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Dancing for Money (4)
이스트포레스트 2구역.
노턴 12번가로 향하는 택시 안에, 스퀘어 안경을 쓴 샤프한 인상의 한 남자가 있었다.
‘쯧.’
그의 이름은 알랭 그루너.
<슐츠텍 디스트리뷰션>의 기술 지원 및 파트 영업 담당을 맡고 있는 어시스턴트 매니저다.
‘이건 시간 낭비야.’
오후 1시에 있을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공항에서 컨벤션 센터로 이동하던 중, 갑작스럽게 들어온 상부에서의 호출.
행사장 근처 카페에 영업을 희망하는 거래처 인사가 있으니, 잠깐 가서 만나고 오라는 얘기였다.
‘빌어먹을 상사 놈. 리허설을 세 번씩 해도 모자랄 참에 귀중한 시간을 이딴 데 바치게 하다니.’
알랭 그루너는 상부의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
<슐츠텍>은 미래형 기술 발전을 선도하는 어스테이트 제일의 하이테크 기업이었지만, 정작 사내 문화나 사업 방향성은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나 신규 거래를 트는 등 영업에 있어서는 참 고리타분하게도 그놈의 ‘인맥’을 중요시했다.
보나 마나 이번 건도 어느 발만 넓은 놈이 이쪽 디렉터급에게 알랑방귀를 뀌어 댄 결과물일 테지.
‘젠장할. 미팅 시간 10분 전에 30쪽짜리 포트폴리오를 던져주는 건 무슨 경우냐고, 도대체.’
알랭 그루너는 노트북에 띄운 워드와 PPT 화면을 슥슥 넘기며 속으로 짜증을 부렸다.
대충 훑어본바 내용은 썩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그 이상 평가를 내리기엔 시간도 마음도 없었다.
그는 제안서 초반 부분에 쓰인,
메일을 보낸 이의 이름을 확인했다.
‘……<윌슨앤코>인가…….’
어느새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알랭 그루너는 서류 가방을 챙겨 택시에서 내린 후, 도로 건너편의 카페로 향했다.
―딸랑.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인물이 곧바로 그의 눈에 띄었다.
말쑥한 정장 차림. 여러 차례 시간을 확인하는 동작. 온몸으로 ‘나 미팅 나온 영업사원이오’라고 외치는 듯한, 금발의 젊은 동양인 남자.
“윌슨앤코에서 오신 분 되십니까?”
알랭 그루너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때, 손목시계를 쳐다보고 있던 동양인 남자, 유진은 살짝 놀란 눈치로 반응했다.
“아, 예. 맞습니다.”
현재 시간은 정확히 12시 15분.
약속한 시간과는 1분의 오차도 없었다.
“슐츠텍 디스트리뷰션 현장기술지원팀 어시스턴트 매니저 알랭 그루너입니다.”
“윌슨앤코 운영팀장 유진 연입니다.”
두 남자는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이렇게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유진은 기쁜 얼굴로 말했다. 알랭 그루너는 그런 비즈니스 미소를 잘 짓는 타입이 아니었다.
자신은 굉장히 바쁜 사람이므로, 당신에게 10분 이상 할애할 마음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려 했다.
“바쁘실 테니 바로 본론부터 얘기하겠습니다.”
헌데 그가 할 말을 미리 눈치라도 챈 듯, 유진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어서 그는 자기 가방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 알랭 그루너에게 건넸다.
“이건……?”
“거래 제안서 요약본입니다. 내용은 거의 축약해서 의미 없고, 그냥 수치만 보시면 될 겁니다.”
알랭 그루너는 건네받은 서류를 살폈다.
……깔끔하다. 시시콜콜한 부분은 전혀 없다. 유진의 말대로 숫자만 체크한다면 요약본을 다 읽기까지 시간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을 듯했다.
“요약본에 어쩔 수 없이 빠진 내용에 관해 간단하게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이번에 저희가 요청 드린 위탁 생산 라이센스 건에 대한 수요 예측을…….”
“귀사가 위탁 생산한 OEM 제품을 아프리카와 북유럽 쪽에 수출할 예정인 것이지요.”
“앗, 맞습니다. 메일 읽어 보셨군요?”
“시간이 부족해 전부 체크하지는 못했습니다. 헌데 생산 계획 부분이 꽤 인상적이더군요.”
알랭 그루너는 안경을 고쳐 썼다.
“귀사가 제시한 생산 희망 목록은 정부 규제 품목을 포함해 총 81종. 라인 확보를 할 수 있다 쳐도 아무래도 좀 많지 않습니까? 예상 수출량에 대비해서 MOQ까지 고려하면 여기서 반의반으로 줄여도 충분히 과하다 봅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
“매우 합리적인 계획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아시겠지만, 최근 북유럽 쪽에서 발할라 타르타로스가 게이트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EU 연합군만으론 대처가 어려워 민간 지원자를 뽑고 있죠.”
