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29. 성 크리오네 (5)
제국의 수도엔 늘 5천 명에 달하는 상비군이 있다.
그중 3천여 명은 제국의 성벽을 지키는 주둔군이고 나머지 2천은 황궁을 지키는 근위대다.
주둔군은 제국 보병대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제 정착을 하려는 경험 많은 병사들로 이루어지는데, 젊음의 힘참보다는 노련함과 끈기를 갖췄고 전쟁의 부속품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히 알고 있다.
반면 근위대는 젊고 주목을 받고 싶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 계층의 자제가 주로 지원한다.
근위대는 다시 근위 기병대와 황궁 경비대로 나뉘는데 여하한 군대가 그렇듯이 기병대 쪽이 보다 고귀하고 중요한 취급을 받는다.
이 황궁 근위대는 황제보다는 황궁이라는 제국의 심장을 수호하는 것이 주 임무로 항상 정형화된 순찰과 훈련 등 기계적인 일과만을 반복할 뿐이지만 오늘은 이례적으로 근위대 전체가 정해진 일과를 깨고 황궁 주변에 소집됐다.
“폐하를 노리는 불온한 무리가 테타우에 집결했다는 소문이 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서 폐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 우리는 물론 가문과 후손, 선조의 이름에 먹칠을 가하는 일이다. 샅샅이 주변을 수색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
두 번이나 크리오네에게 당한 루페르트는 이번엔 아예 이를 갈았다.
아예 근위대 전체를 풀었다.
전생에서 루페르트를 버렸던 근위대지만, 지금은 루페르트의 충실한 종복이다.
이번에 새로 취임한 황궁 근위대장은 루페르트가 제위에 오르기 직전 궁내부를 장악한 골트문트가 꽂아 넣은 인간이지만 루페르트는 그 근위대장을 잘 알고 있다.
쿠르트 자우버.
잔뼈 굵은 용병대장 출신으로 귀족의 피는 얕지만, 키가 크고 용모가 수려하고 언변이 뛰어나 출신에 관계없이 고귀해 보이는 자다.
그는 자신의 용모에 어울리는 자리를 갈구했는데 그 자리를 줄 사람은 결국 루페르트나 골트문트 같은 권력자다.
당시에야 루페르트는 이름만 황제인 꼭두각시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알겠습니다. 폐하. 즉시 휘하의 근위대를 소집해 황궁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까지 들춰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겠습니다.”
이제는 루페르트는 그가 원하는 자리를 줄 힘과 권력이 있다.
‘이 인간이 이렇게 싹싹한 사람인 줄은 과거엔 몰랐지.’
딱히 악감정은 없다.
적어도 근위대는 쿠르트 자우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으니까.
쿠르트 자우버는 테타우가 융커스 베샤문트에게 공성을 당할 때 석연치 않은 사유로 죽었다.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근위대 장교 하나가 같이 술을 먹다 모닥불에 달군 칼로 배를 찔러 죽였고 의식이 남아 있는 채 불구덩이에 던져져 타 죽었다고 한다.
그 장교는 상의를 벗어 어깨에 새겨진 불경한 이교의 표식을 드러내며 자신이 악마 숭배자이며 악마가 자신을 보호한다고 말하며 나머지 장교를 죽이려 들다가 쿠르트 자우버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그래. 근위대장. 그대의 말을 들으니 절로 안심이 되는군.”
루페르트는 쿠르트 자우버를 좋게 보았다.
오히려 그처럼 투명하게 이익만을 좇는 인물이 지금 같은 상황에선 매력적인 인재다.
가문의 명예니, 선대의 신의니, 태고의 핏줄이니 지난 수백 년간 고위 가문에서 층층이 쌓은 그들만의 범주만을 취급하고 나머지를 배격하는 자들은 설득도 이해도 불가능하니까.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처럼 무참하게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 말이다.
“폐하. 요청하신 지역을 탐사 결과, 특별한 암살자의 징후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 마차는 뭔가?”
루페르트는 크리오네가 나타나기 전부터 황궁 앞에 불길하게 서 있는 지붕을 씌운 짐마차를 불편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저기서 나타났다.
저 좁아 보이는 짐마차에서 그 거인이 나타났고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루페르트의 일을 모두 정지시켜 버렸다.
