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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16화 (16/201)

16화. A Taste of Honey (3)

TV에서 구미호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산골짜기에서 데려온 아주 고운 색시가 오랫동안 지극정성으로 몸 아픈 서방님을 보살펴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 색시는 서방님의 간을 빼먹으려 사람으로 둔갑한 구미호였다는 무서운 이야기.

“으으음, 그나저나 어떡하지……. 사람 몸을 해부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앗, 그렇지. 메디컬 드라마 보면서 대충 따라 하면 되려나?”

내가 그걸 실제로 겪게 될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저기요! ‘닥터후’가 의사 나오는 드라마 맞죠?”

“…….”

“흐음, 대답이 없으시네. 혹시 아직도 졸리신가요? 그러면 차라리 그냥 푹 주무시고 계시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마취는 안 해드릴 거니까.”

설명이 굳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다.

저 엘프는 지금 내 심장을 노리고 있다.

[ 당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의 심장을 물려받았습니다. ]

게임 속에 빠지기 직전의 어슴푸레한 기억.

아까 전에 대마법사의 심장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했었지. 그건 아마 내 얘기가 맞을 거다.

[ 몸에서 넘쳐흐르는 마력은 고갈될 일이 없습니다. 덕분에 당신은 어스테이트의 모든 마법사들이 탐내는 연료 탱크이기도 합니다. ]

위대한 마법사의 심장.

모든 마법사들이 탐내는 연료 탱크.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걸어 다니는 무한동력 발전기라 이거지. 노려지는 게 당연한.

“제기랄.”

안일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사람 많은 곳에서 만난다면 안전할 거라 생각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다 해도, 전에 싸운 스크랩몽크급의 강자만 아니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오만방자한 과대평가. 더닝 크루거 이펙트.

재난영화 몇 편 봤다고 운석이 떨어지는 뒷동산에 으스대며 나들이를 나간 꼴이다.

“무슨 생각 해요?”

후회하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그때.

칠흑 속에서 초록색 불꽃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섬뜩―.

뒷목에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았다.

무언가 온다는 느낌은 없었다.

단지 육감이 아우성쳤을 뿐이다.

‘피해, 병신아!’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혀 당겼다.

서걱―. 바로 그 찰나의 순간, 녹색 레이저 같은 칼날이 왼쪽 광대뼈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방금 그걸 피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머리가 반으로 갈렸을 거다.

“설마,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

나는 왼뺨에 새겨진 상처를 검지로 내리훑었다. 어릿한 통증에 이어 붉은 핏물이 묻어났다.

공격을 맞기 직전, 분명 강화 마법을 썼다.

그런데도 이 정도 상처다. 제법 깊게 피부를 긁혔다. 조금만 늦었어도 뼈가 깎였을지도 모른다.

“저는 웬만하면 머리만 노릴 건데요. 피할 거면 되도록 심장 근처에 안 맞게 조심해 줄래요?”

상대와의 거리는 30미터 남짓.

좁히기엔 애매한 거리다. 방금 같은 원거리 공격이 계속 날아오면 다가가기도 어렵다. 뭣보다 정직하게 다가가 봤자 과녁의 크기만 늘려줄 뿐.

역시,

선택할 수 있는 답은 하나다.

―도망치자.

나는 강화 마법을 두른 발과 다리로 반대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가려 했다.

“도망치려구요?”

허나 바로 그러기 직전.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모랫바닥에서 빛을 뿜는 문양을 보자마자, 뭔가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안 될걸요.”

촤아악―!

땅에서 솟구쳐 나온 초록빛의 줄기가 두 발목과 종아리를 칭칭 감아 묶었다.

“……!?”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발바닥까지 땅에 달라붙어, 아무리 몸부림쳐도 음식점의 바람 인형처럼 상체만 버둥댈 뿐이었다.

“급하게 오느라 그 정도 함정밖에 준비 못 하긴 했지만, 충분한 것 같네요.”

비너스는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다.

