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I’m Only Sleeping (1)
거대한 불꽃이 민둥산을 집어삼켰다.
먼발치의 창가에서 그 광경을 똑똑히 목도한 비너스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돼, 됐다…….’
곧 다리에 힘이 쫙 풀리더니.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
어쩐지 묘한 느낌이었다.
해냈다는 안도감보다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야릇한 고양감이, 그녀의 뒷목에 저릿저릿한 소름과 함께 내리 진하게 남아 있었다.
‘방금 그거, 정말로 내가 한 거야……?’
처음으로 직접 손에 쥔 압도적인 출력의 마력.
유진의 무한한 자색 마나와 <강화>로부터 비롯된 찰나의 판타지. 5분여의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줄곧 꿈꿔왔던 몽상 같은 현실을 맛봤다.
허나,
취해 있을 수 있던 것도 잠시뿐.
“일어나. 아직 안 끝났어.”
뒤쪽의 유진이 말했다.
비너스는 순간 움찔했다.
“놈이 살아있을지도 몰라.”
“…….”
“10분. 거기서 그대로 서 있어.”
대꾸할 기운조차 없었다.
비너스는 유진이 시킨 대로, 창가에 선 채 가만히 있었다. 긴장감에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
….
10분이 지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
“수고했다.”
또다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주저앉지 않고 버텨냈다. 서 있는 동안 장딴지가 벌벌 떨리긴 했지만 말이다.
‘살았다아…….’
어쨌든,
살아남았다.
‘…….’
비너스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윽고 떠올리고야 말았다.
‘아.’
5km 바깥의 저격수 따위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가, 자기 등 뒤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흐익!”
그녀는 허겁지겁 몸을 돌렸다.
검은 후드를 입은 남자, 유진은 가방에서 생수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문득,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비너스는 화들짝 놀란 시늉을 보였다.
“물 필요해?”
“…….”
“옜다. 받아라.”
유진이 물병을 휙 던졌다.
비너스는 가까스로 그것을 받았다.
“아, 그, 고마워요…….”
생수병을 입에 대고 찔끔찔끔 물을 마셨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비너스의 속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합심하여 저격수를 처치한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이제 공공의 적은 사라졌고, 자연스레 임시 동맹 또한 더는 유지될 이유가 없어졌다.
‘분명 날 죽이려 들 거야.’
‘살려둘 이유가 없으니까.’
최근 뒷세계에 퍼진 소문은 지겹게 들어왔다.
자색 마법을 쓰는 흑마법사― ‘카이트’란 존재. 그리고 그가 전설의 살인마 ‘암귀’라는 사실.
유진이 바로 그 ‘카이트’란 것쯤은 당연히 진작 알아챘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술수에 걸려들어 쩔쩔매던 그때의 그 피라미 마법사가 아니었다.
하룻밤 만에 데스트루퍼를 일망타진하고, 레오노프와 토니 웡을 시체도 안 남긴 채 척살했으며, 소문으로는 블랙 대거즈까지 자기 휘하에 놓은 괴물.
자신은 그런 괴물을 적으로 뒀다.
그리고 그 괴물이 지금 눈앞에 있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되지?’
마나는 바닥났다. 현재 비너스의 상태로는 간단한 기초 마법 하나도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다.
맞서 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도망칠 방법도 떠오르는 것이 전혀 없다.
죽는 결말밖에는― 없다.
“야.”
그때.
유진이 말을 걸었다.
“죽긴 싫지?”
정곡을 찌르는 질문.
비너스는 제때 답을 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다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앞뒤로 신속하게 까딱댔다.
“너 샌마대 다닌다 그랬지.”
“네, 넹……?”
“샌제이비어 마법학교에 무슨 특기생으로 들어갔다 했었잖아. 그거 구라였냐? 아님 진짜야?”
“지, 진짜애오…….”
“잘됐네. 목숨 부지할 기회가 생겨서.”
빠지직―.
유진은 다 마신 생수병을 찌그러뜨렸다.
“내가 너네 학교에서 누굴 만나야 하거든?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누, 누구여……?”
