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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70화 (70/201)

70화. Who Are You (2)

「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타이퍼는 나를 보더니, 대부호가 사는 고풍스러운 저택의 하녀나 말할 법한 대사를 읊었다.

아침 인사 같았으나 지금은 한밤중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메이드가 아닌 고물 안드로이드였다.

“나 언제부터 자고 있었냐?”

「1시간 21분 전부터입니다.」

“윽, 그렇게 많이 잤다고? 망했네. 이러면 새벽까지 있어야겠는데……. 좀 깨워 주지 그랬냐.”

「안드로이드 행동 강령에 의거하여 수면 상태의 인간을 AI의 독자적 판단하에 깨우는 것은 해당 인물에 대한 직간접적인 생명의 위협이 발생했을 경우 혹은 별도의 알람 기능 설정 없이는 불가합니다.」

“회사원한테는 밀린 일 놔두고 꿀잠 자 버리는 게 생명의 위협이나 다를 바 없어요, 로봇님아.”

나는 탄식에 가까운 하품을 내보냈다.

당연하지만 딱딱한 사무용 책상에 잠깐 엎드려 있던 정도로 육체의 피로는 전혀 가시지 않았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주인님.」

“어. 한 잔만 타 줄래? 블랙으로.”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타이퍼는 연신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느릿느릿 탕비품 팬트리 쪽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중에 문득, 프린터에서 흘러나와 있는 무수한 종잇장들이 눈에 띄었다.

“뭐지?”

나는 종이를 몇 장 집어 내용을 살폈다.

마나 형질 분류, 속성 마법의 구사 노하우, 기초 술식을 응용한 다양한 범용 계산식 조합, 마법진 양식과 구조에 대한 설명……. 그것은 장장 수십 페이지에 걸쳐 워드로 작성된 마법학 교과서였다.

교재로서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

적어도 인터넷에 널리고 널린 아마추어틱한 자료들과는 질적으로 비교가 안 됐다.

여태 짬이 날 때마다 마법 관련 서적을 꾸준히 읽어 온 나였기에, 그 종이에 담긴 내용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우수한 정보인지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주인님.」

그때쯤 타이퍼가 돌아왔다.

녀석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딱딱한 두 손으로 정성껏 감싸 나에게 건넸다.

“아, 고마워.”

나는 그걸 받아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뒤 주변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금 종이들을 훑었다. 로봇 녀석은 옆에서 묵묵히 나를 지켜봤다.

“이 프린트, 네가 뽑은 거야?”

「그렇습니다.」

“설마 내용도 다 네가 쓴 건 아니지?”

「각주에 인용 사실이 언급된 참고 문헌과 예제를 제외한 모든 내용은 제가 직접 작성하였습니다.」

……이걸 전부 직접 썼다고?

타이퍼의 지식수준이 웬만한 대학 교수급이라는 거야 물론 알고 있었다만, 아무렴 이 정도였을 줄이야. 것도 하드웨어는 20년 묵은 깡통인 주제에.

“근데, 문서 작성도 이렇게 잘하고, 복사기도 제대로 쓸 줄 알았으면서, 왜 평소에는 시키는 일마다 죄다 쳐 잡치고 개판 내고 지랄이었던 거니?”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프린트의 내용은 간단하지 않았다.

어려운 용어가 나올 때마다 덕지덕지 딸려 붙는 주석들과 배려심 가득한 문체 덕분에 읽기 어렵거나 하진 않았지만, 어쨌건 꽤나 높은 수준의 이해도를 요구한다는 것만은 변함없었다.

지금까지 타이퍼가 해준 강의의 심화 버전이란 느낌이 강했다. 캐치볼 하는 법을 익혔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야구 규칙을 알려주기 시작하는 느낌.

“이거 다 배우려면 좀 빡세겠네.”

「혹시 제가 쓴 구문이 많이 어려우십니까.」

“뭐, 내가 빡대가리여도 네가 어련히 잘 가르쳐주겠지.”

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타이퍼는 잠시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우선은 짧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다 곧 프린터에서 출력된 종이를 한 장 집어 들고는 그걸 나에게 건넸다.

「‘타트바’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 알고 있었다.

‘타트바’란 마나의 다섯 형태. 원시 마법 시절부터 통용되어 온 전통적인 마력 형질 분류 개념이다.

