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Time to Move On (2)
오전 10시.
SCPD 중앙본부 취조실.
“……밤 12시경, 모텔 관리인 페넬로페 베인스와 함께 귀가하던 중, 메인 요크 로드 거리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페넬로페 베인스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나서 괴한과 한바탕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폭탄이 터졌다. 그때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기억은 없었다…….”
형사는 눈앞에서 조사서를 읽어 내렸다.
“폭발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것치고는 앞뒤 스토리가 상당히 정갈하군.”
“원래는 뒤죽박죽이었는데, 다른 증언을 토대로 조사관 분께서 얼추 정리를 해주신 겁니다.”
“다른 증언이라면… 같이 있었던 페넬로페 베인스의 증언 말이지.”
그는 책상에 놓인 서류뭉치들 사이에서 미리 준비한 것처럼 종이 한 장을 슥 골라 꺼냈다.
“양쪽 증언을 비교해 보면 전후 상황은 거의 다 일치해. 거짓으로 보이는 부분은 없지. 다만 자네는 괴한의 생김새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녀는 기억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것도 아주 세세하게.”
“…….”
“목격 증언에 따르면 괴한은 키가 2미터 정도에 덩치가 대따 큰 백인 남자.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스킨헤드에 검정색 가죽 코트를 입고 있었다고 해.”
“…….”
“우연찮게도, 내가 아는 어떤 유명한 개자식이랑 외견이 정확히 일치하더군.”
형사는 책상 위에 사진 하나를 던지듯 올렸다.
“이 자의 이름은 이반 레오노프. 테러리스트 단체 <블랙 대거즈>의 청부살인업자 겸 행동대장이지. 자네가 만난 괴한은 바로 이 녀석이야.”
“…….”
“레오노프는 경찰 쪽에서도 주시 중인 AA급 수배자인데, 두 달 전부터 행적이 묘연했어. 그런 와중에 자네가 놈을 목격했고, 이후에 또다시 자취를 감췄지. 우린 놈이 죽었다고 보고 있어.”
그는 다른 사진을 꺼냈다.
“이놈은 <홍룡파>의 보스 토니 웡. 마찬가지로 몇 주 전부터 실종 상태야. 아마 죽었겠지.”
“…….”
“레오노프와 토니 웡을 처치한 범인은 같은 놈이다. 그럴 거라 확신 가능한 증거도 있지.”
나는 침묵했다.
“범인은 뒷세계에서 ‘카이트’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다니는 용병. 풍문에 의하면, 자색 마법을 구사하는 흑마법사…… ‘암귀’라고 불린다더군.”
형사는 눈을 부라렸다.
“자네는 레오노프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인물이지.”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레오노프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범인은, 자색 마력을 가진 흑마법사. 암귀 카이트.”
게슴츠레 뜬 그의 시선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쏘아져 내 안구를 꿰뚫어 버릴 듯했다.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지 않나, 유진 연?”
찰나간.
머릿속에서 무수한 사고들이 난무했다.
……경찰이 알아챘다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설마 진짜로 다 들킨 건가?
생각. 생각. 생각.
생각들을 휘몰아치듯이 갈겨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올바른 판단만은 도저히 내릴 수 없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극단적인 수단도 불사해야 할지 모른다는 냉철한 오판에까지 이르렀을 무렵,
지그시 나를 보며,
형사가 입을 열었다.
“쫄지 마. 자네는 범인 아닌 거 알아.”
….
….
얼라리?
당황과 황당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그가 안심하라며 던진 그 말에 오히려 신경이 곤두섰다.
“형무소 검사 기록에 자네는 마나 미발현자로 등록돼 있더군. 그니까 자넨 범인이 될 수 없단 소리지. 범인은 흑마법사니까.”
“…….”
“하지만 자넨 분명 그 카이트란 놈을 봤을 거야. 레오노프를 죽인 그놈이 자네가 있던 그 현장에 같이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자네는 기억이 없다고 말했어.”
형사는 두꺼운 PDA를 꺼내 책상에 올렸다.
“이건……?”
“놈의 얼굴이 찍힌 CCTV 영상일세.”
나는 PDA에 재생된 화면을 보았다.
대학의 복도 같은 공간. 강의실에서 나오는 노교수, 스테파노 멜리에스와 경호원들이 보인다.