“이 주변은 보시다시피 아무것도 없거든요. 30년쯤 전인가, 근방 일대가 도시근교개발사업 부지로 지정됐다가, 공사 출발 직전에 게이트가 열려 버려서 그만 개발이 취소됐다나 봐요.”

“…….”

“도로랑 건물 올리려고 나무건 풀이건 싹 다 밀어놔서, 200제곱킬로미터 땅이 죄다 민둥산에 황무지 꼴이랍니다. 그나마 원래 있었던 작은 기숙학교 건물이랑 운동장만 이렇게 남아 있죠.”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대략 이러했다.

도망칠 테면 도망쳐 봐라. 근방 40제곱킬로미터 이내에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아나갈 방법은― 없다.

“유진 씨는 헤까닥 상태였어가지고 모르겠지만, 도로도 다 막혀 있어서 저 아랫길에 차 받쳐 두고 산등성이 따라 걸어왔어요. 덕분에 힘들어 죽겠다구요, 진짜. 이게 뭔 고생이야.”

발은 묶였고, 나는 무력하다.

한 번 더 아까 전과 같은 공격이 날아든다면, 틀림없이 당한다. 간단하게도 죽어 버린다.

정녕 방법은 없는 걸까?

“아무튼, 잡담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생각하자.

내가 가진 카드를.

뭐가 있지?

나는 뭘 할 수 있지?

….

….

안타깝게도,

더 떠오르는 게 없다.

―강화 마법.

꼴랑 이거 하나다.

정말로 이게 전부다.

쓸 수 있는 것은 강화 마법과,

쓰레기 같은 보라색 마력뿐이다.

“위력도 꽝. 유지력도 꽝. 호환성도 꽝.”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자색 마력은 최악의 색채라고.

“그나마 괜찮은 특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런 말도 했다.

날 달래려는 듯한 위로의 말을.

“어디든 잘 깃든다.”

카페에서 그녀에게 배운 것들.

눈앞의 적이 내게 알려준 것들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얘기 나눠서 즐거웠어요. 유진 씨.”

뒷목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다시 한번 육감이 소리쳤다. 어서 피하라고.

온다.

확실히 느껴진다.

마법 칼날이 내 목을 노리고 날아든다.

피해야 한다. 지금 피하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

비너스는 생각했다.

그런대로 완벽한 계획이었노라고.

‘사실, 운이 좋긴 했지.’

우연히 발견한 폭발.

혹시나 싶어 마련한 함정.

고맙게도 나타나 준 멍청이.

럭키세븐의 삼위일체.

그야말로 굴러 들어온 잭팟이었다.

‘양심에 찔릴 정도라니까, 정말.’

햇병아리일 줄은 알고 있었다.

흑마법사가 되어 있던 건 예상외였지만, 그 점은 작은 변수조차 되지 못했다. 유진이란 놈은 갓 말을 깨우친 두 살배기보다도 아는 게 없었다.

‘얻었단 힘도 기껏 강화 마법. <부름>도 쓰지 못하는 흑마법사 따위, 무서울 것도 없지.’

계획은 문제없이 진행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사천리로.

‘하여튼, 이제 마무리만 하면 돼.’

<파리지옥>으로 속박한 상대에게 <펄스 블레이드>를 맞혀서 죽인다.

이보다 더 쉬운 일이 또 있을까.

‘잘 가요, 유진 씨.’

그냥 죽이기엔 꽤 괜찮은 남자기는 했다.

심장을 뽑아내도 살아있어 준다면 좋으련만.

비너스는 목표를 향해 완드를 뻗었다.

그러고서는 곧장 <펄스 블레이드>의 술식을 영창 없이 전개했다.

완드 끝에서 녹색 빛이 반짝였고,

이내 그녀의 마력은 둥근 칼날이 되었다.

슈욱―!

칼날은 초음속에 가까운 속력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피하지 못할 것이다. 정수리부터 빗장뼈 아래까지 가로세로로 깊숙하게, 아슬아슬 심장에 닿지 않을 정도의 두께로 발사했으니까.

칼날이 유진의 머리를 쪼개기 직전.

