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36. 대경기장 (7)
“경기를 시작하라.”
관중석 곳곳엔 툭 튀어나온 발코니가 있다.
지붕이 있고 기둥이 있는 그곳은 특권층을 위한 좌석이다.
그 여러 개의 발코니 중 정중앙, 가장 좋은 자리에 자리 잡은 발코니엔 이 경기의 주최자 집정관 포르피리우스와 그의 가문 일원들이 앉아 경기를 보고 있었다.
머리에 가발을 쓴 늙은이가 완고한 집정관에게 비굴하게 말했다.
“저 미네아에서 온 곱슬머리가 그 배교자를 죽일 수 있을까요?”
모든 이의 시선이 집정관에게 향했다.
집정관은 코웃음을 치며 포도알 하나를 포도에서 분리해 입 안에 넣고 가볍게 굴려 넘긴 다음에야 느릿하게 대답했다.
“백만 데나르를 주고 사 온 놈이다. 하찮은 노예와 함께 묶여 있지만, 미네아에서는 그들이 믿는 패배한 신의 환생으로까지 여겨진 무패의 챔피언이다. 특히 투창과 원반던지기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지.”
집정관의 말에 발코니에 모인 좌중들의 입에서 일제히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저 배교자, 티그리트를 죽이기 위한 자리라는 겁니까?”
집정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흑인도 만만치 않아. 마우리타니아 총독의 말에 의하면 투창 숫자만 충분하다면, 혼자 코끼리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민첩하고 날랜 사냥꾼이다. 가장 강한 사냥꾼을 하나가 아닌 둘이나 데리고 왔다. 저 티그리트가 이교 신의 가호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신이란 게 언제 인간을 지켜 준 적이 있기나 했나?”
알려진 역사에서 포르피리우스는 마지막 황제를 다투는 야심가 중 하나로 기술된다.
쟁쟁한 후보 중에서 그가 자신을 포장한 문구는 ‘종교의 수호자’였다.
우둔한 친족들의 찬사를 들으며 포르피리우스는 자세를 낮게 낮추고 저 아래 곧 서로를 죽여야 할 운명의 인간들을 교만한 눈으로 내려보았다.
‘가장 훌륭한 선택지는 티그리트를 죽이는 게 아니야.’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저 배교자를 죽이는 것보다 저 배교자의 잘못을 깨닫게 하여 뉘우치게 하는 것이 자신의 평판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걸 위해 막대한 돈을 주고 두 명의 사냥꾼을 사 왔는데 그중 하나, 누로스에서 온 곱슬머리는 상상 이상으로 움직임이 뛰어났다.
‘아까운 백만 데나르를 안 버려도 되겠군.’
집정관이 장교를 손짓으로 불러 무언가 지시했다.
번쩍이는 갑주과 마구를 걸친 장교는 굳은 얼굴로 집정관의 명령을 마음에 새겼다.
* * *
스르릉-
병사들이 들고나온 건 번쩍이는 사슬이었다.
루페르트와 다른 노예들은 의아한 얼굴로 병사들의 방향을 지켜보았다.
이쪽이 아니다.
티그리트 쪽이다.
철컹!
병사들이 티그리트의 발목에 사슬을 채웠다.
마치 저 너머에 있는 열등한 노예처럼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훌륭하게 싸운 자에겐 기회를 줘야지.”
감독관이 루페르트에게 다가가 몸소 고개를 숙이고 루페르트의 발목에 찬 형구를 풀어 주었다.
“역시, 쓸 만한 친구군.”
그가 루페르트를 향해 게슴츠레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루페르트는 그 얼굴에서 악의와 비열함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 안에 삶의 기회가 있다는 것 또한 놓치지 않았다.
“살고 싶나?”
감독관이 속삭였다.
“살고 싶다면 손등을 두 번 두드려라.”
탁. 탁.
루페르트의 행동엔 주저함이 없었다.
