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77화 (77/201)

77화. Time to Move On (1)

야심한 밤.

텔레비전 토크 쇼.

현란하게 편집된 오프닝 영상이 띄워진다.

시에라시티의 야경 사진을 배경으로 한 스튜디오에, 방청객들의 환성과 신나는 재즈 음악이 깔린다.

“A-YO, 웰컴 백 에브리원! 홀든 맥그레이디와 함께하는 투데이 나이트 쇼! 오늘도 깔쌈하게 시작합니다!”

남부식 발음을 가진 흑인 사회자가 언제나처럼 능란하고 재치 있는 말솜씨로 쇼를 진행한다.

“자자, 다들 닥쳐요. 박수 좀 그만치고.”

“좋습니다. 말 잘 듣는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의 게스트― 캐서린 스트로베리입니다!”

사회자가 손짓하자, 밴드가 다시 연주를 시작하고, 또다시 청중들의 박수와 환성이 쏟아진다.

무대에 나타난 인물은 미모의 여성.

2미터를 훌쩍 넘는 NBA 센터급 장신, 팔다리는 모델처럼 날씬하고, 민소매 원피스로 드러난 육감적인 몸매에, 조명을 받아 번쩍이는 금발 웨이브 머리를 가진, 제시카 래빗을 연상케 하는 고혹적인 미녀.

녹색 피부의 우람한 이종족― 오크였다.

“훠우! 만나서 반가워요, 캐서린!”

“저도 반가워요, 홀든.”

“그거 알아요? 제가 살면서 지금까지 봤던 오크들 중에서, 당신이 넘버원으로 섹시해요.”

“어머, 정말요?”

“하지만 며칠 전에 만난 그 친구를 포함하면 당신은 2위로 밀려나요. 게이바에서 만났죠.”

방청객들이 웃는다. 컴퓨터 사운드로 낸 가짜 웃음소리도 약간 섞여 있다. 그것은 사회자 자신이 자조적으로 게이인 척을 함과 동시에, ‘오크 중에 게이는 없다’라는 고정관념을 활용한 유머였다.

“올라잇, 캐서린. 물론 수요일 밤에 할 짓이 드럽게 없어서 TV쇼나 보고 있는 한량들 중에 당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대충 소개는 해 보도록 할게요. 당신은 할리우드 스타 출신에, 성공한 기업가이며, 이번에 시장 후보로 나오게 됐죠?”

“맞아요.”

“여론 조사 결과 지지율이 무려…… 78.2%예요! 와우! 르브론 자유투 성공률보다도 높은데요!”

“저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시민 여러분들이 많이 계신다는 거죠. 당연한 현상이라 생각해요.”

“나머지 21.8%의 시민들에게 하실 말씀 없나요? 엿이나 까 잡숴. 라든가.”

소파에 앉은 여성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이후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꼬아 허벅지를 찰싹 붙이고는, 묵직한 장밋빛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가 일부 시민들에게 지지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들이 저를 의심하기 때문이죠. 저는 의심받는 걸 좋아해요. 그 의심이 사실은 틀렸다는 걸 증명해낸다면 기분 좋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잖아요?”

“공화당 지지층들이 특히 당신에게 불만이 많아 보이던데요. 당신이 전임 시장 그레고리 메이슨의 정책을 과도하게 비판해 왔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가 시에라시티의 치안을 강화해 안전한 도시를 이룩했다고들 하지만, 그건 눈속임에 불과해요. 도시 전체로 따지면 범죄율은 그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어요. 단지 메이슨 당선 이후로 강력 범죄 발생 지역이 노스네스트 방면에 집중됐을 뿐이죠. 범죄자들을 싸그리 그쪽에 몰아넣었기 때문이에요.”

여성은 계속 말한다.

“메이슨의 정책은 한마디로 ‘범죄와의 공존’이었어요. 쓰레기통이 쓰레기들로 꽉 찼는데 그냥 뚜껑을 닫아 놓은 거나 다름없었죠. 근본적인 해결책은 뭘까요? 그야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 아니겠어요?”

