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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39화 (139/225)

139화 34. 족쇄 (7)

“그 여자가 중요한 여자인가요?”

리프니에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육체의 나이는 수십 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을 때의 대황후의 꾸짖음을 연상케 할 정도의 박력이 있었다.

리프니에가, 루페르트의 여신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하찮은 신분에 하찮은 재능을 타고났고, 뭐 이제 당신은 결혼도 못 하겠지만 지참금도 못 가지고 올 그런 여자를 살리려고 회귀라는 권능을 이용하는 건가요?”

“그, 그게.”

“말해 봐요. 루페르트 가우저.”

“피리스는 그러니까 제가, 처음으로 여신님의 권능을 이용해서 운명을 바꾼 사람입니다. 여신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한 번이나 바꿔 줬는데 스스로 제 발로 다시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어리석은 자를 두 번이나 살려 줄 필요가 있나요?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위인이라 불리는 훌륭한 사람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실수나 패배를 경험하지 않는답니다. 잘 알고 있죠?”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선제만 해도 적어도 투기장에서는 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죠. 그렇기에 제가 주목한 것이지만.”

여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사람은 많은 걸 할 수 없어요.”

“…….”

“그러니 욕심을 줄여야 해요. 당신은 평범해요. 그 육체는 평범하지 않겠지만 당신이라는 영혼은 지극히 평범하고 범용하답니다. 그러니 욕심부리지 마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프니에는 그런 루페르트를 빤히 쳐다보다 한마디 했다.

“이미 했으니 이번은 봐 드리겠어요. 루페르트 가우저.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감사합니다.”

거기까지 루페르트가 여신에 대해 가진 건 반감이었다.

‘나도 힘들었다. 게다가 수십 번을 했는데. 피리스가 어떤 사람인지 여신님도 알지 않나. 그걸 왜 이렇게 나에게 타박을 주냐고. 안 그래도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는데, 또 그 울피아나를…….’

리프니에가 돌아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 너머에서 희미한 여신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힘들어요.”

루페르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크게 뜬 눈으로 여신이 사라진 어둠을 우두커니 선 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 *

아무리 리프니에를 미워하고 원망해 봐도 루페르트가 여신의 유일한 사도인 것만은 영원히 변치 않을 사실인 모양이다.

회귀 직후부터 루페르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에 반드시 해결을 해야만 해.’

처리해야 할 수많은 일이 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집중해야 할 건 하나다.

피리스.

그 붉은 머리칼을 지닌 여성을 살리는 것이 루페르트의 목적이다.

‘피리스. 조금만 기다려라. 이번만큼은 죽게 하지 않겠다.’

가장 먼저 루페르트가 한 일은 피리스를 찾아간 것이다.

안개 가면의 권능은 루페르트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었다.

선제, 아니 티그리트가 누린 것처럼.

대학의 입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니 아는 얼굴이 보인다.

피리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방문한 어린 학생이었다.

이제 겨우 열둘 정도밖에 안 될 앳된 여자아이를 붙잡고 루페르트는 담담하게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아이야. 나는 이런 사람이란다.”

루페르트가 자신의 인장을 보여 줬다.

황제의 인장.

하지만 아직 무구함이 남은 아이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루페르트도 최소 귀족이라는 걸 알아볼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피리스를 알고 있지? 피리스 홀리바레스를 내게 데리고 오렴. 이걸 주마.”

다음으로 금화 한 닢을 내밀었다.

마법사가 돈을 좋아한다는 건 그들의 정점인 헬브라이트 베틀렌이 추악할 정도로 투명하게 보여 줬다.

어리다고 해서 그 본질이 변하는 건 아니다.

사실 처음부터 정해진 일인지도 모른다.

대학에 들어가고 싶던 피리스의 가장 큰 장벽은 다름 아닌 돈이었으니.

재능은 대체로 돈에 묻힌다.

대성한 마법사는 집에 돈이 많고, 재능도 뛰어나다는 두 가지 기본 조건을 충족했다.

“바로 찾아볼게요!”

돈의 힘으로 루페르트는 피리스와의 만남을 성사할 수 있었다.

장소는 어째서인지 기억에 있는 곳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번화가 사이, 건물 틈 사이로 푸른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골목이다.

