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1화 (1/201)

1화. Prologue

게임 얘기를 해보자.

「……방금 놈이 마지막인가.」

<사이버판타지: 드래곤즈 섀도우>.

동명의 TRPG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PC용 롤플레잉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데, 출시된 지 벌써 20년이 훨씬 넘은 고전게임이다.

「빌어먹을 카이젠 자식들, 드래곤 빌리지까지 쳐들어와서 훼방을 놓을 줄이야.」

「졸지에 2차 중일전쟁을 치러 버렸으니, 원. 우린 꼽사리 낀 꼴이었지만 말이지.」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애매한 게임성과 괴악한 최적화 탓에 똥겜으로 몰렸으나, 최근 들어 재평가를 받게 된 비운의 명작.

사이버펑크와 정통 판타지 장르의 융합이라는, 지금 보기에도 꽤나 참신한 조합을 시도한 선구자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젠장, 총알이 딱 한 발 남았었잖아.」

「까딱했으면 진짜로 여기서 그냥 뒤질 뻔했구만 그래. 휘유! 살아있는 게 기적이야.」

「자네는 어떤가? 다친 곳은 없나?」

[ 멀쩡해. ] ◀

[ 몇 군데 좀 쑤시긴 하네. ]

[ (죽은 척을 한다.) ]

「크하핫! 역시나 터프하군!」

「그동안 자네가 홀몸으로 페르골리치 패밀리를 절멸시켰단 얘기, 그거 그냥 허세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부터는 믿기로 했네.」

「난 내가 본 것만 믿거든!」

게임의 배경은 근미래. 과학과 마법이 공존하는 가상의 국가 어스테이트Astate.

이곳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직접 커스터마이즈한 캐릭터로 자유롭게 살아가게 된다.

메인 퀘스트도 없고,

도전과제나 엔딩도 없다.

말 그대로 ‘자유’다.

「하여간에 고맙네, 유클리드.」

「자네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

+ 경험치

+ 덕망

+++ 관계

(도살자 잭 린든: 친분도 MAX)

(카르마 포인트 10 획득)

256색상 도트 그래픽의 쿼터뷰.

정감 넘치는 16비트 모노 사운드.

또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버그들.

즐길 게임이 그야말로 넘쳐나는 요즘 같은 때, 이런 시대에 뒤처진 구닥다리 게임을 내가 ‘인생게임’으로 꼽는 이유는 단순하다.

「참, 잊을 뻔했군.」

「이번 일의 보수일세. 원래는 반반이지만, 자네 쪽 주머니에 좀 더 챙겨 넣었어.」

「앞으로도 종종 같이 일하자고.」

[ 고마워. ]

[ 좀만 더 주면 안 될까? ]

[ 그깟 푼돈은 필요 없어. ] ◀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것은 바로―

극한의 자유도.

[ 농담이야. 빨리 내 돈 내놔. ]

[ 네놈 몫까지 내가 가져야겠다. ] ◀

「…….」

「자네, 지금 무슨……?」

[ 죽기 싫으면 전부 내놓으시지. ]

[ (재빨리 총을 쏜다.) <민첩: 91> ] ◀

[ 성공 확률: 99% ]

[ 판정 결과: 성공 ]

[ 탕! 총성이 울려 퍼졌다.]

[ 도살자 잭 린든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총알이 그의 이마를 뚫고 지나가자, 이내 그의 몸뚱이가 균형 잃은 마네킹처럼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

[ 당신은 도살자 잭 린든의 주머니에서 떨어져 나온 돈을 챙겼다. 주검을 뒤져 더 챙길 것이 있는지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

+ 경험치

+ 악명

+ 200,000 크레딧

(바이스 포인트 25 획득)

롤플레잉 게임으로서 최대의 장점.

다양한 상황에서 파생되는 무한한 선택지,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압도적 재미.

선택의 중요성과 다채로움 등을 강조한 게임은 수없이 존재하지만, 여태껏 <사이버판타지>만큼이나 ‘자유로운 행동의 재미’를 기가 막히게 표현한 게임은 단연코 없었다.

물론― 이 게임의 그러한 진가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게임 용량의 100배에 달하는 패치와 모드들을 ~숱한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설치해줄 필요가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실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도 바로 그 ‘시행착오’의 과정 중 하나다.

“어디, 치명타 인챈트 샷건이…….”

나는 내 캐릭터가 방금 죽인 오크 동료(였던 것)의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있어야 할 아이템이 정상적으로 존재함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마지막 버그도 해결이다.

“자, 그럼 이제 포팅 마저 끝내고.”

게임을 종료하고, 바탕화면에서 폴더와 파일을 다수 열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압축 해제한 파일들을 차례로 옮긴 다음, 편집 파일로 레지스트리 경로를 수정.

“파이널 체크.”

그러고 나서,

게임 런처를 실행.

“…….”

위이잉―. 가볍게 팬이 돌아가는 소리.

검은 화면이 몇 초간 이어지다가, 이윽고 메인 화면에 진입.