“…….”
“제식 장비가 한정된 정부군과는 달리 용병들은 자기들 입맛에 맞는 다양한 장비를 선호합니다. 민간 시장에서 슐츠가 특히 인기 있는 이유죠. 총기, 냉병기, 전투용 임플란트, 배틀기어― 슐츠는 대부분 장르에 고성능 제품을 보유하고 있으니까요.”
유진의 논리는 일목요연했다.
제품의 수요자가 될 민간군사기업― PMC와 직접 거래를 하는 대신 정부군과 수출 계약을 맺는다.
정부군은 이렇게 수입한 슐츠의 장비를 용병들에게 보급한다. 이는 제식 장비를 보급하는 것보다 비용이 좀 더 들긴 하지만, 그만큼 용병들의 만족도가 높아지니 지원율이 대폭 상승할 것이다.
“생산 품목의 종류가 많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시면 제조 공정과 필요 원료가 대부분 공통되는 제품들입니다. 그러니 라인 확보와 재료 수급에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알랭 그루너는 흠칫 놀랐다.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고……?’
확실히 제안서에 있는 생산 리스트 중 70%가량이 공정과 원료를 공유하는 장비들이었다.
슐츠의 내부 사정이나 기술-설비 쪽에 여간 빠삭하지 않고서야 알아내기 어려운 정보인데…… 이 남자는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걸까?
사실 이는 요행에 가까웠다.
유진은 그저 게임 속, <사이버판타지>에서 장비 제작을 할 때의 상황을 떠올린 것에 불과했다.
전술소총 G-98 ″게베어″,
전투대검 Superior-B ″바스타드 블레이드″,
전투방호복 아머 시리즈 ″히트맨 아머″ 등등등,
그가 제시한 생산 희망 제품은 모두―
일반 제작이 가능한 장비 아이템 목록.
조합식과 재료, 크래프팅 요구 레벨이 비슷한 장비템들을 대충 기억나는 대로 늘여놨을 뿐이었다.
“물론 일부 품목은 북유럽 쪽 수요만 가지고는 최소 생산량 단위를 맞추기 어렵습니다.”
“…….”
“그래서 내전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아프리카 몇몇 국가와도 소규모 납품 계약을 체결해, 공급 루트를 넓히고 MOQ 또한 해결할 예정입니다.”
언뜻 들었을 때는 완벽한 수출 계획.
설마 아프리카로 보내는 척 물건을 몰래 빼돌려 뒷세계의 악당들에게 팔아먹겠단 속셈이 있을 것이라곤, 그 누구도 상상할 수조차 없을 터였다.
“다른 건 몰라도 아머 시리즈만큼은 꼭 생산을 허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히트맨 아머, 이게 또 물건이지 않습니까. 착용 후 5분 이내로 전신 발열 기능에, 통기성까지 좋아서 답답하지도 않고, 극지방 현장에서 아주 제대로 히트일 겁니다.”
유진은 조금 들뜬 어조로 말했다.
“본인이 입어 보신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아, 실은 직접 착용해 본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잠깐 군대에 있었거든요.”
알랭 그루너는 또다시 흠칫 놀랐다.
“……군인 출신이십니까?”
“예. 10년 전에 대한민국 육군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군대를 다녀오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에서의 이야기.
군인 출신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환대를 받는 어스테이트 사회였기에, 유진은 뻥카를 쳤다.
“10년 전 태평양 연합군에 계셨다면, 길림성 타르타로스 공략에도 참여를 하셨겠군요?”
“오, 맞아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도 그때 대서양 연합군 소속이었으니까요. 발령 난 곳은 아이오와였지만요.”
운 좋게도 상대 역시 군인 출신.
영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설득보다도 먼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 호감을 사는 일이다.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미스터 연.”
좋은 인상은 팍팍 심어주었다.
물건까지 완벽하다면, 실패할 일은 없을 터.
“귀사의 제안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보고서에 적힌 연간 6,000만 달러 상당의 예상 매출액도 합리적인 계산으로 도출된 결과라 판단되고요.”
알랭 그루너는 말했다.
단호하고 진중한 말투로.
“허나, <윌슨앤코>와는 거래할 수 없습니다.”
짧은 정적.
가볍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이유는 굳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모르신다면 그게 더 문제겠지요.”
“…….”
유진은 그가 말한 저의를 이해했다.
윌슨앤코가 겉보기만큼 정상적인 회사가 아니란 것쯤은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사실.
