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49. 스베아 왕 (6)
왕은 전장을 보았다.
명성 높은 장군과 군대가 새벽 안개 너머로 북소리에 맞춰 질서정연하게 전장을 채워 나갔다.
지형은 이쪽이 유리하지만, 적의 눈엔 이쪽이 누리는 지형의 유리함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왕은 진중을 돌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부족한 곳이 있으면 보강이나 증원을 요구했다.
막강하고 수적 우세까지 가진 적을 상대로도 병사들은 두려움이 없었다.
다만 제국 본토 내에서 모집한 병사들은 예외다.
그들은 전투가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떨고 있었고, 그들이 패주할 때 지나갈 뒤쪽의 지형을 수시로 살폈다.
함께 온 주술사들이 점을 쳤다.
하얀 말 한 마리가 산 채로 목이 잘리고 배가 갈라져 내장을 바닥에 쏟았다.
주술사들은 그 내장의 흩어진 형태를 보고 길흉화복을 짐작했다.
그 모습을 본 왕은 얼굴을 찌푸렸다.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신앙이다.
그는 토착신앙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병사 다수가 여전히 고대의 믿음을 신봉하고 있는 이른바 북부인이기에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이런 야만적인 행사는 필요하다.
수염과 머리가 희끗하게 세고 세월의 주름이 얼굴이 새겨졌건만 그다지 지혜롭지 않아 보이는 원로 주술사가 왕에게 말했다.
“혼령들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겁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중얼거렸다.
“승리를 가지고 오는 건 우리들 인간들이지 혼령도 신도 아니다.”
무신론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뛰어난 학식을 가진 사람도 신앙을 가졌고,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어리석고 불쌍한 존재로 보았다.
왕 또한 호라의 신자다.
아주 맹렬한 신앙을 가진 건 아니지만 왕은 자신의 믿음의 형태를 기꺼이 수호하고 그 형태를 해하려 드는 자에게 언제든지 검을 빼 들 수 있는 사람이다.
저기 신앙의 파괴자들이 온다.
왕은 적들의 진형을 관찰했다.
“아무래도 하벨이 우리를 얕보고 있는 모양이군.”
왕이 좌우에게 명했다.
“상승 무패인 장군의 경력에 흠집 한 줄을 만들어 줄 시기가 온 것 같다. 모두 진형을 지켜라.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저 하벨의 군대는 물러갈 것이다.”
참모가 왕이 전에 요구했던 카렐리아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투의 전황도를 왕에게 올렸다.
왕은 전황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카렐리아 쪽이 지금보다 훨씬 하벨에겐 불리한 지형처럼 보이는군. 그런 전투도 승리했으니, 아무리 노회한 늙은이라고 해도 자신감이 붙길 마련이겠지.”
왕은 자신의 말과 달리 딱히 상대방의 전략이나 생각을 중요한 척도로 여기지 않는다.
그가 중요시하는 건 오로지 자신의 군대였다.
전쟁이라는 건 결국 강 대 강의 두 세력이 부딪치는 것.
더 강한 군대를 가진 쪽이 승리한다.
무엇이 더 강한 군대를 만드냐에 대한 질문은 군사학이라는 학문에 대답을 유보해야겠지만, 적어도 왕은 숫자나 경험 이상으로 잘 조직되고 새로운 개념으로 훈련된 군대가 더 뛰어난 군대라고 생각했다.
이제 자신이 오랫동안 훈련시키고 북방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군대를 저 명성 높은 제국군을 상대로 시험해 볼 때가 왔다.
“전쟁을 시작한다.”
왕이 손을 내저었다.
기다렸다는 듯 중앙의 대포 무리가 다가오는 적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펑! 펑! 펑!
하얀 포연을 꽃처럼 피어오르는 가운데 적진의 대포도 불을 뿜었다.
빌헬름스하벤 전투라고 기록될, 길고 지루한 전투의 시작이다.
* * *
전쟁 중인 지역은 황폐해진다.
단지 그곳이 전장이 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군대라는 강대한 폭력의 소용돌이는 지나가는 곳을 글자 그대로 파괴한다.
