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35. 재회 (6)
같은 시각, 가문의 숲의 한 귀퉁이.
마를로네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국적인 여성과 함께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진짜 신경 쓰이네.’
첫인상은 단순했다.
예쁘다, 아름답다, 하브루타인인가?
하지만 곱씹어 볼수록 저 여성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마성의 매력을 품고 있었다.
뭐랄까, 이쪽과 전혀 다르다.
나름 제국의 여자들보다 이쪽이 낫다고 으레 자신감을 품고 있었고 그에 걸맞게 수수한 차림으로 다니는 걸 고수했지만, 그럼에도 자기보다 괜찮아 보이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여성은 다르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존재다.
의식을 안 하려고 해도 쇳가루가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저 같은 여성에 눈길이 간다.
딱히 화려한 건 아니다.
그 옷차림은 평범한 하브루타인의 복식이다.
몸매의 굴곡을 드러내지만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천으로 싸맸다.
하지만 그 꽁꽁 싸맨 복장 너머로 풍겨 나오는 아찔한 아우라가 있다.
그 잘났다는 울피아나는 마를로네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이 여자는 보는 것만으로 절로 의식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뭐랄까, 근원적인 이질감을 느꼈다.
뇌쇄적이라고 할까, 매혹적이라고 할까.
마치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보는 기분이다.
저 하브루타인이 숭상한다는.
마를로네는 왜 자신이 저 여성에 끌리는지에 관해 생각했다.
어머니가 없이 자란 마를로네는 여자보다 남자의 문화와 양식에 익숙하다.
그것도 베르크 란이라는 무뚝뚝하고 무자비하며 용서를 모르는 살인자 아래서 자랐다.
또래를 사귀면서 같은 나이의 여자아이가 지녀야 할 소양과 생각을 익히긴 했지만, 그녀가 사귄 또래 친구는 하찮은 집안의 자식들이다.
하지만 이 여성은 뭐랄까, 어른이다.
널리고 널린 나이만 먹은 어린이들과 진정한 어른의 향기가 났다.
그것도 동경으로 가득 찬.
그 여성이 이쪽의 시선을 비로소 눈치챘다.
그녀가 마를로네를 보았다.
“안녕?”
마를로네는 마지못해 목례를 하며 인사를 받았다.
“이름이 뭐니? 나는 아가티아.”
그 여성이 손을 내밀었다.
순간 마를로네는 온몸이 감전된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내민, 달빛을 머금은 듯한 유려한 손에 순간 갖가지 종양과 검버섯, 썩어 가는 농양이 가득 찬 환상이 나타났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네가 죽인 제국 성인 중 하나란다.”
아가티아가 눈웃음을 머금었다.
마를로네가 흠칫 놀라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이국적인 색채를 가진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은 사막을 닮았지만, 사막의 온도를 머금지는 못했다.
마를로네가 느낀 체온은 뱀의 비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폐하는 미래를 보는 재주가 있어.”
“그래서요?”
“폐하가 말씀하시길.”
아가티아가 고혹적인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가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고 말씀하시지 뭐야.”
마를로네는 도펠죌트너의 눈으로 아가티아를 다시 보았다.
그녀가 느낀 동경이 구역질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여신님에게도 장점은 있다.”
티그리트가 말했다.
그건 루페르트에게 한 말이지만 어째서인지 반응한 건 리프니에다.
[ 조금만, 더 지켜보죠. ]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참으며, 다시금 신경을 티그리트에게 옮겼다.
여신을 배신한 자가 말하려는 여신의 장점을 듣기 위해서다.
사실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장점을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신의 속성 중 하나가 전지전능이니.
신에게 장단점이 있다는 건 그 신격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제국 호라 교단에서 호라의 장단점을 언급하면 가볍게는 훈계를 받겠지만, 심할 경우엔 광장에서 산 채로 불태워질 정도의 중죄다.
그런 점에서 리프니에는 호라보다는 마음이 열려 있는 신이란 게 분명하다.
[ 기대가 되네요. 룸 대경기장의 무패의 챔피언이 말하는 저의 장점이. ]
신이면서 장점을 들을 용기가 있다는 점에서.
스르릉.
티그리트가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은 짧고 투박했다.
단검보다 조금 더 긴 정도.
크고 강한 것을 추구하는 제국의 취향과는 멀리 떨어진 물건이다.
티그리트가 그 검 끝을 하늘을 향해 뻗어 그 날카로운 끝단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여신님은 적어도 부름엔 답하지.”
[ 아, 그건 저도 모르고 있던 장점이네요. ]
루페르트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다른 무정한 신과 달리 리프니에는 인간을 돌아봐 주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현재의 상황이다.”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루페르트는 어째서인지 방금 그 말이 자신보다는 리프니에한테 강하게 먹힌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네 자리는 나의 것이다. 여신은 그렇게 약속했다.”
[ 루페르트 가우저. ]
“내가 여신에게 빈 소원은 나의 제국이 건재한 채 천년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즉, 너의 자리는 나의 것이다. 여신도 반박하진 못할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거 같네요. ]
“정직하게 말하지.”
[ 듣지 마세요. ]
“너는 말이다. 루페르트 가우저.”
