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54화 (154/225)

154화 37. 진창과 도랑 속에서 (1)

“자, 화해의 악수를 하세요.”

여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의 황제와 현재의 황제가 악수를 교환했다.

악수라는 행위는 흔히 협상과 화해로 은유되곤 한다.

하지만 적어도 루페르트에게 있어 이 악수는 적의의 재확인이다.

‘여전히 이 자는 내 제위를 노리고 있다.’

여신이 사라진 후, 티그리트가 남긴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수많은 아이를 빠뜨려 죽였다는 연못 앞에서 티그리트는 자신을 기다리는 미지의 여인을 향해 걸어가며 등을 보인 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목소리로 조롱하듯 말했다.

“그대 앞에 놓인 난관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그대는 아는가? 그런 거지. 쌓이고 쌓인 병폐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손도 발도 쓸 수 없는 마치 화산이 분화하여 모든 걸 뒤덮는 모양새지.”

루페르트는 대꾸는커녕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티그리트는 그런 루페르트를 노려보며 은근히 말했다.

“난 여전히 그대의 편이야. 그대가 원한다면 기꺼이 그대의 편이 되어 드리지.”

잔잔한 비웃음을 흘리며 티그리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 루페르트는 강한 현기증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뒤이어 현기증보다 더 지독한 한기가 황제를 엄습했다.

기온이 차갑거나 병에 걸려서 추위를 느끼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 내 편은 단 한 명도 없구나.’

한기의 원인은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다.

의심하지 않으려고 세상을 밝게 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자세를 길렀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실망 속에선 마음의 형태가 찌그러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 숲 너머엔 그가 아주 잘 아는 금발의 여성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폐하? 안색이 안 좋으세요. 무슨 일 있었나요?”

문득 한 그루 전나무가 황제의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변치 않는 불변을 상징하는 나무가.

하지만 그는 전나무는 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아무 일도.”

감정이 무디어져 가는 게 느껴진다.

심장이 강철처럼 굳어지는 감각 또한 느껴진다.

하지만 그 머리 또한 차갑게 식었다.

한기를 머금은 눈은 더 먼 곳을, 더 날카롭게 볼 수 있다.

“가자.”

* * *

루페르트가 티그리트라는 최대의 라이벌과 증오 어린 악수를 교환하며 휴전을 선언하고 있을 때 저지대 전쟁에서는 치명적인 사건이 터졌다.

저지대인들이 자랑하는 5성급 요새-그레나스가 함락됐다.

저지대인들에게 충격을 준 건 그레나스의 전략적 위치도 위치겠지만, 그 도시가 함락된 과정이다.

식량이 떨어지거나 요새 안 시민과 군대의 사기가 떨어져서 항복을 했다면 농담을 좋아하는 저지대인들은 전략적 위치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새의 함락은 순전히 외력에 의해 그것도 불과 3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하드리아멘디쿠스는 난폭한 새가 단단한 알을 부리로 부수고 그 안의 내용물을 취하듯이 요새의 축선과 성벽을 힘으로 찢어발기고 수비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여전히 저지대 연방엔 열 개가 넘는 5성급 요새와 막강한 함대와 부유한 시민들이 있지만 그레나스의 함락은 저지대인에게 불길한 미래를 암시했다.

그레나스가 함락됐다는 건 또 다른 5성급 요새 도시가 언제든지 하드리아멘디쿠스의 손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니.

막강한 요새의 사슬을 앞세워 침략군을 막아 내는 저지대 연방의 방어 정책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대륙의 이목을 집중하기에 충분한 사안이었다.

물론 그 소식은 제국의 황제 루페르트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래?”

최근 황제의 표정과 행동이 지나칠 정도로 정적이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사람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불과 며칠 사이에 황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다정다감하던 성격은 거리를 두려는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변했고, 그 좋아하던 취미 생활도 더 이상 즐기지 않았다.

총신들을 사적으로 부르는 일도 없었다.

이제 루페르트는 모든 관료를 한자리에 모아 그 자리에서만 국사를 논했다.

내심 루페르트의 총신을 시기하던 자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선제후 시절에 알게 되었다고 남들보다 한 단계 윗급으로 취급받던 안젤리나의 3 총신의 위치가 평범한 관료와 다를 바 없는 위치로 떨어졌으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루페르트는 그들의 개인적인 면담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

모든 건 정해진 법도에 따라라.

그것이 루페르트가 주장하는 일관적인 논리였다.

하지만 그 너머엔 오직 이 세계의 비밀을 아는 자만의 권능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누군가와 생각을 교환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필요하지 않는 이상 말이지.’

알고 있었다.

미래를 알고, 알고도 과거로 돌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굳이 누군가와 생각을 나눌 필요는 없다는 걸.

눈에 보이는 원인을 힘으로 찍어 누르고, 그게 실패한다면 그 실패의 원인도 찍어 누르면 그만이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철혈대제.

저 제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군의 방식은 지극히 단순하다는걸.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찍어 누르고, 그럼에도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지면 그 문제의 원인마저 힘으로 짓밟는다.

생각도 고찰도 필요 없다.

그런 단순한 방법만으로 철혈대제는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내가 그런 자보다 못하다고?’

투기장에서 보았던 건 현제라기보다는 한 마리 괴물에 지나지 않았다.

투기장에서 아무리 잘 싸우고 관중의 열광을 얻어도, 그건 황제가 할 일이 아니다.

룸 제국에서도 검투사 황제가 있었다지만 그는 제국의 멸망을 앞당긴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두고 보라지.’

황제가 주관하는 회의에서 관료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다.

