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36. 대경기장 (1)
그 말은 루페르트 본인조차 당황으로 몰아넣었다.
‘내, 내가 어떻게 이런 말을.’
왜 그런지는 이해할 것 같다.
한때 티그리트-클라우데 2세는 루페르트가 닮기를 원했던 동경의 상징이다.
그 동경은 천천히 무뎌졌고, 결정적인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변했다.
그 동경하던 자가 권력을 요구한다.
루페르트 본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권력욕의 화신이거나, 권력을 위해 많은 걸 희생하는 폭군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비록 무능할지언정 그는 주변 사람에겐 다정다감했고, 특별한 위해를 끼치지 않는 소극적인 군주였다.
그러나 이제 힘을 얻고 황제의 자리라는 게 익숙해졌다.
은연중에 들려오는 찬사는 격무로 지친 황제의 목을 해갈하는, 중독성 있는 생명수였다.
선제후들은 이제 루페르트를 더 이상 우습게 보지 못한다.
루페르트를 하인처럼 보던 레벤호스트는 이제 루페르트의 눈치를 보고, 나머지 선제후들은 저마다의 셈법을 가지고 있지만 황제 루페르트를 인정하고 있다.
여기까지 이르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는데 이제 와서 황위를 내놓으라니.
밖으로 표출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티그리트-클라우데 2세에 대한 루페르트의 감정은 증오보다 깊었다.
상대가 너무 강하기에, 이 세상의 섭리로 종잡을 수 없기에, 주눅이 들어서 그 사실을 본인도 잘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신이 그의 편을 들고 나섰다.
두 명의 황제 중 여신이 택한 건 루페르트였다.
그녀는 자신이 루페르트를 돕고 나서겠다고 스스로 말했고, 그 사실은 루페르트가 여기까지 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여신이 보인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배신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당연히 눈앞의 반역자를 신의 권능으로 소멸할 줄 알았는데, 그 여신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저 반도에게 자기보다 더 살가운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닌가?
아마 그 증오와 실망이 루페르트에게 그조차 당황하게 하는 말을 내뱉게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
후회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은연중으로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신마저 날 버리면 난 이제 진짜 끝이다. 제국의 운명을 논하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 없을 정도로.’
“오해예요.”
그의 여신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해 보지만, 루페르트는 잠시 잊고 있던 저 “안젤리나 비슷한 것”에 대한 혐오가 내면에서 다시금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 표정과 감정조차 꾸며 낸 것 같다는 애써 외면하던 사실이 선명하게 들어오는 걸 보면 말이다.
“……오해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루페르트는 담담하면서도 단호하게 자신의 실망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의 실망은 여신에겐 그다지 와닿지 않는 그러한 감정으로 보인다.
“이게 그리 화를 낼 일인가요?”
여신은 얼굴에서 당혹감을 지워 버리곤 오히려 정색하며 물었다.
“그는 저를 끝까지 위협할 겁니다.”
“그는 약속했어요. 다시는 당신에게 손대지 않기로.”
여신이 다가왔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사도를 올려다보았다.
“루페르트 가우저.”
“…….”
“그 제국 성인이라는 조잡한 장난감이 당신을 공격하는 일은 더는 없을 거예요. 폐하는 잘 삐치긴 하지만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랍니다. 저와 약속했으니 이제 안심하세요. 당신의 치세는 보장될 거예요.”
“……왜 저를 폐하라고 불러주시지 않는 겁니까?”
루페르트가 안젤리나 비슷한 것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소녀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그러나, 싸늘한 냉소였다.
“……주제넘게.”
순간 루페르트의 귓가에 선제의 매몰찬 한마디가 느닷없이 떠올랐다.
“언제까지 저 자칭 여신이라는 괴물을 견딜 수 있는지 보겠다.”
선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왠지 그런 말을 했을 것 같다.
짧은 시간 걷잡을 수 없이 쌓인 악감정이 그 말을 의식 속에 메아리치게 한 것이다.
“당신에게 보여 줄 게 있어요.”
거부권은 없었다.
여신이 단지 돌아선 것만으로 루페르트의 의식은 마치 불이 꺼지는 것처럼 사라져 버렸으니까.
풀썩.
두 황제 중 하나가 쓰러졌다.
순진무구한 새 몇 마리에 그 소리에 놀라 하늘 위로 푸드덕 날아올랐지만, 빽빽한 숲은 그 모습을 보여 주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 * *
깡! 깡!
루페르트의 의식을 깨운 건 망치 소리였다.
뒤이어 비릿한 악취와 불쾌감, 텁텁함, 갈증, 만연한 고통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정신을 헤집어 루페르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헉!”
언제 흘린지도 모를 땀방울 몇 개가 횃불이 비추는 벽면 주위로 비산했다.
그곳은 처음 보는 장소였다.
‘여기는?’
끼리릭- 끼릭-
날카로운 쇠사슬 소리가 루페르트의 귓전을 강하게 때렸다.
루페르트는 엉겁결에 몸을 움직였고, 뒤이어 자신이 알 수 없는 마치 지하 감옥으로 보이는 곳에 사슬로 묶여 있다는 걸 발견했다.
옷은 걸치지 않았다.
국부를 가리는 누렇게 뜬 더러운 천이 루페르트의 알몸을 가린 전부였다.
만연한 악취의 원인을 그제야 발견했다.
그 방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수도 없이 있었다.
하나 같이 헐벗어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무엇보다 그 두 눈동자 안에 예외 없이 절망을 품고 있었다.
한 사내가 루페르트를 보고 뭐라고 말했다.
외국어다.
루페르트는 곧 그 외국어가 자신이 아는 언어라는 걸 발견했다.
‘룸어?’