감독관은 그 기민함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역시 재능 있는 놈은 까다롭군. 어제 그 소란을 피우더니 이렇게 잘 싸워 줄 줄이야.”
“…….”
“저 챔피언을 죽이지 마라.”
루페르트는 의아한 얼굴로 감독관을 응시했다.
“천천히 저 육중한 몸에 죽지 않을 만큼의 창을 꽂아 넣으라는 소리다.”
“무엇을 위해서?”
“그의 잘못된 믿음을 고치기 위함이지.”
감독관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대부분의 정신병은 몽둥이로 고칠 수 있지.”
“…….”
“이교신을 믿는 것도 정신병의 일종이야. 다만 저 친구가 너무 크고 강해 몽둥이로 교정하기 어려울 뿐이지. 그래도 창이라면 그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새겨 줄 수 있지 않을까?”
감독관의 말을 들으면서 루페르트는 자신이 새겼던 전의가 무의미해지는 걸 느꼈다.
뭐랄까, 허망하다.
하나의 난관을 넘고 또 다른 난관을 넘으려고 몸과 정신을 긴장한 상태에서 전투에 대비하는데, 정작 루페르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난관이 아닌 통과의례였다.
쇠사슬을 묶는 형태만 봐도 알 수 있다.
루페르트처럼 줄을 길게 늘어뜨려 최소한의 회피를 할 수 있게 한 것과 달리 티그리트는 선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끔 단단히 지면에 붙들어 맸다.
이건 싸움이 아닌 처형이고 고문이다.
아마 룸인들은 좋아할 것이다.
그들은 다른 민족의 피를 보는 걸 즐기는 족속들이니.
감독관이 루페르트에게 일렀다.
“나팔이 울리면 싸움을 멈춰라. 혹 나팔의 지시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죽여라. 죽여도 좋다. 안 그러면 너에겐 내일이 없을 것이다. 그 나팔은 집정관 포르피리우스 님의 지시하에 부는 것이니까.”
대경기장엔 기묘한 흥분이 감돌기 시작했다.
열다섯 명의, 이미 피를 본 노예들과 대경기장의 부동의 챔피언으로 군림하는 최강의 검투사.
그들의 대결이 시작되려 한다.
누가 봐도 불리한 건 티그리트였다.
그는 날아오는 투창을 피할 수 없다.
몸으로 받아 내거나 쳐 내거나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아무리 티그리트라고 해도 열다섯 개의 투창을 어떻게 받아 낸단 말인가.
“야! 이거! 우리가 저놈을 죽일 수 있겠는데?”
우줄두스를 비롯한 고어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비달은 평소와 다른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설마 저 얼굴로 날 죽인 건가.’
루페르트는 비달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리고 고어인에게 물었다.
“왜 그리 좋아하나? 같은 북쪽 사람 아닌가?”
“마인인이?”
우줄두스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마인 놈들이 룸인보다 더 싫어.”
그만이 아니다.
다른 고어인들도 티그리트에 대한 맹렬한 적의를 드러냈다.
“놈들이 룸인에게 이웃 부족을 팔아먹었지.”
나팔이 울렸다.
경기의 시작.
고어인들이 맹렬한 고함을 내지르며 투창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푹!
시작과 동시에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투창이 고어인들을 꿰뚫었다.
“어?!”
우줄두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가만 서 있던 놈이 어느새 창을 던졌다.
두 명이 죽었다.
같은 고향에서 나고 자란 형제 같은 친구들이다.
“이, 이놈이?!”
그의 고함은 그러나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푹!
창이 그의 벌린 입 안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시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노예들 사이에 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저게 티그리트인가.’
‘묶여 있지만 묶여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단지 손을 흔든 것만으로 저렇게 빠른 투창을 날릴 수 있다니…….’
고어인들이 당한 건 우연이 아니다.