마를로네와도 여기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여기가 테타우의 중심에 몸을 숨기기도 좋은 곳이었으니.

골목에서 루페르트는 오랜만에 자신의 하녀였던 피리스와 재회했다.

“루페르트 님, 아니, 폐하!”

피리스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루페르트가 처음 봤을 때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마력이 있었지만, 루페르트는 그녀의 눈가에 진 어두운 그늘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시점으로도 엄청난 무리를 하고 있군.’

방식이 잘못됐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회귀를 했는데 그저 노선만 트는 방향으로 그녀를 살리려 했다.

직접 만나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녀가 살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정치도 하고 궁정 암투도 하고 내부 관리도 적당히 하느라 그녀에겐 절반의 관심만을 쏟았다.

그래서 실패한 것이다.

이 여자, 피리스는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저토록 노력하고 있는데.

“피리스. 많이 힘들지?”

“아니요. 조금도 힘들지 않아요. 폐하.”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해 봐야 너한테는 안 통한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요즘 벽에 부딪혔다며?”

루페르트가 그녀 옆을 천천히 돌며 옆모습을 보았다.

확실히 전보다 살이 빠졌다.

앞에서 볼 땐 몰랐는데 옆에서 보니 로브라는 헐렁한 옷을 걸치고 있음에도 곳곳에서 피폐한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일단 불이 붙으면 하나만을 추구하는 그녀의 성질상, 그 불을 꺼뜨리라는 건 그녀보고 죽으라는 것과 같다.

루페르트는 망설이지 않고 진정한 속내를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마녀요?”

피리스가 깜짝 놀랐다.

“내가 아는 마녀가 있다. 그 마녀에게 너에게 길을 제시해 줄 거야. 적어도 네가 이상한 책을 스스로 펼치고 얻을 위험보다는 작은 것이겠지.”

“하지만 폐하.”

피리스가 난색을 드러냈다.

“저는 스승님을 누구보다 존경해요.”

“스승에 대한 가장 큰 보답은 그 스승을 뛰어넘는 거지. 지지부진한 착한 제자보다도 싹퉁머리 없지만, 스승의 명성을 높이는 제자가 그 스승에겐 더 좋은 제자가 아니겠냐?”

“그,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루페르트가 피리스의 두 손을 잡았다.

“피리스. 나는 네가 죽는 걸 원치 않는다.”

“폐하…….”

차갑게 식었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어떤 길로 가든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되는 거야. 그게 설령 샛길이라고 하더라도.”

루페르트가 그녀의 손을 놓으며 천천히 멀어졌다.

“나는 네가 죽는 걸 원치 않는다.”

피리스는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남겨진 루페르트의 온기를 느끼며 잠시 생각했다.

곧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저, 마녀에게 가 볼게요.”

루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변화.

그녀를 상징하는 속성을 다시 한번 그의 첫 번째 여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 * *

아무도 알려 하지 않았지만 이단 심문관 조서에 기재된 마녀의 이름은 헤베타였다.

비밀스러운 고대의 의술로 이웃의 목숨을 구해 주었지만 그 이웃에게 고발당해 이단 심문관에 잡힌 그녀는 끔찍한 고문을 받았고 자신이 마녀이며 악마를 숭배한다는 걸 자백했다.

불길 속에 태워지는 것이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운명이었다.

그걸 바꾼 것이 성직 선제후 아카이아 대주교다.

그가 그녀의 탁월함을 알아보고 그녀를 은밀한 곳에 빼내어 비밀스러운 의술을 활용하고자 했다.

오늘도 그는 마녀를 찾아 평소 좋지 않던 무릎 쪽의 치료를 부탁했다.

“이것으로 당분간 고통에서 자유로우실 겁니다.”

대주교는 무릎을 움직여 보았다.

노환으로 인해 걸을 때마다 무릎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특히 미사라도 집전하는 날엔 온몸에 치렁치렁 무거운 옷과 장식을 걸쳐야 했는데, 안 그래도 아픈 무릎에 더욱 큰 부담을 주었다.

그 고통은 은퇴를 고려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마녀를 안 이후부터 대주교는 예순을 넘어선 노구를 끌고 여전히 제국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걸 넘어 더욱 커다란 꿈. 자신의 옛 동료를 넘어설 야망을 실현하려 하고 있었다.