“알아보겠습니다.”
황제가 언급했기에 쿠르트 자우버 본인이 직접 소수 기병을 이끌고 마차 안을 살폈다.
그가 마차를 살피는 사이 황궁 주변엔 황궁을 드나드는 귀족과 시민, 성직자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분주히 움직이는 황제와 근위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번쩍거리는 장식용 갑주로 무장한 근위대가 황궁 밖에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니.
곧 쿠르트 자우버가 루페르트에게 돌아왔다.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평범한 마차입니다. 혹 화약이나 기타 불온한 물건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마차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누가 저걸 가지고 왔는지 알아봐 주게.”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대성당의 높은 첨탑을 조금은 맥빠진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정말이지 진이 빠지게 하는군.’
또 그 장광설을 들어야 한다.
순결제와 회색 수도회, 그에 얽힌 어지럽고 복잡하기만 한 교회법과 그 적용에 관한 문제를.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 평판을 이룬다는 걸 모를 정도로 루페르트는 어리석지 않다.
특히 상대는 제국의 영적 세계의 절반을 장악하는 구교의 대표자 호라 교단이다.
가뜩이나 순결제의 흉내를 내려는 그가 교단을 무시하는 행동을 한다면 의도가 의심받을 것이다.
하지만 대낮부터 이런 난리법석을 피우는 것 또한 평판에 좋다고 할 수 없다.
암살을 두려워해서 여기저기 들쑤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겁쟁이라고 오인받을 수 있으며, 이런 일이 반복되면 미쳤다는 소문마저 들을 수 있다.
실제로 제국의 몇 안 되는 암군이라 평가받는 600년 전의 황제, 불면제는 칭호대로 잠조차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암살을 두려워하다 결국 자살 비슷한 형태로 생을 마감했다.
‘이번엔 없겠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소라고둥 위에 손을 올린 채 루페르트는 익숙한 복도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반복된 가르침이 좀을 쑤시게 했을 뿐이다.
교회법에 관한 설교가 끝나자마자 루페르트는 시간의 책갈피를 꺼내 현재 시점을 저장했다.
“하아.”
정말이지 다시는 듣기 싫었다.
그건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특히 루페르트처럼 위로받지 못하는 지친 정신에겐 더더욱.
* * *
“…….”
늦은 오후.
루페르트는 과거의 문헌을 읽고 있었다.
정신과 영혼에 관한 이야기로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그릇과도 같다고 한다.
고귀하고 훌륭한 부모를 만나는 건 좋은 흙을 얻는 것과 비견되며, 양질의 교육을 통한 성장은 적절하고 잘 관리된 가마 안에서 구워지는 것을 뜻한다. 성년기에 이르면 그 그릇은 비로소 가마 밖으로 나와 인생이라는 것들을 담게 되는데 큰 그릇은 많은 것들을 담을 것이고 세련된 것은 귀하고 향기 나는 것을 담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 그릇은 깨질 수도 있다. 용량보다 많은 걸 담으려 할 때, 거칠고 날카로운 것을 담을 때, 함부로 놀려 바닥에 떨어뜨린다거나 부주의한 관리로 부딪쳐 상처가 날 때.
그러한 것들이 누적되면 그 그릇은 깨진다.
깨진 그릇은 인생을 담을 수 없다.
그릇이 깨진 자는 구빈원의 광인 수용소나 교단에서 관리하는 정신 병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신은 그릇이라.”
모든 의견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정신이 깨질 수도 있다는 부분은 뼈저리게 동감한다.
루페르트는 이미 몇 번이고 위태로운 것들을 보았다.
봐서는 안 될 것,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 그러한 것들은 단지 술이나 휴식을 취한다고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루페르트의 정신이라는 그릇에 흠집으로 남았다.
저서에서는 그 흠집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과거의 책이 그러하듯 기도를 하면 낫는다고 하는데, 루페르트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그에게 상처를 준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그의 여신님인데.
애당초 호라의 신도는 더더욱 아니고.
‘결국은 잘 쉬는 게 답인가.’
휴식을 취하는 것도 재주다.
꼭두각시 시절 허구한 날 놀아 봐서 잘 안다.
멍하니 있다고 마음이 새로워지고 개운해지는 게 아니다.