제삼자의 시선에선 티그리트는 투창이 담긴 통을 손으로 쓸 듯 가볍게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움직임 안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담겨 있었다.
가볍게 휘저음만으로 티그리트는 살인적인 속도의 투창을 날려 보냈고, 순식간에 세 명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다.
그 압도적인 무용은 잠시 느슨해졌던 루페르트의 긴장을 되살렸다.
동시에 루페르트는 자신의 고간에 또다시 역겨운 성적 흥분이 감도는 걸 느꼈다.
‘대체 이 몸은 어떻게 된 거지? 이 끔찍한 상황 어디에 흥분할 거리가 있다는 거냐?’
미친 몸이다.
하지만 동시에 훌륭한 몸이다.
슈욱-
루페르트는 조건 반사적으로 자신에게 날아든 두 개의 투창을 공중제비를 돌며 피해 냈다.
그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
은 가면을 쓴 티그리트가 이쪽을 우두커니 보았다.
천하의 챔피언도 살짝 놀란 모양이다.
루페르트가 소리쳤다.
“모두 창을 들어라.”
그는 티그리트가 가장 경계하고 막으려고 하는 움직임을 이끌었다.
“놈은 움직이지 못한다. 한 번에 노려라. 단! 심장과 얼굴은 겨누지 마라!”
루페르트가 몸소 창을 들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열한 명의 노예가 일제히 창을 들었다.
티그리트 또한 큼지막한 두 손에 두 개의 창을 들었다.
그가 루페르트를 향해 무시무시한 창격을 날렸다.
쉬익─
루페르트가 도움닫기를 하던 것보다 더 빠른 창이 루페르트를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루페르트의 육체는 그 투창을 농락하듯 피해 내고는 감각적으로 자신의 투창을 날렸다.
챙캉!
루페르트의 투창은 가볍게 허공에서 격퇴당했지만,
“지금이다!”
나머지 열 개의 투창이 챔피언을 일제히 덮쳤다.
티그리트는 몇 개는 쳐 내고 몇 개를 붙잡았지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모든 걸 막을 순 없었다.
푹!
투창 하나가 불가침의 육체에 박혔다.
“…….”
자루까지 깊숙이 박혔음에도 티그리트는 신음하나 내지 않았다.
와아아아-!!
군중들이 열광했다.
노예들이 다음 투창을 준비했다.
그때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만!”
루페르트가 투창을 준비하는 노예들에게 명했다.
“정지해라! 잠시 멈추라고!”
모두가 그의 명에 따랐다.
단 한 명, 루페르트의 옆을 지키던 비달만이 창격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비달!”
루페르트가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동생의 원수……!!”
순간 내면의 속삭임이 들렸다.
[ 감히, 내 명을 거절해? 그렇다면 죽여야지. ]
그 음성은 오싹할 정도로 잔혹하고 희열에 넘쳤다.
루페르트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설마, 방금 그것이 이 육체의 주인 목소리인가?’
뿐만 아니다.
루페르트의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투창을 들고 자신과 함께 싸우던 적의 목을 노려보고 그걸 향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을 던졌다.
푹!
창은 정확히 비달의 목에 박혔다.
창이 박힌 채 비달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루페르트를 보았다.
“어, 어, 어…….”
잠깐이나마 루페르트와 함께 싸우던 사내의 최후였다.
“…….”
루페르트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왜……?’
왜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와아아아아---!!
동료의 죽음은 환호로 치환됐다.
끝없는 배덕감 속에서 루페르트는 빈사의 챔피언을 보았다.
멀리서 사회자의 포효가 들려왔다.
“티그리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거짓된 믿음을 버리고 진정한 믿음으로 복귀하겠는가?!”
이에 티그리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감독관이 손짓했다.
또 한 번의 벌을 내리라는 신호.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루페르트가 창을 들었다.
‘빌어먹을!’
모두가 루페르트를 보고 깔깔 웃었다.
