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Paranoid Android (2)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내가 표정이 굳어진 채로 가만히 서 있자, 여주인은 달래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야 매입하고 싶은 맘은 굴뚝같지만, 실은 저희 가게 재정 상황이 별로 좋지가 않아서요.”
그 말을 들으니 바로 수긍이 갔다.
오후 2시까지 찾아온 손님이 겨우 나 한 명뿐인 영세 업소에서, 경매가만 최소 10만 달러라는 물건을 쉽사리 매입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대신에 물건을 사 줄만한 사람을 저희 쪽에서 찾아 드릴 순 있어요.”
“판매 대행 서비스라는 거군요.”
“원하신다면 어떠세요?”
“흐음, 수수료는 얼마나 받으시나요?”
“중개 수수료에 검정비 품질 보증비로 500달러, 더하기 판매 금액의 5%만 주시면 돼요.”
10만 달러에 낙찰됐다 치면 5,500달러인가.
세금 떼일 것까지 고려하면 대략 12만 달러 이상에는 팔려야 계산이 맞겠군.
“좋아요. 그렇게 하죠.”
“후후후, 아주 탁월한 결정이세요!”
“판매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가능하면 4주 안에 전부 완료됐으면 하는데요.”
“아마 오래는 안 걸릴 거예요. 바르베이라 시리즈는 중고 시장에서 제법 인기 있는 브랜드거든요. 일주일만 돼도 구매 희망자가 꽤 나올걸요?”
여주인은 늦어도 한 달 안에는 판매가 완료될 거고, 그쯤이면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전했다.
“그럼 저는 이제 경매 사이트에 물건을 등록하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 보도록 할게요.”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 더 필요한 것 있으신가요?”
나는 가게 안을 스윽 둘러봤다.
“책을 좀 보고 싶은데요.”
“어떤 책을 찾으시나요?”
사실 오늘 이 가게에 온 것은,
장물 처리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흑마법에 관한 책이요.”
여주인은 잠깐 놀라는 시늉을 했다가, 다시금 속뜻을 짐작기 어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손님, 전에 얘기한 거 기억하고 계셨구나.”
“말씀 듣고 나서 미련이 좀 남긴 했습니다.”
“그 맘 이해해요. 저도 중학생 때 그런 거 좋아했거든요. 흑마법사, 고대로부터 내려져 온 악마의 술법, 저주받은 성물……. 솔직히 멋있잖아요!”
“예에, 흑마법에 관한 책은 어디 있을까요?”
“으으음, 이거는 진짜 마법사 윤리에 위배되는 거긴 한데, 그렇다고 손님이 찾고 있는 걸 없다고 뻥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죠!”
여주인은 신난 듯이 책장에 달려가, 구석진 곳에 꽂혀 있던 책들을 꺼내 먼지를 탈탈 털었다.
“어디 보자, 믿고 보는 루퍼트 홀게이트 저 ‘가장 어두운 시간의 존재들’이랑……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검은 마법과 금지된 성물’…… ‘흑마술 전서’도 참고하면 좋겠고…… 역사상 최고의 저술가인 ‘익명’님의 저작들을 빼면 또 섭섭하지…….”
쿵―.
무거운 책들이 하나둘 카운터에 올려졌다.
그녀가 가지고 온 서적은 10권에 달했다. 이것 역시도 간추려서 간추린 것들이었다.
“자, 이 중에 몇 권이나 필요하신지요?”
여주인이 그렇게 물었고,
나는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전부 주세요.”
***
책은 너무 양이 많아 배달을 시켰다.
집으로 보낼까 하다가, 수령인 주소지에 ‘에덴파크 모텔 208호’라고 쓰는 게 무지막지 꺼려져서, 결국 그냥 회사에서 받기로 했다.
오후 5시경.
정기 퇴근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무렵.
“이봐들! 나 좀 도와주게!”
느닷없이 사무실 현관 밖 복도 쪽에서 누군가의 아우성이 들렸다. 사장의 목소리였다.
“뭐지?”
스몰필드 씨와 내가 밖에 나가서 보니, 거기엔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냉장고만 한 크기의 종이상자를 낑낑 옮기고 있는 하인즈 사장이 있었다.
“사장님? 그거 뭡니까?”
“거, 쳐다만 보지 말고 도와 좀 달라니까!”
스몰필드 씨는 허겁지겁 상자 뒤쪽으로 달려가 작은 몸으로 그것을 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아무래도 여간 무거운 물건이 아닌 모양이었다.
“으으윽, 유진 구우운! 자네는 거기 서서 뭐 하고 있나아악! 빨리 도와주질 않고오오!”
“잠깐 비켜 주시겠습니까, 사장님.”
나는 사장을 옆에 치우고 상자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상자 중간에 묶인 손잡이 대용의 얇은 케이블타이를 한 손으로 붙잡았다.
“엇차.”
오른팔의 근육에 강화 마법을 사용.
팔심만으로 가볍게 상자를 들어 어깨에 들쳐 멨다.
“이거 어디다 둘까요?”