―범죄자들과는 거래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여기가 ‘죄의 도시’라 해도,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당연히 깔고 가는 사업의 전제였다.
“다음 일정 때문에 저는 여기 5분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하실 말씀이 남았으면 지금 서둘러 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미스터 연?”
“어, 다음 일정이라 하심은……?”
알랭 그루너는 입을 열려다 순간 멈칫했다.
뭐, 비공개 행사이긴 하지만, 거래 파트너가 될 뻔한 인물에게 이 정도는 알려줘도 괜찮겠지.
“오후 1시에 <슐츠 테크니컬 스타디움>에서 신제품 발표회가 있습니다.”
“어라, 슐츠 발표회는 9월에 있지 않나요?”
“이번 건 미공개 행사입니다. 공식 발표회 전에 VIP들을 초청해 시사회를 하는 느낌이죠.”
“그렇군요. 저도 한번 보고 싶네요.”
“얘기는 다 끝났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지금 시간이 촉박합니다만.”
“아, 저기 그, 잠깐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화장실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유진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알랭 그루너는 대충 눈치챘다. 제안을 퇴짜 맞은 것에 대해 상사에게 보고하러 가는 모양이지.
하여간 시간 낭비였다.
자신에게도, 저 쪽에게도.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이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표정에서는 어쩔 수 없는 굳은 기가 넘실넘실 눈에 띄었다.
“더 하실 말씀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알랭 그루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여기 더 앉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유진 연 씨.”
참 아까웠다.
사람으로서는 맘에 들었는데.
“그럼 이만.”
알랭 그루너는 가게를 나왔다.
오후 1시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30분. 행사장까지는 걸어가도 되는 거리였지만,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그는 택시를 잡기로 했다.
도로변 보도에 서서, 빈 택시가 오고 있지 않나 가만히 살피고 있던 와중.
부릉―.
멀찍이서 바이크 엔진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주 멀리서 들려온 소리였기에.
부르릉―!
그러나 엔진 소리가 가까워질 즈음,
알랭 그루너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소리가 들려온 것은 등 뒤쪽에서부터.
그가 고개를 돌려 이를 확인하기도 전에,
단단한 쇠파이프가―
그의 발목을 강타했다.
“억!?”
알랭 그루너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바이크 한 대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쇠 파이프로 그를 공격한 범인은 헬멧을 쓴 바이커였다.
그가 바닥에서 발목을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또 다른 바이크 한 대가 접근해 왔다.
바이크를 탄 괴한이 노린 것은,
알랭 그루너가 떨어뜨린 서류 가방.
괴한이 손을 뻗어,
가방을 낚아챈 그때.
꽈악―!
유진이 달려와 동시에 그 가방을 붙잡았다.
<강화>로 인해 몇십 배는 강해진 유진의 악력으로부터 600cc짜리 바이크가 탈출을 시도하자, 서류 가방이 부욱 찢어지며 내용물이 흘러나왔다.
투두둑―. 찢어진 가방에서 노트북, 서류 파일, 그 외 잡다한 것들이 쏟아져 길바닥에 떨어졌다.
괴한은 그대로 바이크를 타고 도망쳤다. 유진은 쓰러진 알랭 그루너에게 다가가 용태를 살폈다.
“괜찮습니까, 그루너 씨?”
“으, 윽…….”
“조금만 참으세요. 지금 구급차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알랭 그루너는 자신의 부서진 발목뼈보다도 다른 걸 신경 쓰고 있었다.
“가, 가방…… 가방은 어디……?”
“걱정 마세요. 안 뺏겼습니다. 맙소사, 설마 이스트포레스트에서 뻑치기를 볼 줄은 몰랐네요.”
“그, 가방 안에 디스크, 거기 중요한 데이터가……. 발표회 시작 전에 갖다줘야…….”
“제가 대신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슐츠 스타디움으로 가면 되는 거죠?”
유진은 어떻게든 그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알랭 그루너의 초조함은 그대로였다.
젠장, 발목이 완전 아작 났다.
이래서야 시연회 발표는 무리.
대타를 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디서 누구를 데려오지?
현장 참여 인원 중엔 변변한 인재가 없다.
본사 기술팀에서 불러온다고 한들 도착하고 준비하기까지 최소 1시간은 넘게 걸릴 것이다. 전 세계의 VIP 바이어들을 모아 놓은 행사에서 1분이라도 발표가 지체됐다간 그것만으로 커다란 트러블.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출중하고,
슐츠의 기술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배틀기어 실착 및 사용 경험이 풍부한,
그런 인물이 필요했다.
“…….”
그리고 때마침.
눈앞에 있었다.
“미스터 연.”
알랭 그루너는 말했다.
단호하고 진중한 말투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