***

「제가 만들어 갈 도시는 바로 그런 도시예요. 쓰레기 하나 없는, 청결 그 자체인 도시. 악독한 범죄자들의 도시가 아닌 선량한 시민들의 도시……」

삑―.

나는 리모컨을 눌러 TV 채널을 돌렸다.

심야 뉴스. 삑. 홈쇼핑 광고. 삑. 과학 수사 드라마. 삑.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삑.

채널들을 빙빙 돌아 봤자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결국엔 아동용 애니메이션 채널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방영 중인 것은 K팝 아이돌을 꿈꾸는 마법소녀들이 네오-서울에 쳐들어오는 사악한 외계 악당들에게 맞서 싸운다는 내용의 미국 카툰 스타일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왜인지 더빙은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

마법소녀들의 합동 공격에 우주 악어 괴물의 눈알이 터져 뇌수가 질질 흘러나오는 장면을 감상하며 이게 왜 전체 이용가인지 의아해하고 있었을 무렵.

우우웅―.

침대맡 서랍 위에 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 번호는 미표시.

이쪽 전화기로 걸려오는 전화들은 대개 이랬다.

“여보세요.”

나는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유진 씨. 토마입니다.」

여리여리한 소년의 목소리.

블랙 대거즈 보스의 목소리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혹시 저 때문에 깨셨나요?」

“아니. TV 보고 있었어.”

「그래요? 어떤 걸 보고 계셨는데요?」

“매지컬 아이돌 나에리쨩.”

「아, 심야 애니 말이죠. 지금 아리엘도 그걸 보고 있어요. 매주 본방 사수할 정도로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이런 시간에 갑자기 웬 전화냐? 또 누구 암살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게?”

「하하, 아니에요. 그냥 안부 전화예요.」

“밤 12에 안부 전화라, 매너 참 짱이네.”

내가 빈정거리자, 토마는 픽 웃었다.

「멜리에스 건. 수고 많으셨어요.」

녀석이 말했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설마 일주일도 안 돼서 그를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위대하신 블랙 대거즈의 보스님께서 만족하셨다니 거참 다행이군.”

「저희는 서로 돕는 관계니까요.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 먼저 연락 주세요.」

어째 비즈니스맨이나 할 법한 말씨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유진 씨.」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서 전화를 끊었다.

뚝―.

적막이 흘렀다. 그즈음 애니메이션 속의 캐릭터들은 흑막과의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어째서인지 서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화를 길게도 이어가고 있었다.

“…….”

토마와의 협력 관계는,

아마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최근에 와서야 깨달은 사실이다.

깨닫게 된 계기는 2주 전. 빅터 반 패튼 경호 의뢰에서 ‘미스 바렛’이란 용병 저격수를 만난 것.

비너스의 말에 따르면, ‘미스 바렛’은 시에라시티에서 내로라하는 일류급의 스나이퍼라 했다.

스나이퍼로서 그녀의 실력은 확실히 출중했다. 과연 도시 최고의 저격수라 칭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게임 속에서 ‘미스 바렛’이란 이름의 캐릭터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어째서 시에라시티 최고의 스나이퍼가 게임에서는 내내 언급도 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는 게임 시작 시점에,

이미 죽은 인물이었으니까.

<톤토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의뢰를 수행하던 중, 미스 바렛은 화이트데스에게 저격당해 숨졌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내가 없었어도 그녀는 그곳에 똑같이 있었을 거고, 똑같이 죽었을 거다.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진 시나리오란 얘기다.

자아, 그럼 이제―

대상을 한번 바꿔보자.

원래 게임 속에서 블랙 대거즈의 보스는 머리에 파이프가 꽂힌 괴물 트롤 자그말렉 피터스.

하지만, 지금 블랙 대거즈의 보스는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 초능력자 토마.

