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42. 업보 (2)
동굴 바깥엔 삶의 흔적이 없다.
흔해 빠진 술통이나 상자 같은 것도 없다.
겉만 보면 동굴 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비어 있는 곳이다.
곰이나 다른 야생의 짐승들이나 겨우 어슬렁거릴까.
노르드마르크의 야생은 거칠어 남부에 있는 오크 같은 열등종은 살아갈 수 없다.
야생의 힘이 더 강하기에 어설프게 인간을 흉내 내는 것들은 먹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조차 농락하는 짧은 머리 곰이 득실거리는 숲속에서 홀로 산다는 건 용기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혜와 힘, 그리고 노르드마르크 사람들이 암암리에 중얼거리듯 숲신의 가호가 있어야 한다.
약초사들은 숲과 사냥의 여신인 다르타니아의 사도라고들 한다.
실제로 약초사 중에 그들의 신앙을 밝힌 사람은 없지만, 사람들은 입 모아 말한다.
약한 아녀자가 혼자나, 제자랑 둘이서 저 거친 숲속에서 살 수 있는 건 숲신의 가호가 있기에 가능한 기적이라고.
하지만 노르드마르크의 사냥꾼인 한스 징펠만은 다르게 말할 것이다.
“겉만 보면 야생 동굴처럼 보이지. 허나 코를 이용해라. 우리처럼 철과 불을 만지는 사람들은 쇠와 화약의 냄새를 항시 몸에 지니고 있기에 코를 사용하는 건 야생의 짐승만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분별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여차할 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우리 자신의 용기와 육신이니.”
얼핏 보면 스승이 제자에게 하는 평범한 덕담처럼 보이지만, 지겔슈타트는 그 말의 모서리마다 이단의 발상이 숨겨져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여차할 때 의지할 수 있는 게 자신이라니.
호라교의 사제들은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인간이 의지해야 할 최후의 보루는 호라에 대한 신앙이라고 답할 것이고 그 답을 타인에게 강요할 것이다.
지겔슈타트는 마법사다.
그도 호라를 섬기는 신자지만, 저 위대한 오각의 마법사조차 근원을 얼버무리는 정체불명의 힘을 근간으로 삼는 집단에 속한 만큼 그 신앙심의 깊이는 다른 평범한 제국 시민의 평균보다는 낮다.
그래서 그는 한스 징펠만의 이단적인 사고방식을 알면서도 별다른 티를 내진 않았다.
사실 신앙심이란 게 이른바 문필가 위주로 빠르게 소멸하고 있다는 건 지겔슈타트 같은 먹물깨나 먹은 사람들이라면 어렴풋이 아는 사실이다.
아직이야 문필가 집단이란 게 귀족이나 군주를 아부하는 송사나 찬양시를 쓰는, 빌붙어 기생하는 작은 사람들이지만 모를 일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커진다면 언젠가는 기도에 답하지 않는 호라라는 무심한 신에 대한 신앙 자체가 소멸할지도.
물론 그런 미래가 오려면 몇 번의 세대가 와야겠지만 말이다.
지겔슈타트는 입을 다문 채 한스 징펠만과 제자들이 동굴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다 주위를 한차례 돌아보고는 사냥꾼들의 뒤를 따랐다.
동굴 안은 일견 평범했고 어두웠으나 미세한 냄새가 났다.
한스 징펠만이 동굴 벽에 고정된 나뭇잎을 보았다.
못도 쓰지 않고 인간적인 도구를 쓰지 않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지만 그건 분명히 담쟁이처럼 붙어 있었다.
“보이느냐? 들풀 중에 끈적한 진액을 내뿜는 녀석을 삶아 접착제 삼아 짐승을 물리치는 잎사귀를 붙여 놓았군.”
한스 징펠만이 손짓하자 쌍둥이들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등불을 꺼내고 켜서 어둠을 몰아냈다.
“숲의 노파들의 방식이지.”
동굴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한스 징펠만은 예리한 후각으로 동굴 곳곳에 각양각색의 허브와 들풀, 꽃들을 조합하여 각종 야수와 해충을 멀리하는 기피제로 썼다는 걸 간파했다.