불꽃의 형 테자스.

물결의 형 아파스.

바람의 형 바유.

번개의 형 아카샤.

금속의 형 프리티비.

각각의 형태는 저마다의 장단점과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마법을 구사하려면 이러한 마나의 형태 변환을 자유롭게 해낼 수 있어야 했다.

「주인님께서 현재 다루실 수 있는 형태는 불꽃의 형 ‘테자스’뿐입니다. <강화>를 활용한 비전 마법의 재현이 목적이라면, 가장 단순한 형태인 테자스만으로는 재현 가능 범위가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흠.”

「아시다시피, 비전 마법 중 상당수의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속성 마법입니다. <아쿠아 밤>이나 <라이트닝 블래스트> 같은 속성 마법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타트바의 개발이 필수적입니다.」

“그렇겠지.”

「허나 자색 마력은 모든 색채 가운데 최악의 변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테자스 이외의 형태로 변환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쯧. 어쩐지 빡셀 것 같더라니.”

「인고의 시간을 투자해도 모자랍니다. 하지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합니다. 노력은 언젠가 반드시 빛을 발합니다.」

타이퍼는 말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주인님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깡통 로봇의 눈빛.

그래도 겉보기만큼 썩 불쾌하지는 않았다.

내게는 정말로 이 녀석뿐이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

어쩐지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말해야 할 것 같다.

줄곧 숨기고 있었던 사실을.

“저기, 타이퍼.”

「예. 주인님.」

“미안. 써 버렸어. 그거.”

양심이 쿡쿡 찔리는 와중에 결국 에둘러 말하고 말았지만, 타이퍼 녀석은 진상을 금세 알아챘다.

「<부름> 말씀이십니까.」

“…….”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깡통 로봇 친구는 눈빛 하나, 음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야 그런 기능이 없으니까 당연하지만서도.

“얼레, 화 안 내네……?”

「주인님께서 <부름>을 쓰리란 것은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일입니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이불에 똥을 쌌다고 해서 화를 내는 부모는 없습니다.」

“오줌도 아니고 똥 싼 애기 취급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님의 청개구리 기질에는 심히 개탄스러운 지경입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왜 하지 말라고 하는 걸 굳이 해 버린 것입니까?」

“아니, 그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그, 넌 모르겠지만, 사람은 원래 좀 그런 면이 있어.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그런 거…….”

「알겠습니다. 주인님의 행동 패턴에 대해 확인했습니다. 나가 뒤지십시오. 방금 제가 한 말은 주인님께서 건강히 살아가시기를 기원하는 의미였습니다.」

“…….”

「주인님은 병신입니다. 이 말은……」

“그만해, 이 새끼야.”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나를 후드려 패듯이 매도해 왔다. 뭐, 이 정도면 예상한 것보단 덜 혼난 편이었다.

「몇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

「혹시 <부름>을 사용함으로써 주인님 자신이 도리어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까?」

“……있어. 한두 번.”

「어떤 상황이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수요일 밤의 일을 떠올렸다.

스테파노 멜리에스와의 전투에서, 나는 그의 마법에 대항하여 <부름>을 사용했다.

그 시도는 성공했다. 당시 <부름>의 벌레 떼는 현역 최강의 신성 마법사가 날린 강력한 파괴 마법을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한입에 꿀꺽 집어삼켰다.

허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힘이 멋대로 날뛰었어. 원래도 말을 잘 듣는 편은 아닌데, 그때는 아주 각 잡고 반항까지 해 와서, 하마터면 내 마법에 내가 잡아먹힐 뻔했어.”

끼익―.

타이퍼는 고개를 앞뒤로 끄덕였다.

「일전에 제가 <부름>을 쓴 흑마법사들의 최후는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들 대부분이 악마로부터 얻은 <부름>의 힘을 자신의 능력으로 온전히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알아. 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단 얘기지.”

「처음에 얻은 <강화>도 물론 그러하지만, <부름>은 그보다도 훨씬 더 비현실적인 힘입니다. 그것은 과학과 마법을 완전히 부정하는 편법 그 자체입니다.」

비정상적인 과정으로 도출된 결과는 마찬가지로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다고, 녀석은 말했다.