파앙―!

상당히 어색한 효과음이 들렸다.

마치 칼날이 무언가에 막힌 듯한 소리였다.

‘……?’

비너스는 유진이 있는 곳을 살폈다.

보인 것은, 둥글게 피어난 자색의 방패.

‘으응?’

유진은 죽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뭐야?’

그녀는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날린 <펄스 블레이드>를, 유진이 막아낸 것이다. 그것도 마법을 사용해서.

‘방호 마법……?’

<마나 배리어>.

순수한 마력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방어막을 술사 주위에 생성하는 마법이다.

‘아니, 무슨 소리. 그럴 리가 없잖아.’

<마나 배리어>는 유지력에 특화된 녹색 마력이나 강도에 특화된 갈색 마력을 제외하곤 그다지 궁합과 실용성이 좋지 못했다.

당연히, 유지력과 강도가 모든 색채 중에 최악을 달리는 자색 마력으로 사용할 것은 못 됐다.

‘저건 <마나 배리어> 같은 게 아니야.’

방호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녀석은 강화 마법밖에 쓰지 못하는 얼뜨기.

‘그래, 저건…….’

비너스는 곧 눈치챘다.

유진이 쓴 마법의 정체를.

―공기다.

공기의 강도를 강화 마법으로 강화했다.

단단해진 공기의 벽으로 공격을 막은 것이다.

‘아핫, 내가 가르쳐준 걸 벌써 써먹는 거야?’

그냥 대충 강화만 한 것도 아니었다.

금속 가루를 첨가해 경도를 늘린 벽돌처럼, 공기에 마력을 섞어 보다 효율적으로 굳혔다.

‘초보자의 발상치곤 나쁘지 않아.’

그 응용력은 확실히 감탄사가 나왔다.

‘하지만―.’

겨우 딱 그 정도뿐.

감탄 이상의 감상은 없었다.

‘공기를 굳혀 봤자 공기일 뿐이지.’

비너스는 완드의 마나 출력을 높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펄스 블레이드>를 쏘았다.

터엉―!

칼날이 공기의 벽에 부딪혀 튕겨졌다.

허나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위태로운 소리가 났다. 마치 자동차 유리에 철구가 부딪힌 듯한.

비너스는 또다시 <펄스 블레이드>를 날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칼날을 막아낼 때마다, 공기의 벽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

서걱―. 칼날은 결국 공기의 벽을 뚫어 가르고, 유진의 오른쪽 쇄골 윗부분을 베었다.

“큭!”

피가 솟구쳤다. 유진은 어깨를 붙잡았다.

“임기응변은 좋았어요.”

“…….”

“물론, 의미는 없었지만요.”

비너스는 다시 <펄스 블레이드>를 장전했다.

공기의 벽을 뚫기에 충분하면서도, 심장을 다치지 않게 할 정도의 출력으로.

‘……끝인가.’

유진은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승산은 없었다. 쪼렙 똥망캐로 별것도 아닌 스킬 하나 익혔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래,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이제 남아 있는 다른 수는 없다.

‘…….’

정말로, 그럴까?

두근―.

심장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몸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의 심장이 들어 있다고 한다.

마르지 않는 샘. 고갈될 일이 없는 마력.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마법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이때까지,

유진은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이었다.

저지를 셈이라면, 지금밖에 없었다.

유진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에 오른손을 가져다 댔다.

두근―.

무던히 울리는 무한의 고동.

끄집어낼 각오는 되어 있었다.

가슴을 움켜쥔 유진의 주먹 틈으로,

작은 불꽃이 타닥거리며 튀기 시작했다.

‘더.’

보랏빛 화염은 점점 몸집을 불려,

이내 유진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더.’

10미터. 30미터. 60미터. 100미터.

불길은 점차 번져나가 지천에 일었다.

그러나 한참 모자랐다.

천지를 집어삼키기에는.

‘더!’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우주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번쩍이는 광염이 토네이도처럼 휘몰아쳤다.

이윽고―

자색 불꽃의 바다가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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