그간 3 총신에 가려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관료들이 황제의 눈에 들고자 인생을 건 일생일대의 능력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그 모습을 보고 하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레나스 함락은 신교 세력이 감히 구교라 부리는 정통 호라 교단의 믿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극적인 승리를 안겨다 줄 최고의 호재입니다. 카스무어 왕국이 제국의 서쪽을 든든하게 장악하는 것만으로 부르봉 왕국을 견제하는 건 물론이고, 트라이아와 고어문트, 디터팔츠의 배후를 노릴 수 있으니까요.”

이 관료의 말도 일리는 있다.

강력한 신교 지지 세력인 저지대 연방을 누르는 것만으로 틈만 나면 황제에게 고개를 쳐드는 건방진 선제후들에게 목줄을 채울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총신들의 생각은 달랐다.

“카스무어 왕국이 제국의 동맹국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그들의 지나칠 정도로 빠른 승리는 우리 제국 내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총신 삼인방 중 하나, 베르너의 의견이다.

나머지 두 총신이 그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묻지 않았다.

그가 묻지 않더라도 다른 관료가 알아서 질문을 던지며 논쟁을 유도할 테니.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이에 베르너는 즉답했다.

“저지대 연방이 너무 빠르게 무너진다면 제국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의 신교 세력에게 위기감을 심어 줄 겁니다. 그들이 예상보다 빠르고 단단하게 결집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말을 듣던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쪽이 일리 있는 의견이다.’

허나 맞서는 관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속으로 맞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의견을 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앞으로 뻗어 나가려면 결국 그 앞을 가로막은 것들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 자라나는 가지의 숙명이니.

“카스무어 왕국의 패배를 원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승리를 하더라도 느긋한 시간을 들인,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러한 승리가 우리 제국 측에 가장 우호적인 전개가 아닐까요?”

이러한 논쟁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루페르트가 최근 신경 쓰는 건 제국 내외의 정치보다는 신비적인 것이었다.

그는 국정에 전념하는 대신, 별궁에 틀어박혀 고대의 역사와 인물을 탐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어차피 이번 시간대는 버리기로 한 시간대니.

그 루페르트가 찾고 있는 건 룸 제국 말기의 기록이다.

포르피리우스, 비달, 우줄두스, 기타 흐릿하게 기억 나는 꿈속의 이름들.

그중에서도 가장 알고 싶은 건, 은 가면에 비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지닌 검투사의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만큼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대체 그자는 누구지? 나는 아니야. 내 얼굴을 했지만 절대 나 같은 게 아니다.’

정신이 육체에 지배받는다고 하지만, 그 육체는 달랐다.

근저마저 썩어 버린 정신이 육체에 남았고 그 잔향이 육체를 지배한 루페르트의 정신마저 추악한 악취로 물들이려 했다.

수많은 사람을 봤지만, 그건 루페르트가 경험해 보지 못한 존재다.

적어도 사악함이라는 측면에서 루페르트는 그 육체의 주인이 저 티그리트보다 훨씬 흉흉하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타고난 잔인함과 오만함, 추악한 욕망과 일그러진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추악한 자아라고 할까.

‘여신님이 내게 주려는 일종의 언질인가. 아니, 나의 여신은 그런 언질 같은 걸 주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모든 걸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행동한다. 나와 똑같이 생긴 자는 존재했어.’

그자는 대체 누구인가.

사람의 몸에 작살을 꽂아 넣고 희열을 느끼던 그 미네아에서 왔다는 괴인은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된 것일까.

기록에 의하면 티그리트는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을 해방할 때까지 무패의 챔피언으로 남았다.

루페르트가 경험했던, 그 가혹한 투기장의 전투에서 승리한 건 결국 티그리트였다는 이야기다.

‘여신님이 그에게 힘을 줬다면 이길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 죽은 자와 나는 무슨 상관인가. 왜 그가 나의 얼굴 하고 있는 거냐.’

루페르트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면서 알 수 없는 조바심을 느꼈다.

그건 어쩌면 그의 아래에 사는, 아니 존재하는 소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소녀는 한 여성의 시체를 갉아 먹은 존재가 다시 빚어 내 만든 것이다.

여신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 시체를 먹음으로써 그 시체의 주인에 관한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설마, 그 시체를 여신님이 먹은 건 아니겠지.’

루페르트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사람의 손이다.

석고나 대리석 같은 손이 아니다.

그는 사람이다.

부모가 있고 유년기가 있고, 성장기와 첫사랑의 고통과 무서운 아내에게 핍박을 당했던 생생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투기장에 있던 그 존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전혀 다른 인종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내야 한다.’

나머지는 시간이 흐르는 대로 놔두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루페르트는 가슴에 달고 있는 소라고둥을 더듬었다.

곧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이 고둥을 불게 될 불길한 소식들이.

* * *

예상했던 악재는 반드시 터지는 법이다.

레벤호스트가 새로운 신교도 동맹을 창설하고 그 수장에 올랐다.

그레나스가 함락된 후 불과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레나스의 함락이 구교의 힘이 되기는커녕 신교도를 결집하는 효과만을 가져올 뿐이라는 총신들의 예측들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루페르트는 오랜만에 총신들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구했다.

오랜만에 황제가 총신들과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총신들을 질투하는 기존 관료들의 분노에 부채질을 하기에 충분했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루페르트의 총신들은 이구동성으로 황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건 시선의 변화다.

과거 황제의 시선은 미래를 향했다.

늘 미래의 일을 묻고 그것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다가올 문제를 선제적으로, 미리 해결하려고 노력했었다.

현재의 황제는 전혀 다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의 이유를 묻고 어떻게 했어야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황제의 시선은 과거를 향한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안젤리나가 고르고 고른 수재와 천재들의 식견으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까, 그 도시가 최대한 늦게 함락하는 게 우리에게 최상의 결과를 가져다 준다 그 말인가?”

은 가면을 쓴 황제는 이제 비밀스러운 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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