회귀 초반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고 갈고닦았던 룸어다.
그런데 그 사내가 말하는 룸어는 루페르트가 배운 세련된 명사와 동사의 변형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굳이 해석을 한다면.
“눈 떴어? 눈 떴어?”
이런 느낌이다.
루페르트는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복기했다.
수많은 회한과 증오, 실망이 루페르트의 눈동자 위에 떠올랐다 사라졌고, 그는 곧 자기도 모르게 한 이름을 증오를 닮아 뇌까렸다.
“티그리트……!!”
“티그리트?”
알 수 없는, 삐쩍 말라 피골이 상접한 사내는 그 이름을 아는 눈치였다.
“티그리트. 티그리트. 나쁜 놈. 개자식, 창녀의 아들.”
고개를 처박고 있던 또 다른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루페르트 앞에 있는 사내보다는 완성된 문장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 배교자는 왜 찾나?”
그의 피부는 흑단처럼 검었다.
루페르트는 불사자의 땅 너머에 산다는 흑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제국과 그들의 땅 사이엔 이해하기 어려운 거대한 건축물로 가득 찬 불사자의 땅과 죽음의 사막이 가로막고 있으니까.
심지어 그 중간엔 동방 제국이 호시탐탐 지나가는 모든 서쪽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그들의 무역로를 지키려 한다.
“그를 아나?”
루페르트는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말했다.
기이하게도 루페르트는 그 언어에서 마치 자신이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들었던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나라의 언어 같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모국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흑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그 배교자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여기는 어디지?”
그의 물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중에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얼굴에 파란 문신을 새긴 사내가 시커먼 이를 드러내며 욕을 내뱉었다.
“미친놈인가? 이 새끼. 드디어 정신이 맛이 간 모양인데?”
루페르트는 그를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고 응시했다.
틀림없다.
이 사내가 말한 언어는 루페르트가 말한 제국어다.
남부 저지대의 어눌한 방언처럼 들렸지만, 그가 쓰는 언어는 루페르트가 사용하던 제국어와 놀랄 정도로 흡사했다.
그만이 아니다.
비슷한, 얼굴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에서 썩은 버터의 악취를 풍기는 야만인들이 루페르트의 언어로 역겨운 소리를 내뱉었다.
흑인이 경멸을 숨기지 않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어인들은 무시해. 룸인조차 교화를 포기한 짐승 같은 놈들이니.”
“룸.”
“그래. 여기가 룸이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복도를 때리는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날카로운 룸어가 복도를 채찍처럼 후려쳤다.
“기어 나와! 노예들아! 뒤질 시간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천지를 구르는 발 구름과 환호성이 들려왔다.
쿵! 쿵! 쿵!
죽여! 죽여! 죽여!
세상천지가 들썩이고 그 천지를 들썩이게 하는 건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다.
루페르트는 룸어 교육 시간에 읽은 여행자의 수기가 묘사하는 사악한 한 장면을 떠올렸다.
“설마 여기는?”
루페르트가 이름을 모르는 흑인에게 물었다.
“대경기장이다. 친구. 정신 차려라. 정신 차리지 않으면 곧 죽게 될 테니.”
노예 감독관들이 노예들을 끌어냈다.
일부는 저항하며 나가려 들지 않았지만, 무자비한 채찍질이 가해지자 제 발로 헐레벌떡 감옥 안을 뛰쳐나갔다.
“너.”
감독관이 루페르트를 보았다.
그는 루페르트의 팔목을 채운 수갑에 적힌 문자를 보고는 코웃음을 치더니 갑자기 루페르트의 뺨을 후려쳤다.
짝!
고통보다 참기 어려운 건 분노였다.
“넌 오늘 죽는다.”
루페르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대체 무엇이 나를 이 이상한 꿈의 세계로 데려왔나 말이다.’
짐작 가는 곳은 있다.
그의 여신이다.
의식이 불처럼 꺼지기 전에 여신이 말했다.
보여 줄 게 있다고.
‘대체 뭘 보여 준다는 거지? 룸 제국의 유명한 악취미를 구경이라도 하라는 건가.’
노예들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저 너머에 빛으로 가득 찬 창이 보인다.
기이하게도 루페르트는 이 어두운 복도와 저 네모난 빛으로 이루어진 별세계의 입구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그곳은 회귀 전에 보던 복도를 연상케 하는 이 있었다.
어두운 복도에 유독 그 출구만 빛으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그러나 그 복도엔 죽음이 가득했다.
복도의 벽엔 시체가 걸려 있었다.
마치 보란 듯이.
이 행렬을 벗어나면 어떤 운명이 기다리는지.
그 시체의 일그러진 얼굴과 온몸에 가해진 학대의 흔적을 루페르트는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그보다 그는 이 악몽에서 벗어날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악몽에서 깰 수 있는 거지?’
악몽은 그러나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한 방울의 궤적마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빛이 가까워진다.
지린내가 풍겼다.
앞에 걸어가던 노예 하나가 오줌을 지린 것이다.
그 노예는 다름 아닌 루페르트와 같은 말을 쓰던 야만족이었다.
루페르트가 그 오줌으로 이루어진 웅덩이를 피하려 하자, 옆에서 걷던 흑인이 말했다.
“겁쟁이의 오줌은.”
그가 오줌을 밟았다.
“용기 있는 자의 행운이 된다고들 하더군.”
“…….”
흑인이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지만, 루페르트는 오줌을 피했다.
곧 빛이 둘을 감쌌다.
거대한 광장과 그를 에워싼 넘을 수 없는 벽들과 그 위 단상을 가득 채운 군중들이 루페르트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대경기장인가.’
꿈인지 현실일지 모를 세계, 황제는 과거의 대경기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