“스테파노 멜리에스.”
샌제이비어 마법학교의 이사장 겸 수석교수. 국제신성마법학회의 학회장. 디바인 마스터.
말도 안 되는 거물이다. 한낱 대학생이 쉬이 접근할 수 있는 그런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어때, 도와줄 수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너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넵…….”
어쨌든 간에―
살아남아야 했다.
***
오전 11시.
윌슨앤코 사무실.
“스몰필드 씨, 이것도 좀 처리해 줄래요?”
유진이 세 번째 서류 뭉치를 자기 책상에 올리자, 리타 스몰필드는 결국 언짢음을 감추지 못했다.
“또 있어요……?”
“미안해요. 급한 일이니 서둘러 주세요.”
오늘따라 웬일인지 업무가 잔뜩 밀렸다.
별다를 것 없는 화요일 아침부터 말이다.
“하아……. 언제까지 끝내면 돼요?”
“점심시간 전까지 가능할까요?”
리타 스몰필드는 사무실 벽시계를 쳐다봤다.
현재 시각은 오전 11시를 갓 넘긴 와중이었다.
“……한 시간도 안 남았는데요.”
“예에, 미안하지만 부탁 좀 드릴게요.”
“저기 죄송한데, 아까 주신 것도 그렇고, 이것들 다 모레까지만 마무리하면 되는 서류들 아니에요? 팀장님 혼자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거예요?”
“그게, 실은 제가 오늘 반차를 내야 해서요.”
“네에?”
리타 스몰필드는 귀를 의심했다.
“바, 반차를 내신다구요?”
“오후에 어디 갈 데가 있어서요. 그리고 내일은 아마 통째로 연차를 쓰게 될 것 같네요.”
“네에에?”
“정말 미안해요, 스몰필드 씨. 하여간 오늘만 어떻게 일 처리 좀 빠르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시간이 되었다.
책상머리에 붙어 있던 유진은 마침내 일을 다 끝낸 뒤 한껏 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네에…….”
“식사 맛있게 하세요, 스몰필드 씨.”
그는 외투와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리타 스몰필드는 여전히 언짢은 표정이었다.
“저건 여자구만.”
그즈음, 책상 뒤에서 누군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성우처럼 늠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리타 스몰필드는 깜짝 놀라 뒤를 보았다.
거기엔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사자 같은 풍채의 직장 보스― 에드먼드 하인즈가 서 있었다.
“사, 사장님?”
“으흠, 틀림없어. 저거는 분명히 여자가 생긴 게야. 내 육감은 절대로 빗나가는 법이 없지.”
“여, 여자라니, 팀장님한테요?”
“그래. 걸음걸이만 봐도 뻔하지 않나. 남자란 생물이 저리 깜찍한 걸음으로 뛰쳐나가는 때는 대변 마려울 때랑 여자 만나러 갈 때밖에 없어.”
“그, 그런가요……?”
“아, 물론 남자를 만나러 갈 때도 저럴 수야 있겠지. 사실은 내가 말이야, 최근 들어 다양한 취향을 존중하게 되었거든. 자네 역시 20세기 고전 명작 게이 포르노를 보게 된다면 내 심적 변화를 조금은 이해할 걸세. 엔딩이 참 감동적이더군.”
“…….”
“그나저나 점심시간인데, 식사하러 안 가나?”
에드먼드 하인즈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리타 스몰필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밥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사무실을 나가려던 찰나.
하인즈 사장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리타 양.”
“네?”
“우리 회사 내규에 사내 연애 금지 조항 같은 건 딱히 없다네.”
“……?”
“무어, 그냥 알아나 두라고. 파하핫!”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사장실로 들어갔다.
저의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리타 스몰필드는 살짝 찜찜한 맘을 품은 채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어라.’
캐니언 빌딩을 나와 식당가로 향하던 때.
그녀는 거리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팀장님이잖아?’
유진이었다.
그는 갓길에 세워진 경차 옆에서, 차에 탄 누군가와 차창 사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 거지?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어 볼까?