한 젊은 남자가 멜리에스에게 달려온다. 무언가 대화를 주고받더니, 어딘가로 함께 이동한다.
“자네도 뉴스는 봤겠지. 지난주에 벌어진 스테파노 멜리에스 실종 사건. 역시나 앞서 말한 레오노프와 토니 웡의 경우와 흡사해. 정황상 세 사람은 모두 같은 범인에게 당한 거야.”
“그럼, 영상에 나온 이 남자가……?”
“카이트라 추정되는 인물이지. ‘유클리드’란 이름으로 가짜 학생증을 만들어 몰래 침입했더군.”
……휴우. 십년감수했다.
경찰 측에서 파악한 단서로는 다행히 ‘카이트’의 진짜 정체에까진 도달하지 못한 듯했다.
그나마 CCTV에 남은 증거도 비너스가 마법으로 만들어준 가짜 얼굴. 나라는 건 들키지 않았다.
“아무튼 이 얼굴,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 예를 들면, 괴한과 만났던 현장에 같이 있었다든가.”
형사가 물었다.
나는 말하기 전에 잠시 뜸을 들였다.
“아니요. 모르는 얼굴입니다. 다만…….”
“다만?”
“사실은, 그때 현장에…… 그 스킨헤드 괴한 말고도,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내 말에 형사는 솔깃한 듯 반응했다.
“자세히 얘기해 보게.”
“가면을 쓴 남자였습니다. 제가 괴한에게 죽을 뻔한 순간에, 갑자기 그가 나타나서 저를 구해줬습니다. 아니, 구해준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정신을 차리고 나니 괴한은 사라져 있었습니다.”
“혹시 그놈이 마법을 쓰던가?”
“예.”
“마나는 무슨 색이었지?”
“아마, 보라색이었던 것 같아요.”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블러핑을 걸기에 상대는 꽤 감이 좋아 보였다.
“왜 놈을 목격한 사실을 숨겼지?”
“그게, 경찰한테 자길 봤다 말하면 찾아내 죽이겠다고 협박을 당해 버려서…… 죄송합니다…….”
진실 속에 거짓을 섞어 교묘히 위장한다.
완전무결한 개연성까지는 필요 없다. 어차피 지금 나는 거짓말할 이유가 없고, 상대도 그걸 알고 있다.
“흠.”
형사의 눈이 5초간 나를 스캔했다.
“상황이 그랬다면야. 어쩔 수도 없었겠군.”
나는 의외로 연기력이 좋은가 보다.
“딱히 큰일 나진 않을 테니 걱정은 하지 말게. 그래도 일단 우리 쪽에서 보호 조치는…… 아니지. 너무 호들갑 떨면 자네가 켕기는 짓을 했다는 게 그놈한테 들통날지도 모르니까. 대충 기간 잡아서 정기 연락 정도만 하도록 할까. 뭐, 괜찮겠지?”
“아,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 뺏어서 미안하군. 나가면서 명함 받아 가게. 뭔 일 있을 것 같으면 연락하고.”
형사는 너그러운 말투로 나를 배웅했다.
그렇게 나는 무사히 경찰서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후우.”
바깥에 나오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취조받는 내내 살 떨려서 미치는 줄 알았다. 수능 결과 확인할 때보다도 조마조마했다.
일단 한시름 놓긴 했지만, ‘유진 연’에 대한 경찰의 의심이 전부 걷혔다고 생각하는 건 위험할지도 모른다. 당분간 눈에 띄는 짓은 자제해야 할지도.
어쨌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휴대전화에는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대부분은 거래처 등지에서 온 전화였다. 다행히도 못 받아서 큰일 날 만한 전화는 없는 듯했다.
헌데.
개중에 눈에 띈 번호가 있었다.
“음?”
10분 전쯤에 걸려온 전화.
연락처에 저장된 이름은, ‘알랭 그루너’.
“<슐츠텍>이잖아?”
어스테이트 굴지의 군수기업.
이전에 6,000만 달러짜리 무기 거래를 성사했던 슐츠의 담당자에게서, 느닷없이 전화가 와 있었다.
따로 연락할 만한 사항은 없을 텐데.