‘오랜만이군.’
숲의 노파라고도 불리는 약초사들은 한스 징펠만의 유년기에 대대적인 박해를 받았다.
그의 여동생의 목숨을 구했던 약초사도 그중 하나였다.
대단히 추한 용모에 눈 하나를 거의 덮는 커다란 종기를 가지고 있었다.
추악한 용모와 달리 노파는 마음씨가 따뜻했는지, 어린 시절의 한스 징펠만에게 설탕으로 만든 사탕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당시의 달콤한 맛은 어른이 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테타우의 수많은 제과점을 둘러봤지만, 그때 맛본 감미로운 단맛은 흘러가 버린 유년기와 더불어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다.
어쩌면 그 단맛이 한스 징펠만으로 하여금 그토록 다르타니아 신앙에 매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여동생의 목숨을 구해 준 노파는 숲신을 상징하는 투박한 사슴 모양의 뼈 펜던트를 걸치고 있었으니까.
그 노파는 화형대 위에서 죽었다.
아니, 어쩌면 화형대에 오르기 전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발끝부터 태우는 업화의 불길 속에서 그녀는 흔한 비명 하나 지르지 않은 채 미동도 없이 타들어 갔으니.
동굴 안에 비로소 미명이 비쳤다.
드디어 사람다운 흔적이 보인다.
도제들이 그 사실을 보고했다.
“마이스터예거. 안에 기척이 있습니다.”
“알고 있다.”
쿰쿰하고 쓴 냄새도 난다.
아마도 커다란 가마솥 안에 뭔가를 부글부글 끓이고 있지 않을까.
수증기가 동굴 천정에 새겨 놓은 흔적을 보며 한스 징펠만은 빛이 드리운 동굴 안쪽에 과감히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거기엔 커다란 가마솥과 수많은 약초와 약병, 짐승의 가죽과 정갈한 가재도구가 있는 아늑한 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녀는 입구 쪽에 서서 침입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꼽추였고 그 옆에 어린 여자아이가 나란히 서서 침입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를 본 순간 한스 징펠만은 의아함을 느꼈다.
전하는 낭설과 달리 상당히 귀여운 용모에 미소가 예쁠 것 같은 아이다.
하지만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총을 든 사냥꾼과 마법사를 바라보는 그 눈은 명백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지? 이 아이는?’
“약초사인가?”
한스 징펠만이 노파에게 물었다.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입이 없나? 왜, 말을 하지 않는가?”
지켜보던 지겔슈타트가 차갑게 말했다.
그는 도펠죌트너를 혐오하던 것처럼 약초사 같은 괴이와 현실에 한 발짝 걸친 사람들을 마찬가지로 혐오했다.
그의 시선은 약병이 놓인 선반을 향했다.
인간의 태아로 추정되는 걸 말려 놓은 것도 있었다.
‘역겹군.’
“사산된 아이입니다.”
노파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추악한 용모와 다르게 그 목소리엔 지혜와 현명함은 물론이고 귀부인에게서 볼법한 기품마저 느껴졌다.
“심지어 기형아라 부모가 불태우려는 걸 가지고 왔지요. 태아는 여러 병에 쓸 수 있습니다. 어차피 죽은 인생, 몇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세상에 나지 않고 떠나가 버린 가련한 영혼엔 몇 안 되는 위안이 되지 않을까요?”
노파가 지겔슈타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지겔슈타트는 코웃음을 치고는 시선을 돌렸다.
노파의 시선이 한스 징펠만을 향했다.
그녀의 깊은 눈은 이곳에 온 이유를 묻고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말하겠소.”
한스 징펠만이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신의 회초리라는 질병을 아시오?”
노파가 피식 웃었다.
쌍둥이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노파의 행동이 심히 무례했기 때문이다.
쌍둥이들의 마음을 읽은 한스 징펠만이 가볍게 손을 내저어 쌍둥이들을 제지했다.
“그대를 해치러 온 게 아니라, 도움을 구하러 왔으니 의견을 듣겠소.”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노파가 물었다.