이 모순의 원인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아직 자그말렉 피터스가 블랙 대거즈의 보스가 아닐 뿐이다. 이제 곧 그렇게 되겠지.

그렇다면, 지금 보스인 토마는?

게임 속에서 ‘토마’란 이름의 에스퍼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한은 블랙 대거즈에도, 다른 단체에도, 그 어떤 곳에도, 그런 존재는 없다.

‘미스 바렛’과 같은 원리다.

녀석은 게임 시작 시점에,

이미 죽은 인물이라는 거다.

7일 뒤 시장 선거가 끝나고 나면 그때가 바로 <사이버판타지> 본편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블랙 대거즈의 보스, 토마는 아마 그전에 죽을 것이다. 죽진 않더라도 어딘가로 영영 사라지겠지.

그러니까―

더는 엮일 필요 없다.

엮여서 뭐 하겠나.

어차피 죽을 놈인 걸.

“후우.”

나지막이 한숨을 뱉었다.

전부 의미 없는 짓이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흉악한 테러리스트 단체를 등에 업고 뒷세계를 지배할 생각이었거늘,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블랙 대거즈의 보스가 될 자그말렉 피터스란 놈은 가히 히틀러급의 강경파. 내가 암귀건 뭐건 마법사인 이상은 절대 손을 잡으려 하지 않을 터였다.

결론은…… 좆된 것까진 아닌데. 좀 좆같아졌다.

이제 와서 어쩌겠나.

그냥 내 인생 살아야지.

나는 TV를 껐다.

곧 아무 생각 없이 잠에 빠졌다.

***

목요일.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빡빡한 인구 밀도를 자랑했다.

역을 빠져나오자 번화가 거리를 수놓은 선거 포스터들이 보였다. 그중 단연 눈에 띈 것은 무소속 후보이자 당선 유력자인 캐서린 스트로베리의 것이었다. ‘유능하고 아름다운 오크 여성’이란 독보적인 캐릭터를 가진 그녀는 벌써 천만에 가까운 시민들을 자신의 열성팬으로 만들어 사로잡은 뒤였다.

당연히 그들은 모르겠지.

저 여자가 시장이 되고 나서, 이후 이 도시에 어떤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지…….

뭐, 그것까지는 나로서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은 내 몸 하나 간수만으로도 벅차다.

일단 가장 시급한 문제인 ‘윌슨앤코 붕괴’.

<우드게이트 웨어하우스> 습격 사건을 계기로 윌슨앤코 그룹은 쫄딱 망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날까지 남은 기간은 이제 단 2주.

대비책은 어느 정도 마련해 두었다만, 어쨌거나 문제의 D-day를 버텨내는 게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곧바로 재수감. 감옥행 배드 엔딩이다. 몇 년을 살고 나와야 할지 모른다.

불안을 꾹꾹 눌러 가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회사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평소같이 빌딩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왜인지 도로 갓길에 나란히 주차된 경찰차와 검정색 SUV 한 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차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마치 내가 이곳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그들은 자연스럽게 걸어와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실례.”

그중에 제일 앞쪽에 있었던 이는,

깎다 만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남성.

“우리 구면이지. 미네랄워터 친구.”

아이러니하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옛날에 술집에서 봤었는데, 기억 안 나나?”

“……기억납니다. 그때 그 형사님 아니십니까. 개똥 같은 커피 때문에 바텐더한테 화내셨던.”

“그래, 날세. 기억해 줬다니 영광이구만. 하하.”

형사는 표정 변화 없이 말로만 웃어 보였다.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전에 자네가 집 근처에서 강도 만났던 그 사건 있잖아. 최근 용의자 신상이 파악돼서, 다시 조사를 할 일이 생겨서 말이야.”

“…….”

“그러니, 잠깐 서에 같이 좀 가주겠나.”

부탁이 아닌 명령에 가까운 어투.

단순히 조사를 위하여 피해자를 모시러 온 거였다면 무장한 경관들을 대동하지는 않았겠지.

이건 명백하게.

용의자 취급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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