재미있는 것, 흥미로운 것,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충분한 보상이 있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에 루페르트는 정부를 두었다.
울피아나가 동침을 거부하는 데다 황제의 개인사 따윈 터럭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으니까.
다만 정부가 있다는 걸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지나가며 차가운 한마디로 루페르트를 조롱할 뿐이었다.
“자석의 양극이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하는데, 자석만 그럴까요? 저는 천한 것들이 천한 것들을 서로 끌어당기는 걸 잘 안답니다.”
당시 루페르트는 총 세 명의 정부를 두었는데, 모두 루페르트를 떠났다.
만나는 순간만큼은 루페르트에게 위안을 주었지만, 그때뿐이었고 많은 것들을 요구해 왔다.
금전과 관직, 귀한 사치품, 다른 귀족 앞에서 그들을 드러내는 것.
그중 한 여성은 대담하게도 황후 자리를 원했다.
셋 중 가장 아름답고 엉뚱했던 여인이었다.
‘도나.’
그 여자는 지금도 테타우에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 나이는 15세가량으로 아마 고향인 앙쥬 왕국에서 부모와 대들고 싸우면서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루페르트가 어린 앙쥬 출신 계집에 빠졌다고 손가락질을 했지만, 세 명의 정부 중 루페르트를 가장 기쁘게 한 건 그녀였다.
다른 정부들은 루페르트가 꼭두각시라는 걸 알고 우호를 가장하면서도 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한 반면 도나는 적어도 편견은 없었다.
물론 이번 생에서 그런 정부를 둘 일은 없다.
당시엔 루페르트도 극한에 내몰렸고 과거 탕아 시절의 습벽을 관성처럼 이어 갔을 뿐이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처럼 삶의 활력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처럼 원인 모를 공포감에 젖어 황궁을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도 말이다.
잠시 궁리를 하던 루페르트는 근래 뭐가 가장 즐거운 일이었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딱히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오싹하리만치 즐거운 일이 없었다.
“…….”
돌이켜보면 황제가 된 이후 그의 삶은 대부분이 고통이고 고난이며 가끔의 승리만이 있었을 뿐이다.
개인 루페르트로서 얻은 위안은 0에 수렴한다.
물론 루페르트가 원해서 벌어진 결과겠지만 슬슬 한계가 드러나는 건 명약관화한 사실.
그 엄혹한 현실에 부딪히자 루페르트는 조바심을 느꼈다.
즐겁고 위안이 되는 걸 찾아야 한다.
여자를 제외한.
여자를 생각할 때 잠시 피리스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간 건 사실이다.
그녀의 미소가 꽁꽁 감추고 있던 루페르트의 욕정을 자극한 것도 사실이다.
‘여자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내가 정했으니까.’
지금 흐름으로는 그의 아내는 한 명밖에 없다.
울피아나. 그 울피아나.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서 정원에 놓인 돌멩이를 발로 찼다.
경쾌하고 가볍지만 묵직한 힘이 실린 그 발차기는 돌멩이를 멀리 있는 높은 담장을 거의 넘을 듯이 상승하다 벽을 맞고 튕겨 나왔다.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시중을 들던 시종들이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보지만 루페르트는 그들의 시선 따윈 터럭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바로 그거야.’
약간의 위안을 찾았다.
축구다.
그가 좋아하고 잘했던.
“폐하. 공 말입니까?”
시종장에게 공을 부탁했을 때 시종장은 난색부터 지어 보였다.
축구라는 하층민이 하는 놀이를 황제가 한다는 게 못마땅하다기보다는 황제의 위신에 영향이 갈까 싶어서다.
즉위 초기였다면 루페르트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테타우에서 공 좀 찬다는 사람도 구해 줘. 나도 가끔은 몸을 움직여야겠어.”
“하오나 폐하. 제국의 황제신 폐하에게는 더 위신에 어울리는 것들이.”
“이를테면?”
“사냥이 가장 전통적인 선택지이겠지요.”
“솔직히 총 쏘는 거 말이야.”
루페르트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를 향해 덮쳐 오던 것들을 생각했다.
설인, 거신상, 붉은 구체, 고목 같던 성인, 그리고 크리오네.
“쓸모가 없더라고.”
실로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