이 마녀는 대주교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런데 마녀의 반응이 평소와는 다르다.

“안할트 님.”

이것은 대주교가 마녀에게 자신을 지칭할 때 쓰라고 넘긴 가명이다.

아무렇게나 댄 이름은 아니고 평생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크로지우스가 예전에 쓰던 가명이었다.

아무리 마녀가 편리하고 유용하다고 해도 마녀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부르는 건 호라 교단을 이끄는 총책임자로서 껄끄러운 일이니까.

그런데 그 이름을 마녀가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대주교가 오면 치료해 주는 기계 같은 존재였지, 대등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인간은 결코 아니었으니.

대주교가 의외라는 얼굴로 추악한 마녀를 노려보았다.

“말해 보아라.”

“네. 다름이 아니오라, 대주교님의 몸에 좋지 않은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늙은이에게 좋은 변화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게 아니오라…….”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무슨 일인가?”

대주교가 귀찮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사납게 물었다.

바깥에서 수행원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마법사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마법사?”

대주교가 마녀를 보자 마녀가 징글맞은 미소를 머금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벽에 부딪힌 마법사가 저 같은 사람을 찾는 건 흔한 일이지요.”

“그래?”

그런데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고 시기도 좋지 않다.

‘죽여야겠군.’

이 장소는 대주교의 가장 은밀한 비밀이니.

그런데 그 마법사의 정체는 대주교의 상상을 뛰어넘는 인물이었다.

‘이 여자는?’

틀림없다.

저 황제, 루페르트가 귀여워하는 여인이다.

아름다운 용모로 보아 필경 내연의 여인이리라 생각했다.

순결 선언을 했다고 했지만 그건 대놓고 후사를 남기지 않겠다는 소리지, 어떻게 젊은 남자가 혈기를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분명 뒤로는 첩실 몇 명이나 둘 것이라는 게 대주교의 예측이었다.

그 첩실 후보가 마녀의 오두막에 찾아왔다.

그것이 대주교의 판단이었다.

“폐하가 위치를 알려 준 건가?”

대주교는 평범한 귀족처럼 분장했고 정체도 숨겼기에 피리스는 이 사람의 정체를 알 길이 없다.

단지 수행원이 여럿 있고 좋은 마차가 있는 걸 보고 고귀한 귀족 정도로 생각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이름이 뭐였더라. 피, 피, 리피? 프리…… 피?”

“……네?”

“프리?”

“아니오. 피리스예요.”

“아, 그렇구만. 리와 피가 들어가는군.”

대주교가 사람 좋은 할아버지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이름이야. 좋은 이름.”

그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하지만 행동엔 주의하게. 그러니까, 남들 눈에 잘 띄지 말라는 소리지.”

대주교의 마차가 떠났다.

피리스는 한동안 그가 사라진 방향을 가만히 보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 하시는 분이지?”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 앞이다.

저 너머에 마녀가 있다.

고심 어린 얼굴로 그녀가 천천히 오두막의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문 너머에서 냉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그 비린낸가?”

“……네?”

“정말이지 요즘은 내 주변이 바다가 된 느낌이라니까.”

마녀가 문을 열고 자신의 마녀다운 위풍당당한 모습을 피리스 앞에 드러냈다.

베르크 란 정도는 아니지만, 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녀를 보며 마녀가 빙그레 웃었다.

“썩어 가는 바다의 악취가.”

마녀가 피리스를 보며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너.”

“네.”

“머리에 이상한 게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네?”

“아까 그 노인처럼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아, 우울한 이야기는 됐고, 들어와. 마법사지? 응? 내게 고대의 지식을 배우러 온 거지?”

마녀는 그 무시무시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마치 인심 좋은 할머니처럼 피리스를 맞이했다.

뜻밖의 환대와 마녀의 친절함에 피리스는 어리둥절하며 자신에게 기회를 준 마녀를 결의에 부릅뜬 눈으로 응시했다.

‘반드시 벽을 뚫고도 살아나겠어.’

루페르트와의 약속이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가 어린 마법사의 고양이처럼 커다란 눈에 단호하게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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