한스 징펠만은 잠시 망설였다.
그도 모른다.
이 장소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단지 병에 걸리고 눈을 뜨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기억력이 비상한 한스 징펠만에겐 대단히 불쾌하면서도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잠시 후 그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모르겠소.”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거짓말은 한스 징펠만의 천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는 이미 예전에 인생을 놓았고, 관성으로 살아왔다.
루페르트를 만나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근본마저 바꾸고 싶진 않다.
그가 황제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더 크고 짜릿한 모험이 있을 것 같아서 황제와 함께한다고.
황제의 사냥꾼이니 뭐니 하는 직함과 권위는 한스 징펠만 같은 자유인에겐 언제든 훌훌 털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갑자기 이 장소가 머릿속에 있더군.”
노파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나는 신의 회초리를 앓았소.”
한스 징펠만이 말을 이었다.
“그 병에 걸리고도 살아났군요?”
노파가 처음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한스 징펠만은 알 수 없는 야릇한 감정이 내면에서 솟구치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지요.”
가마솥이 있는 방 너머에 굳게 닫힌 문을 가리켰다.
“당신하고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군요.”
그 말을 들은 지겔슈타트가 이의를 제기하려 했지만, 한스 징펠만이 한발 빠르게 뒤를 돌아보며 눈빛과 몸짓으로 양해를 구했다.
“…….”
내키진 않지만 한스 징펠만은 존중받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게다가 황제의 사냥꾼은 오직 황제의 명에만 복종하는 자.
서열만 놓고 보면 대학 조직에 속한 지겔슈타트가 오히려 급이 낮다.
‘어쩔 수 없군.’
과거라면 굽히지 않았을 것이다.
지겔슈타트는 그 천재성만큼이나 오만하고 굽히지 않는 성격으로 악명이 자자했으니.
하지만 몇 번의 모험과 몇 번의 경이가 그의 강한 기를 꺾어 놓았다.
이 세상엔 여전히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렌타이어마르크의 괴물들은 오만한 마법사에게 겸손함을 주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지겔슈타트가 물러섰다.
그의 시선은 노파 옆에 있는 작은 소녀로 향했다.
이제 9살에서 10살 사이일까.
보기 드문 귀여운 아이다.
하지만.
‘음?’
소름이 돋는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저 소녀에겐 인간 같지 않은 무언가가 느껴졌으니.
마법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소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 소녀가 거의 잊어버린 렌타이어마르크의 핏빛 거인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혼자 화내고 혼자 냉소 짓던 마법사가 입을 막은 채 급히 뛰쳐나가는 걸 쌍둥이들은 물끄러미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아이의 시선이 쌍둥이들을 향했다.
한스 징펠만과 지겔슈타트와 달리 쌍둥이 도제는 아이들에게서 어떠한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이름이 뭐니?”
기가 살갑게 대하며 이름을 물었다.
아이가 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짤막하게 대답했다.
“사슴.”
* * *
인쇄소가 귀족의 눈엔 갖가지 하류층이 모이는 잡스러운 작업장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곳에서도 엄격한 위계가 있다.
제일 밑바닥은 견습공이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보름 정도를 근무하다 다른 인쇄소를 전전한다.
대우가 박하고 급료도 짤뿐더러 상위 근로자의 모욕과 폭언을 고스란히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견습공이 인쇄소를 전전하다 경력이 쌓이면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활자판에 글자판을 끼워 넣는 식자공이고, 다른 하나를 대형 롤러로 판화와 활자판을 인쇄하는 인쇄공이다.
이때부터 정식 노동자 취급을 받지만 실상 그들의 처우는 견습공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더럽고 냄새나고 비좁은 숙소에서 잠을 자고 끼니를 간신히 때울 만한 급료에 상위 근로자인 직인과 장인의 폭언을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테타우의 인쇄소에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시면 안 됩니까?”
현재 제국의 인쇄소에선 도펠죌트너를 노동자로 쓰고 있다.
마를로네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항의하는 전직 초인병들 사이에서 직인이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다가, 이내 굴러가는 대형 롤러로 시선을 옮겨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시집이나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