“…….”
사장과 스몰필드 씨는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상자를 가져다 사무실 구석 탕비품 팬트리 앞에 옮겼다.
“자네, 보기보다 힘이 좋구만……?”
“그래서 이게 도대체 뭔데요, 사장님?”
“아, 이거야말로 우리 회사의 미래지! 바로 자네가 그렇게 목 놓아 부르짖던 ‘추가 인력’일세!”
추가 인력.
사장은 그렇게 말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포장 좀 뜯어보겠나?”
나는 긴가민가한 태도로 상자의 포장을 뜯었다.
엉망으로 감긴 테이프를 몽땅 다 풀고 가까스로 상자를 열자, ‘추가 인력’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건……?”
인간을 닮은 인간의 창조물.
금속 피부를 가진 이족보행 로봇.
―안드로이드였다.
“어떤가? 끝내주지 않나!”
“사장님이 말씀하신 추가 인력이라는 게, 설마 안드로이드였습니까?”
“미래 시대의 상징이지! 안드로이드 혁명! 이제는 우리 회사도 이 4차 혁명의 파도에 휩쓸릴 때가 됐다는 것이야. 파하핫! 맘에 드나? 맘에 들지?”
나는 문제의 안드로이드를 살펴보았다.
이목구비가 심하게 뚜렷하여, 마치 토마스 기차처럼 어딘가 불쾌하게 느껴지는 얼굴.
군데군데 찌그러졌고 색은 누렇게 바래 있다. 솔직히 평가하자면 고물에 가까워 보였다.
“이거 얼마 주고 사 오신 겁니까?”
“가격이 뭐 그리 중요하겠나. 회사를 사랑하고 직원들을 사랑하는 내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쓰레기장에서 주워 오신 건 아니죠?”
사장은 수상할 정도로 대답이 없었다.
나는 탐탁지 못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벌써부터 한숨이 대여섯 번은 나올 지경이었다.
“……우와…….”
헌데 그런 와중에 어쩐지,
스몰필드 씨의 눈은 심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거 타이퍼네요! 그것도 리부트 전 모델!”
“예?”
“타이퍼요! 슐츠 아담 시리즈의 전신이자 프로토타입! 자가지능성장형운영체제 TYPE-R!”
“…….”
“와아, 어쩜 이리 상태가 좋지? 이게 이래 봬도 최초의 양산형 안드로이드 중 하나라구요. 작동한다면 그야말로 기적인 건데, 우와아……!”
눈물을 흘릴 기세로 감격하는 스몰필드 씨.
상당한 수준의 안드로이드 오타쿠인 듯했다.
“사장님, 이거 한번 켜 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리타 군! 두 번 켜도 상관없네!”
“에헤헤, 충전 먼저 해야겠지? 잠시만요, 멀티탭 좀 가져올게요!”
충전기 코드를 꽂자, 위잉―.
몸통 안쪽에서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잠시 후.
로봇의 눈에 불빛이 번쩍 들어왔다.
「나니니시마스까?」
오오?
그걸 본 우리는 다 같이 놀랐다.
“켜, 켜졌다! 와아! 켜졌어요!”
“얘 지금 말한 거 맞죠, 스몰필드 씨?”
“네에, 음성 모듈도 정상인가 보네요. 근데 언어 설정이 잘못된 것 같아요. 잠시만요.”
스몰필드 씨는 로봇의 등 쪽에 있는 뚜껑을 열어 안쪽의 계기판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타이퍼. 타이퍼?”
「나니니시마스까?」
“으으음, 음성 인식까진 되는데. 뭐가 문제지? ……아, 언어팩 설치가 제대로 안 돼 있었구나.”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까진 아니구요. 인터넷 연결해서 업데이트만 받으면 될 것 같아요. 몇 시간 걸릴 거예요.”
“무어, 이 친구도 오늘은 출근 첫날이니까는. 일단 천천히 회사 분위기에 적응하게 두자고!”
「나니니시마스까?」
스몰필드 씨는 빈자리의 인터넷 선을 끌어와 안드로이드 머리 뒤쪽의 포트에 꽂았다.
“으흠, 그나저나 벌써 다섯 시구만. 그러면 제군들! 나는 이만 퇴근하도록 하겠네!”
“방금 출근하셨잖습니까.”
“자네들도 이만 들어가 보는 게 어떤가?”
“저야 그러고 싶지만, 월말이라 일이 좀 밀려 있어서요. 스몰필드 씨는 퇴근하셔도 돼요.”
“아뇨, 저도 조금만 더 회사에 있을게요. 타이퍼 초기 설정만 해 놓고 가려구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로봇을 만지는 스몰필드 씨.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다.
나는 사장을 배웅하고 내 자리로 돌아갔다. 스몰필드 씨는 7시 무렵이 돼서야 퇴근했다.
사무실에 혼자 남은 뒤에도, 한동안 서류와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여느 때처럼.
회사 일은 지겹지만, 단지 지겨울 뿐이다.
