 혹여나 저놈의 주먹에 얼굴을 잘못 맞기라도 했다간 평생 결혼은 꿈도 못 꿀 테니 그대로 두었다.

그런 한태경의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가면을 휙 벗어 던졌다.

드러난 얼굴은 꽤 잘생긴 청년이었다.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에 남성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무뚝뚝한 인상의 혼혈 백인.

슬슬 진심으로 해볼 셈인가.

바라던 바다. 이쪽도 아직 전력이 아니거든.

둘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됐다.

이글이글 부풀어 오른 투지가, 마침내 서로의 영역에 부딪히기 직전.

뚜벅―.

갑자기 발소리가 들렸다.

데이터센터 입구 쪽이었다.

“……?”

한태경은 그쪽을 돌아보았다.

누군가 건물에서 밖으로 나왔다.

곧 그 녀석과 마주쳤다.

검은 가면을 쓴 남자였다.

“……또 있다고……?”

한태경은 당황했다.

이건 좀 낭패인데. 만약 저 녀석이 지금 싸운 놈과 동급이라면, 2:1에서 이긴다는 확신이 없다.

가면 쓴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백인 남자 옆에 섰다. 어쩐지 상당히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끝나셨습니까?”

“어. 뭐 하고 있었냐?”

“경찰을 만나 대치 중이었습니다.”

비로소 가면 쓴 남자가 한태경을 보았다.

그녀는 계속 긴장을 유지한 채로 있었다.

“이봐, 형씨.”

그가 입을 열었다.

“다 끝났어. 이제 가도 돼.”

….

….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

“부탁이니까 그냥 가주라.”

가면 쓴 남자가 말했다.

“당신을 죽이긴 싫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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