「마법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는 가장 빠른 길은 언제나 직선입니다. 그저 정직하고 성실하게,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나아가야만 합니다.」

“…….”

「마법사로서 강해지고 싶으시다면 오로지 그 방법뿐입니다. 그 길은 주인님 혼자서 걸어야 하는 길이지만, 때때로 남의 도움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또다시 악마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상황에 부딪힐지라도, 언젠가 충분히 강해진다면 악마는 알아서 꼬리를 내릴 것입니다. 주인님께서는 <부름>의 힘을 제어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셔야 합니다.」

타이퍼는 말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주인님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아까도 같은 말을 했었지.

왠지 기분 좋은 데자뷰였다.

“그래. 노력해볼게.”

「응원하겠습니다. 주인님.」

“오늘은 내가 아직 일이 남아서 마법 공부하고 있을 여유가 없거든? 그러니까 다음에 계속하자.”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아참, 그거 알아? 너 내일 센터 보낼 거다. 부품 수리랑 바디 업그레이드 맡겨 놨거든.”

「알고 있습니다. 낮에 얘기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그럼 기뻐하는 티라도 내야지, 인마. 업그레이드라니까? 드디어 고물 깡통 신세에서 벗어나는 거라고.”

「현재 감정 모듈에 문제가 있어 기쁜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타이퍼를 슬쩍 보았다.

“그렇다 쳐도, 어째 기분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닙니다.」

“너 혹시 나랑 헤어져 있기 싫어서 그러냐?”

그냥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다.

헌데 녀석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정곡을 찔렸다는 듯, 아무런 대답도 끼익거림도 없다.

“뭐야. 진짜야?”

「…….」

“귀여운 녀석일세, 이거.”

「…….」

“걱정 마. 새 몸은 이미 준비돼 있고, 거기에 메모리만 옮기면 된대. 아마 금방 끝날 거야.”

「…….」

“내일 아침에 수리업체 사람이 와서 가져간다니까, 엘리베이터 앞에 있으면 돼. 알겠지?”

타이퍼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월요일에 보자. 스승님.”

나는 별생각 없이 미소를 지었다.

「네.」

그리고 녀석은 말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때 봬요.」

아니, 어쩌면.

그러려고 애쓰면서.

***

「…….」

「…….」

「Verification 100% complete.」

「System: NO ERROR.」

월요일 아침.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타이퍼 Mk-II의 놀라운 모습이 드디어 우리 사무실에 공개된 순간.

「타이퍼. 기동합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나, 스몰필드 씨, 그리고 하인즈 사장의 진심 어린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쏟아졌다.

“오오, 이게 바로 최신 안드로이드……!”

“무슨 소리세요, 팀장님! 하드웨어 연식은 7년 전 기종인데다 탑재된 OS도 8세대 허클베리 8.15버전이니까 아무리 잘 쳐줘도 최신은 절대 아니라구요!”

“흠, 지금 기분은 뭐랄까. 쌍꺼풀 수술하고 온 내 딸을 봤을 때와 비슷하군! 파하핫!”

이모티콘처럼 데포르메로 표현된 LED 얼굴.

방금 세차한 자동차처럼 반짝이는 화이트 바디.

전처럼 어설프게 인간을 흉내 낸 불쾌한 외형이 아닌, 누가 봐도 호감을 가질 법한 귀여운 생김새.

「윌슨앤코 여러분.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

게다가 이제는 낮에도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음성도 노이즈 없이 전보다 훨씬 더 깔끔하게 출력됐다. 딱딱한 목소리 톤은 그대로였지만,

“그나저나, 어디가 어떻게 업그레이드된 거래?”

「종합적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성능, 특히나 연산 처리 능력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습니다.」

“오, 그럼 이제 회사 일도 도울 수 있겠다?”

「네.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좋아. 일단 B/L 드래프트 좀 가져와 볼래?”

「추천 BL 만화 검색 중…….」

“뭐 하냐?”

다만 기대와는 달리, 업무에 있어서는 옛날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그리 큰 도움은 안 됐다. 원판 AI 머신 러닝 모델이 구형인 탓이라나 뭐라나.

“너 또 나니니시마스까 그 지랄은 안 할 거지?”

「何にしますか?」

“일본어 능력만 업그레이드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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