[ 루페르트 가우저. ]
선제와 여신이 동시에 루페르트를 다그쳤다.
그 상황이 루페르트에겐 순간 꿈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티그리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다.
그는 가감 없이 진실을 이야기하려 한다.
“너는 나의…….”
티그리트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그의 시선은 루페르트 너머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방대한 원시림을 향했다.
숲은 밤보다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그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곧 그것이 낭랑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여자의 목소리.
티그리트는 숨을 죽이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천하의 티그리트 또한 가볍게 경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를 부른 건 이제는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사랑하던 여인의 모습이었으니.
“안젤리나.”
그만이 들을 수 있는 낮은 울림으로 그 이름을 부르며 티그리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흑발의 소녀를 흐릿한 눈으로 보았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그것은 숨길 수 없는 분노였다.
절제한, 그럼에도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티그리트가 말했다.
“……당신이 내 자리를 돌려준다면, 언제든 당신에게 돌아가겠나이다.”
티그리트가 루페르트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분노를 참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선제의 얼굴에 떠오른 건 비웃음이었다.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꼭두각시 시절에 몇 번이고 경험한 바가 있다.
표정 너머의 감정을 읽어 내는 것 정도는.
안젤리나의 모습을 한 리프니에는 차분히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곧 그녀가 돌아섰다.
“……저를 악마라고 불러 놓고.”
“그것 또한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티그리트가 그 덩치와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세 가지 이름을 가진 악마라는 칭호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았습니까?”
“……폐하. 역시 당신은 저를 너무 잘 아네요.”
리프니에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제 자리만 돌려주십시오. 그러면 다시 여신님의 옆을 지키겠나이다.”
티그리트는 자기 허리밖에 오지 않는 소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서약의 자세를 취했다.
리프니에는 그 모습을 보고 아무런 반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마치 그 상황을 즐기는 듯 티그리트의 모습을 음미했다.
“당신의 이름을 그 피의 경기장에 몇 번이고 울리게 한 저의 공양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폐하.”
“저는 몇 번이고 당신의 순교자가 될 각오를 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이제 와서 여신님을 배신하려 든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루페르트는 또 다른 혼란에 잠겨 들었다.
‘뭐, 뭐냐? 지금 상황은.’
먼저 루페르트를 놀라게 한 건 선제의 변화다.
상상조차 못 했다.
철혈대제라고 생각했던 시절부터 선제는 근엄하고 기품이 있고 당당하며 날을 세운 칼날과 같은 엄정한 기도가 있는 우뚝 선 남자였다.
그 남자가 지금은 저 동방 제국에 있다는 환관처럼 체통도 자존심도 없이 비굴하게 여신에게 아부하고 있다.
‘이, 이건.’
마음 속에 굳건히 세운 벽 하나가 무너지는 느낌이다.
그 벽의 이름은 클라우데 2세이기도 했고 티그리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루페르트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리프니에를 보았다.
저 소녀의 형태가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저 표정이다.
당장이라도 선제를 만나면 찢어 죽일 것처럼 떠들던 여신은 이제 그 찢어 죽여야 할 배교자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강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 눈빛은 뭐랄까, 적어도 루페르트 본인에겐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을 그런 눈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신님!!’
리프니에가 종잡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건 알고 있다.
그 얼마나 많은 혼란과 실망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루페르트는 그 실망을 마주 보고 여신과 다시 마음을 이었다.
그 재결합은 강철로 만든 사슬보다 단단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여신의 속성은, 그녀가 풍기는 냄새처럼 바다를 닮은 모양이다.
“폐하. 당신이 저를 떠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요?”
저토록 쉽게 마음이 변하는 걸 보면.
평온하던 바다가 모든 걸 집어삼킬 것처럼 날뛰고 그 격랑의 바다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물결조차 일지 않는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변하곤 한다.
“폐하.”
또 하나가 거슬린다.
“…….”
호칭이다.
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리프니에는 늘 그랬다.
선제를 언제나 폐하로 불렀다.
루페르트는 여전히 루페르트 가우저인데.
지금까지는 그 차이를 조금도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다.
루페르트는 매사 의심하기보다는 사람 좋게 넘어가려는 성질이 있으니.
그 여신과 선제의 이야기가 마침내 끝났다.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주겠어요.”
“감사합니다.”
여신이 선제를 용서했다.
자신을 악마라고 욕하고 자신의 품에서 뛰쳐나가 루페르트라는 또 다른 사도를 해치려고 한 자를 너무나도 쉽게 용서한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아주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 화기애애한 장면에서 불길한 이유는 전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도 참, 매몰차지 못하네요. 겨우 천 년 남짓을 함께했다고 제 마음이 이렇게 약해지다니.”
둘은 한두 해를 같이 보낸 게 아니다.
천 년을 함께했다.
가장 금슬 좋은 부부조차 100년을 함께할 수 없는데, 저 여신과 황제는 천 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다.
“게다가 폐하는 제가 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죠. 저도 폐하를 좋아했고요.”
“…….”
“표정이 왜 그러세요? 루페트르 가우저?”
멀리 선제가 슬그머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루페르트는 그 모습을 보며 여신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