“여기까진 좋아…….”

<사이버판타지>의 모든 정식 확장팩과 유저 모드 등을 집대성한 완전 통합 모드팩.

20년 지난 똥겜을 GOTY급 갓겜으로 탈바꿈시켜줄지도 모르는 신의 패치.

“제발 돼라, 제발…….”

단 한 번도 실행에 성공한 적이 없다.

게임 시작 버튼만 누르면 튕겼다. 항상.

과연 이번엔 다를까?

심호흡을 하고 마우스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게임 시작을― 클릭.

“…….”

검은 화면이 이어졌다.

10초. 20초. 30초.

1분이 되기 직전.

“……!”

반갑기 짝이 없는 로딩 표시.

마침내 고대하던 광경이 펼쳐졌다.

[ launch CharGen.exe ]

[ 캐릭터 생성을 시작합니다. ]

그것은 캐릭터 생성기 모드를 설치했을 경우에 뜨게 되는 시스템 메시지.

이게 떴다는 것은 즉,

게임 시작에 성공했다는 의미.

“됐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서 쾌재를 불렀다.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가 3개월 내내 퇴근하자마자 세 시간씩 컴퓨터를 붙잡고 살아온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사이버판타지>의 최종 진화 형태가, 지금 여기에 있다!

[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 _ ]

당연하지만 캐릭터에 무슨 이름을 지어줄지 따위를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 유진연_ ]

대충 본명을 적고 확인 버튼을 클릭.

외형 설정 스킵. 스토리 설정 스킵. 스탯까지 전부 랜덤으로 돌려 버렸다.

[ 캐릭터 생성 완료 ]

그 결과.

꽤나 조잡한 캐릭터가 탄생했다.

< 프로필 >

이름: 유진연

종족: 인간

성별: 남성

나이: 30

직업: 마법사

출신: 시에라시티

< 당신의 이야기 / 고유 개성 >

1. 악독한 범죄자

당신은 전과자로 시작합니다.

주변에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족? 친구? 그런 게 있겠나요?

- 초기 악명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 카르마 포인트에 페널티를 받습니다.

- 바이스 포인트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2. 사회의 톱니바퀴

당신은 회사의 충직한 일꾼입니다.

혹은 노예거나, 어쩌면 개일 수도 있겠죠. 어쨌든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옵니다. 제때제때 출근을 해준다면요.

- 시작 자금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 초기 사회성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 스트레스 판정에 페널티를 받습니다.

3. 마르지 않는 샘

당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의 심장을 물려받았습니다.

몸에서 넘쳐흐르는 마력은 고갈될 일이 없습니다. 덕분에 당신은 어스테이트의 모든 마법사들이 탐내는 연료 탱크이기도 합니다.

- MP 보유량에 특대 보너스를 받습니다.

4. 끔찍한 마술의 소양

당신은 마법에 재능이 없습니다.

만약 마법사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면, 차라리 대통령 당선이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 모든 마법/마도/정령술/연금술 관련 스킬 숙련도에 특대 페널티를 받습니다.

[ 예상 난이도: 매우 어려움 ]

“허.”

나는 한참을 벙쪘다.

범죄자에다 회사원 스타트도 이 게임에서는 그리 매력적인 컨셉이 아니었지만, 그것보다도 어이가 없었던 것은 나머지 개성.

직업이 마법사인데 마법에 재능이 없어?

그런 주제에 MP는 또 만땅이라고?

“이게 무슨 개똥캐냐…….”

캐릭터가 이런 꼬락서니라면 당장 게임이 고난도인 걸 떠나서 아예 플레이하는 재미 자체가 없을 게 뻔했다.

그냥 게임을 껐다 켜서 캐릭터를 새로 다시 만드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터였다.

그렇게 게임을 강제로 종료하려던 찰나.

“아니. 잠깐만.”

순간 멈칫했다.

다시 시작한다고 제대로 실행이 될까?

게임이 튕기지 않았던 것은 기적.

아무런 보장도 없이 무턱대고 재실행을 감행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모험이었다.

“…….”

나는 알트 키를 누른 상태로 정지했다.

여기서 F4까지 눌렀다간 돌이킬 수 없다.

그리하여―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그냥 하자.”

똥캐 플레이는 그다지 선호하는 바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일단 이 캐릭터로 테스트 겸 플레이를 해보고, 게임 구동 상태가 안정적이라 판단되면 그때 새로 시작하면 될 일이니까.

뭐 어쨌거나,

이제는 즐길 일만 남은 거다.

[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나는 주말 내내 컴퓨터 앞에서 환상적인 48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예 ] ◀

[ 아니요 ]

멀쩡한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상영 도중에 필름이 끊어진 영사기처럼, 혹은 로딩을 기다리는 게임 화면처럼, 문득 시야의 모든 부분이 검은색으로 가득해졌다.

그러다 뚝, 어느 순간에 의식이 끊겼다.

그리고―

이상한 곳에서 눈을 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