그 강도는 그 지역이 우군의 지역인가, 아니면 병사 다수의 고향인가, 병사들이 잘 조직되고 급료를 받고 있는가 등에 따라 갈리겠지만, 기율이 잡히고 우군 지역의 병사라고 해도 행군로 상의 마을과 도시엔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군대가 끌고 다니는 가장 대표적인 재앙은 역병이다.
그들이 머무는 곳마다 티푸스, 발진, 매독이 기승을 부린다.
이미 과거에 신의 회초리라는 무시무시한 역병으로 거의 선제후국 전체가 파멸할 위기에 처했던 노르드마르크는 그보다는 병세가 약하지만, 충분히 삶을 파괴할 정도의 역병에 재차 시달렸다.
심지어 역병과 함께 기근이 들어 노르드마르크 전역은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병사들과 장교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현지인에게 황제의 옆얼굴이 찍힌 탈러 은화를 내밀어 거래를 시도했으나 식량이 없는 주민들은 그들에게 줄 것이 없었다.
병사들은 난폭하다.
그들의 배를 굶기느니 약간의 폭력을 이용해 부담을 주민에게 전가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일선 장교는 알고 있다.
약탈에 가까운 구매가 이어졌고, 식량을 뺏긴 주민들은 들판과 숲으로 내쫓겼다.
마를로네가 쌍둥이들과 함께 들어선 대로도 그런 땅이었다.
하벨의 군대가 이 땅을 지나갔다.
이번 전쟁에선 중립을 표방하지만 공공연하게 신교 쪽에 붙었다는 소문이 도는 노르드마르크 상대로 하벨의 군대가 그리 깊은 너그러움을 보여 줄 이유는 없었다.
당장 노르드마르크가 그들이 자랑하는 빙해 함대를 출동시켜 해상에서 스베아 왕의 함대를 막아섰다면 그들이 이 척박한 숲속에 올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마를로네는 눈 앞에 펼쳐진 전쟁의 참상을 보고 약간의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부쩍 말수가 적어진 그녀를 보고 루가 물었다.
“전장은 전에도 가지 않았어?”
“그렇긴 하지.”
마를로네가 바닥에 쓰러진 채 백골로 변해 가는 아이를 안은 모친의 시신을 보며 답했다.
“하지만 그때는 폐하 옆에 있었지.”
“호위였었지?”
“응. 만슈타인이라는 사람이 못된 짓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땐 계절도 계절이고 황제 폐하가 가는 길은 어떻게든 정돈해 두길 마련이니까.”
“최소한 시체라도 치워 둔다는 이야기?”
어깨를 나란히 하던 훤칠한 기가 불쑥 물었다.
“……아마도 그렇겠지.”
황제 옆에서 보는 전장의 뒤편과 평범한 사람의 눈에서 보는 전장의 뒤편이 같을 수는 없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전장의 뒤편은 비참하고 잔혹하고 덧없었다.
“약탈도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세계 곳곳을 누볐다던데 전장에 와 본 적은 그리 많지 않았던 모양이지?”
“응. 내가 어릴 때야 제국엔 전쟁도 없었고, 할아버지는 전쟁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을 피해 다녔어. 전쟁이 벌어진 곳엔 전쟁 신의 저주가 흐른다나?”
“전쟁 신의 저주?”
“역병이나 기근 같은 거. 그리고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해로운 공기도 전장 주변에서 스멀스멀 피어난다고 말했었어.”
“해로운 공기만은 아닌 거 같네.”
기가 차갑게 웃으며 피스톨을 뽑아 들었다.
숲 너머에 그림자가 있다.
아마도 강도, 혹은 약탈자이리라.
이 전장에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결국 같은 악행을 타인에게 전가할 수밖에 없는.
그렇다고 이쪽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폭력엔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
탕! 탕!
피스톨이 불을 뿜고 검이 날카롭게 호를 그렸다.
기세등등한 강도들은 순식간에 다섯 명을 잃고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마를로네는 팔이 잘린 채 죽어 가는 사내를 보다 자기도 모르게 사내의 심장에 검을 꽂았다.