고간을 간신히 가리는 하얀 천 부분이 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이런 반응이 나온다고? 얼마나 미쳐 버린 건가. 이 몸은.’
자신의 육체와 원주인의 잔혹한 마음에 진저리를 느끼면서도 루페르트는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자유로워진 두 발로 챔피언의 주위를 돌며 창을 박아 넣을 빈자리를 노렸다.
챔피언이 기습적으로 창을 날려 보지만, 루페르트의 육체는 그 창격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곧 루페르트가 창을 날렸다.
푹!
또 하나의 창이 챔피언의 등에 박혔다.
옆구리다.
“…….”
이번에는 티그리트가 신음을 흘렸다.
사회자가 물었다.
“티그리트! 믿음을 바꾸겠는가?!”
챔피언이 신앙을 꺾는 일은 없었다.
그때마다 루페르트의 투창이 챔피언의 몸에 박혔고, 곧 챔피언은 고슴도치와 비슷한 형상으로 전락했다.
쿵!
결국 티그리트가 무릎을 꿇었다.
주르륵-
정수리를 스치고 지나간 창격이 남긴 상처가 가면을 가득 채웠고, 그 일부가 은 가면의 눈구멍을 통해 피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잔혹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열광하는 룸인들에겐 참회의 눈물로 보인 모양이다.
사회자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믿음을 바꾸겠는가?”
종용하는 물음에 티그리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어 해일과 같은 무게가 느껴지는 중저음의 음성으로 답했다.
“……내가 믿는 건 오직 한 분뿐이다.”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신의 이름을 뇌까렸다.
“리프니에.”
무릎을 꿇은 티그리트가 루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가면에 하나의 얼굴이 비쳤다.
루페르트는 그 가면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놀랄 정도로 경쾌하고 빠르고 단련된 육체와 더불어 피와 죽음에서 희열을 느끼는 변태성을 가진 사내의 얼굴은 다름 아닌 루페르트 그 자신이었으니.
‘……이, 이게 나라고?’
짐승이 거울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서듯 루페르트 또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부정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 가학적인 변태가…… 나란 말인가……?’
집행인이 한 걸음 물러선 순간 쓰러진 사내가 천천히 일어섰다.
“사, 살아 있어?”
“저토록 많은 투창을 몸에 받고도?”
“괴물이다.”
“아니, 역시 황제의 챔피언인가?”
“이교신의 챔피언이겠지.”
“하지만 저 모습은…… 불경하게도 신과 같군.”
수만 관중의 증오와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그 사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우뚝 일어섰다.
“……나는 믿음을 꺾지 않는다.”
그 모습은 불굴의 신념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티그리트였다.
그 끔찍한 현실이 갑자기 잿빛으로 변했다.
“어떤가요? 루페르트 가우저.”
또 다른 현실이 잿빛으로 변한 현실이었던 세계를 찢어발기며 개입했다.
그제야 루페르트는 자신에게도 여신이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에게도 저런 꺾이지 않고 향기로운 시절이 있었답니다.”
익숙한 바닷바람의 냄새와 소리가 루페르트를 감쌌다.
순간 광적인 연호도, 바닥에 널린 피투성이가 된 시체도, 그리고 그 위에 우뚝 서 있던 전사도 덧없이 사라졌다.
어두 칙칙한 북부의 숲이 루페르트의 앞에 펼쳐졌다.
“…….”
저 앞에 티그리트가 서 있다.
대경기장의 챔피언이자 옛 황제, 그리고 이제 루페르트와 양립할 수 없는 진정한 적이.
검은 머리의 소녀가 생긋 웃으며 루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제 마음을 이해하시겠어요?”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여신의 힘은 필요하다.
여신에게만큼은 진솔한 모습을 보였던 루페르트의 얼굴에 하나의 가면이 덧씌워졌다.
“……네.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 가면은 은으로 만들어졌으리라.
라고 루페르트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