일하는 동안은 적어도 자신의 한계에 봉착해 절망에 빠지거나, 누군가에게 목숨을 위협받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럭저럭 보람차기까지 하다.
오후 9시.
드디어 일을 거의 다 끝냈다.
“후우.”
30분 정도만 집중하면 될 것 같은데.
마지막 고난으로 쌓인 졸음이 밀려온다.
“커피라도 타 와야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응?”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아보니, 토마스 기차가 있었다.
“으악.”
아니, 그게 아니었다.
안드로이드였다. 아까 그 친구. 깡통 로봇이 거기에 서 있었다.
일하는 데 집중하느라 눈치를 못 챘지만, 원래 있던 자리서 여기까지 걸어온 것 같다.
“어후, 깜짝 놀랐네.”
「…….」
“얘 이름이 뭐랬더라. 타이퍼? 맞나?”
모델명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아직 언어 설정인가 뭐시기가 제대로 안 돼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쯤.
로봇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
향긋한 냄새가 올라왔다.
커피였다. 종이컵에 탄 인스턴트커피를, 로봇이 양손으로 가지런하게 들고 있었다.
“네가 한 거야?”
「…….」
“인공지능 쩌네.”
나는 로봇의 손에서 커피를 받았다.
마셔 보니 맛있었다. 물 조절을 잘했군.
“고맙다.”
「…….」
“너 혹시 복사도 할 줄 아니?”
「…….」
“아니다. 중요한 서류라 못 맡기겠다.”
로봇이 타 준 커피를 한입에 다 들이켜고 나서, 복사할 서류를 가지고 복사기 앞으로 갔다.
그런 와중에 문득, 오늘 아침 내가 마법 연습을 하다 고장 내버린 복사기가 눈에 띄었다.
새로 산 건데 벌써 이렇게 되는 게 어디 있냐고 스몰필드 씨가 짜증 냈었지. 정말 미안해요.
“…….”
하여튼 복사를 끝마치고 났을 때.
멀쩡한 복사기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흐음.”
지금이라면 왠지,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강화 마법의 활용법에 대해서라면 점심 먹고 <마녀일기> 블로그에서 비슷한 글을 정독했다.
어떤 물건에 마법을 적용시킬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그 물건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라 했다.
숙지해야 할 것은 복사기의 구조와 작동 원리.
인터넷에서 공부한 자료들이 머릿속에 있다. 지금이라면 복사기 관련해서 논문도 쓸 수 있다.
순차적으로 올바르게 기능을 강화한다면,
분명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서,
천천히 손을 올렸다.
“강화 마법.”
입으로 읊조리고.
마력을 분출했다.
그때―
「멈춰요.」
지지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인터넷 방송의 도네이션 음성 같은,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어색한 가짜 목소리.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그곳엔 고물 안드로이드― 타이퍼가 서 있었다.
“뭐?”
「…….」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다그치듯 묻자,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로봇이 입을 열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주인님은 너무 구조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마법이란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게 아닙니다.」
“뭐……?”
「이론을 만물에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인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구조 이해보다 사물과의 교감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
「기계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십시오.」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이 고물 로봇이 지금 뭐라고 떠드는 거야?
“기계의 마음을 뭐 어쩌라고?”
「주인님께서는 공감 능력이 부족합니다. 마법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의 교감입니다. 마법의 연결고리로서 술사의 마음과 물질의 마음이 닿아야 합니다. 기계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뭔 소리야. 나더러 이 복사기의 심정을 알아달란 거야? 복사기한테 공감이라도 하라고?”
「사물의 존재를 개념화시키는 것이 아닌, 그저 그것이 거기에 ‘있다’라는 것을 인정해 주십시오.」
아리송한 소리였다.
물질과의 교감? 존재를 개념화하지 말라?
“……그러니까, 재단을 하려 들지 말고, 존재 자체를 내 안에 받아들이라, 뭐 그런 느낌인가?”
「그렇습니다.」
여전히 아리송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쩐지 알 것만 같은 느낌도 들었다.
“…….”
바보짓 좀 한다고 손해 볼 건 없었다. 나는 속는 셈 치고 로봇의 잔소리를 들어 보기로 했다.
이면지를 스캐너 안에 넣고 복사 버튼을 눌렀다. 곧 분당 25매의 속도로 복사가 시작됐다.
복사기 위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눈을 감아 생각했다.
―이 복사기는 여기에 있다.
둥실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마력의 불꽃이 저절로 일렁였다.
―너는 여기에 있다.
피부를 타고 나른한 대답이 전해져 왔다.
그제야 비로소 그것이 내 마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있구나.
애칭을 부르듯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능 강화.”
그러자.
당연히 일어나는 기적처럼.
분당 200매는 가뿐히 넘을 속도로, 복사된 종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 오오!”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게 간단히 성공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됐다! 이야, 고맙다! 깡통 로봇아!”
「…….」
“너 정체가 뭐야? 어? 마법을 왜 이리 잘 알아? 어디 대마법사 저택 청소 로봇 출신이냐? 엉?”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안드로이드는 입을 열었다.
「나니니시마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