루가 쳐다보다 그녀가 답했다.
“어차피 고통받다 죽어 가겠지.”
“그렇다고 해도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지.”
마를로네는 심심하게 답하며 자신의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녀의 행동은 자신의 조부를 닮아 있었다.
그다지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조금만 더 가면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여름 궁전이 나와.”
“여름 궁전?”
“선제후가 병을 핑계로 거기에 있거든.”
“한스 징펠만 님은 거기서 할아버지를 봤다는 거지?”
확실한 건 아니다.
없을 수도 있다.
한스 징펠만이 베르크 란으로 추정되는 사내를 목격한 건 지금으로부터 한 달도 전의 이야기니.
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이 어둠 속에 던져진 마를로네에겐 귀중한 정보다.
막연하게 구빈원을 뒤지는 것보다는 이쪽이 유의미한 희망이라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늘 그렇듯 절반의 기대와 절반의 실망을 대비하며 마를로네는 황폐화된 전장의 뒷길을 걸어 나갔다.
멀리서 은은한 포성이 울렸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나 봐.”
기가 말했다.
“스베아 왕?”
“아마도.”
“왕이 물러나면 이 전쟁이 끝날까?”
그 물음엔 루도 기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만이 어색한 정적을 메꿀 뿐이었다.
* * *
1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잘 꾸며진 방에서 울피아나와 단둘이 차를 마실 날이 올 것이라고는.
이제는 다르다.
울피아나는 과거에 이어 다시금 루페르트의 배필이 될 여자다.
루페르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내가 이전에 감당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이렇게 나만을 바라봐 주고 지극정성인 그녀를 감싸 안을 정도로 내 배포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이런 감정에 이르기까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루페르트는 과거의 망령과 자신의 트라우마와 싸워야 했다.
그의 고통과 아픈 기억은 울피아나의 한결같은 사모와 열정적이고 따뜻한 배려 속에 눈이 녹듯이 녹아 갔다.
그 안에서 루페르트는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울피아나의 남편이 되리라 마음을 먹었다.
혹시 아는가.
그와 울피아나도 루돌프와 안젤리나처럼 천상의 배필처럼 남게 될지.
오히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다.
루페르트는 모든 사고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려놓고 울피아나와의 시간을 즐겼다.
그녀가 찻잔을 들며 그윽한 눈으로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녀는 아름답다.
루페르트 옆엔 여러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지만, 그런 여성들을 모두 제칠 정도의 독특하고 마성적인 매력이 있었다.
“폐하는 어떻게 그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으세요?”
울피아나가 꿈꾸는 듯한 눈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제가 폐하를 본격적으로 의식하던 때는 네. 그 치열하면서도 끔찍했던 대리 결투의 날이었어요. 그 늙은 도펠죌트너는 은 가면을 쓴 도펠죌트너에게 속절없이 밀리고 무너졌죠. 그의 팔이 부러져서 반쯤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흔들거리는 것도 보았어요.”
“아, 그때 말입니까?”
“네. 모두가 그 사람의 패배를 점쳤죠. 저도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폐하를 보았죠.”
먼 곳을 보던 울피아나가 열렬한 사모를 담아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셨어요. 어쩜 저렇게 의연할 수 있을까. 그때 저는 생각했죠. 혹 폐하가 황위를 잃게 되더라도 이런 사람이라면 저의 인생을 맡길 수 있겠다고.”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폐하는…….”
울피아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다급한 표정의 장교가 루페르트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군사 쪽 관련 일을 맡은 사내다.
그가 왔다는 건 좋지 않은 징조.
루페르트는 짐짓 태연함을 유지하며 장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폐하. 두 개의 소식이 있습니다.”
“그래?”
“네. 하나는 카렐리아 쪽에서 보낸 전갈입니다.”
울피아나의 시선이 옆에서 느껴진다.
자리를 떠날까 싶었지만 여기서 떠나는 것도 곧 황후가 될 사람에게 예의는 아닌지라 루페르트는 자리를 지킨 채 나머지 보고를 들었다.
“비스투라를 추적했던 기병대의 소식이 끊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