아니야, 뭔가 좀 어색하지 않나?
쓸데없는 고민들과 잡생각에 빠져,
한창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그 무렵.
운전석에서 누군가 나왔다.
초록머리의 엘프 여성이었다.
‘……?!’
리타 스몰필드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잠깐만, 저 사람…….’
곧이어 그녀는 차에서 나온 그 여자가,
언젠가 본 적 있는 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전에 팀장님이랑 카페에서 같이 있었는데……?’
엘프 여성과 유진은 무언가 잡담을 더 주고받더니, 이내 각자 운전석과 조수석에 들어가 탔다.
부릉―. 두 사람이 탄 자동차는 시끌벅적한 엔진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도로 너머로 사라졌다.
‘…….’
리타 스몰필드는 그쪽을 계속 바라봤다.
차가 사라진 이후에도, 하염없이 쳐다봤다.
‘……정말로, 여자였구나…….’
어쩐지.
밥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
이름.
프레야 앤더슨.
학력.
샌제이비어 국립마법대학교 재학 중.
나이.
잠깐만, 뭐야, 이거.
“63세?”
“…….”
“이거 맞냐? 예순여섯 살이라고?”
비너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반대로 나는 경악스러움에 입을 도저히 다물 수가 없었다.
“존나 할머니잖아…….”
“누, 누가 할머니예요?”
“63살이면 할머니 맞지.”
“아니, 저기요. 저 인간 아니고 엘프거든요? 엘프치곤 진짜 엄청 젊은 축에 속하는 거거든요?”
“그치. 차라리 630살이라고 하면 엘프니까 그러려니 했겠는데, 63살이라니까 갑자기, 갑자기 훅 들어오는 느낌이야. 뭔가 존나게 와 닿아.”
“미안하게 됐네요. 100년도 안 산 싱싱하고 탱탱한 엘프라서.”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많다고? 와…….”
“아우, 그만 좀 놀려요, 제발!”
하여간 이쪽이 진짜 신분이라 이건가.
나는 들고 있던 프로필 서류를 한 번 더 대충 훑은 다음 조수석 글러브 박스 안에 집어넣었다.
“그럼, 이제 프레야라고 부르면 되나?”
“죄송한데 저 제 이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그냥 부르던 대로 불러 주시면 고맙겠네요.”
“알겠어요. 비너스 할머니.”
“진짜 성격 개드럽다, 유진 씨.”
점심 무렵 웨스트록의 도로는 한적했다.
차에 탄 지 10여 분쯤 지났을 무렵, 오랜만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문득 졸음이 쏟아졌다.
“얼마나 걸리냐?”
“30분 정도요.”
“나 잠깐 눈 좀 붙인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비너스가 토끼마냥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자, 잔다구요……?”
“그래.”
“아니, 저기, 그, 뭐랄까, 제가 꺼낼 말은 아니긴 하지만…… 너무 무방비한 거 아녜요?”
그 질문의 속뜻을 번역하자면 이러했다.
한때 자기 심장을 노렸던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 느긋하게 곯아떨어지고 있어도 되는 거냐.
“저기 뒤에 오는 바이크 보여?”
나는 엄지로 자동차 뒤쪽을 가리켰다.
비너스는 룸미러를 보았다. 검정색 오토바이 한 대가 우리가 탄 차의 꽁무니를 내내 쫓고 있었다.
“저 친구 블랙 대거즈야.”
“……?!”
“도시 안에서는 어딜 가든 내 호위로 붙어 있지. 쟤가 한동안 널 감시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블랙 대거즈는 마법사의 천적.
그들에게 노려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 도시에 사는 마법사라면 당연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튼 난 잔다. 도착하면 깨워.”
“…….”
그리 말한 뒤, 나는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피로에 찌든 몸은 금세 얕은 잠에 빠져 꿈결과 현실 사이를 오갔지만, 알로이 비트의 통통 튀는 승차감 덕에 그보다 깊게 잠들지는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끼익―. 차가 멈춰 섰다.
“다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