보통 이런 건 나쁜 소식일 때가 많지.
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속으로 안고서,
알랭 그루너의 번호로 연결을 시도했다.
뚜르르, 달칵―.
그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아, 그루너 씨? 윌슨앤코 유진 연입니다. 전화 주셨길래…… 네네, 지금 통화 괜찮습니다…….”
“…….”
“…….”
“……예?”
“……만나서 얘기하자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가벼운 화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
오전 10시 22분.
아서 깁슨은 서류를 챙겨 취조실 밖으로 나왔다.
“헤이. 아서 아찌.”
그리고 그때,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깜짝이야, 너였냐?”
지원팀의 한태경이었다.
그녀는 방금 전 뱉은 깜찍한 대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무표정을 지어 보였다.
“뭘 놀라고 그러세요.”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그따위로 부르니까 놀라지, 인마. 아서 아찌가 뭐야, 아서 아찌가.”
“언제는 제가 경위님 보고 맨날 그렇게 불렀다면서요? 이 양반은 노잼 드립에 맞춰 줘도 이러네.”
“소름 끼치니까 다신 그렇게 부르지 마. 거 나이도 먹을 대로 먹어 놓고 뭐 하자는 짓거리야.”
“됐고, 그 새끼가 뭐래요?”
“그 새끼?”
“유진 연이요. 취조하셨잖아요.”
“아.”
“뭔가 알아냈어요?”
“별로.”
아서 깁슨은 사건 파일을 한태경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대강 살폈다.
“허, 이것 봐. 역시 기억 안 난다고 거짓말 쳤었던 거네. 얘 이거 위증죄로 못 잡아 가둬요?”
“되겠냐. 법정에서나 구라 까야 위증죄지.”
“증언에 뭐 다른 수상한 점은 더 없었고요?”
“전혀. 내가 보기에 그놈은 뭐랄까, 수상하고 안 수상하고를 떠나서, 애초에 범죄자의 인상이 아니었어. 무단횡단도 안 할 놈이야.”
“죄송한데 경위님. 걔 A급 전과자예요, 변호사 잘 만나서 8년만 살고 나온 거지, 혐의 내용만 보면 20년형은 받았어도 할 말 없었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네가 전에 고놈이 자기 여동생을 죽였다느니 어쨌다느니 했잖아? 근데 자료 보니까 살인 혐의는 없던데, 그건 뭣 땜시 나온 소리냐?”
“아, 그거요.”
한태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지가 지 입으로 실토한 거예요. 마침 유진 연이 체포됐을 무렵에 그 새끼 동생이 실종됐었거든요. 다른 증거는 없어서 혐의없음으로 종결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본인이 그렇게 말했는걸요. 자기가 자기 여동생을 죽였다고.”
“호적에 친족은 아버지뿐이던데?”
“부친이랑 사실혼 관계인 모친이 있었다나 봐요. 모친 쪽에 유진 연보다 다섯 살 아래인 딸이 있어서, 대충 이복동생 같은 느낌? 뭐 그런 거죠.”
그다지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쨌건, 특별히 새로운 단서는 없었어. 레오노프, 토니 웡, 멜리에스, 그 세 명이 죽은 게 전부 카이트란 놈이 저지른 일이란 걸 확신한 정도지.”
“뭐어, 셋 다 죽을 만하긴 했죠. 것보다 멜리에스까지 잡다니, 카이트 진짜 짱 센가 보네요.”
“너 어째 좋아하는 눈치다?”
“왜요. 좋아하면 안 돼요?”
“예끼, 한 경장아. 너가 그러고도 경찰이냐.”
“솔직히 좀 멋있잖아요. 뭔가 사악한 악당들을 물리치는 정의의 다크 히어로 같지 않아요?”
아서 깁슨은 덤덤하게 혀를 찼다.
“히어로 같은 소리 하네.”
그는 10년 전의 그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다.
단 하나의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아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던, ‘언디파인드’라 칭해진 미지의 괴물.
“그놈은 그냥 살인마야.”
세간에선 그를 ‘암귀’라고 불렀다.
암흑 속에 도사린 미치광이 살인귀.
“어떻게든.”
이 도시가,
다시 그 악몽을 꾸기 전에―.
“어떻게든 잡아 처넣어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