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29. 성 크리오네 (4)
“성 크리오네 말입니까?”
일곱 명의 제국 성인 중에서도 성 크리오네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성인이었다.
흑사병보다 약하다고 하지만 천연두도 걸리면 높은 확률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니까.
한마디로 신통하지 않다는 소리다.
게다가 크리오네는 천연두에 걸린 적도 없다.
모공이 크고 추악한 외모가 곰보를 연상케 해 대충 끼워 맞추기로 유행하는 질병 중 하나를 별명으로 붙였을 뿐이다.
“그래. 그자에 대해 잘 아나?”
루페르트의 세 가신 중 가장 폭넓은 지식을 가진 건 대학을 나온 베르너가 아닌 오토 브라에였다.
대학은 이름과 달리 학문에만 매진하는 곳은 아니다.
만슈타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술 먹고 패싸움하고 깽판 치는 걸 먼저 배운다.
그 나름 살 만한 청춘 중에 제대로 공부해서 박사 지위를 얻은 사람은 적고 교수가 되는 사람은 더 적다.
오토 브라에는 대학에 가는 대신 훌륭한 가정 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학식을 배양했다.
특히 그는 신학 쪽에도 조예가 깊었다.
“크리오네, 크리오네라. 그리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요. 다른 성인에 비해 큰 족적을 남기지도 못했고요. 하지만 말입니다. 크리오네와 관련해서 꽤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재밌는 이야기?”
“네. 들어 보시겠습니까?”
성 크리오네라 불린 자는 제국인이 아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보며 알 수 있듯이 그는 해가 뜨는, 그래서 해가 더 가까이 있는 동쪽에서 왔다.
동방 제국이 성립되기 전 지금은 멸망한 나라에서 왔다는 그는 당시 제국 국경을 빈번하게 침범하던 동방 기마 약탈자의 일원이었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겁간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악마와 다를 바 없는 그는 제국을 세울 운명의 티그리트와 조우했고 보기 좋게 패했다고 한다.
티그리트의 전사들은 잔학무도한 크리오네를 죽일 걸 청했지만, 티그리트에겐 다른 계획이 있었다.
룸 제국 최강의 검투사 출신이던 그는 자신 밑에서 목을 짓밟힌 채 숨을 헐떡거리는 거인의 얼굴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한 번에 읽어내고 빙그레 웃었다.
“나와 한 번 더 겨루고 싶나?”
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의 밑에서 나의 노예로 일해라. 내가 만족하는 때, 생사를 건 결투를 해 줄 것을 약속하겠다.”
그것이 동방의 사악한 거인 크리오네가 티그리트의 장막 아래 들어온 이유였다.
그러나 티그리트는 그와 결투를 해 주지 않았다.
그 강적을 다시 상대하는 것이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악업에 대한 죗값을 거짓이라는 악업으로 복수를 하고자 한 것인지 그것은 오직 노예만이 알고 있으리라.
중요한 건 크리오네는 원하던 재결투를 하지 못한 채 가장 가혹하고 지독한 전장에서 싸웠고 포로로 붙잡혔으며 갖은 고문 끝에 죽임당해 그 목이 성문 아래 내걸렸다는 것이다.
“제국 성인들이란 하나같이 비참한 운명을 타고난 느낌이야.”
루페르트가 가볍게 몸을 떨며 말했다.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성인으로 축성될 일은 없었겠지요.”
“그대는 성인이 될 기회가 있다면 받아들이겠나?”
“지금은 아닙니다만 나이를 먹으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토 브라에의 사심 섞인 말에 루페르트는 피식 웃었다.
아무튼 크리오네의 과거를 어렴풋이나마 알아냈다.
남은 건 그를 상대하는 것뿐이다.
언제 덮칠지는 알고 있다.
루페르트는 황궁 앞에 죽음의 함정을 파 놓았다.
다섯 문의 대포와 수백 명의 용감무쌍한 병사들이 어둠 속에 숨어 암살자를 기다렸다.
‘대낮에 암살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오히려 잘됐어. 지긋지긋한 제국 성인 하나를 더 줄일 수 있는 기회니.’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을 생각했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정말이지 그들 조손은 내게 몇 번이나 큰 도움을 주는군.’
한 끼 식사의 은혜라는 것이 이토록 요긴하게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도 원하는 바가 있기에 루페르트를 돕는 것이겠지만, 루페르트는 이미 그들이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베르크 란이 원하던 건 무엇이지. 일단 이번 일이 끝나면 마를로네에게 물어봐야겠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해 줄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설득을 할 것이다.
거사의 날은 다가오고 있다.
루페르트는 이전처럼 소수의 수행원만을 거느리고 황궁을 나섰다.
독신 선언을 위해 호라 교단의 고위 주교와 논의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루페르트는 선제의 벽 아래 정차된 마차를 보았다.
‘저 안에 있겠지.’
루페르트는 태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막을 수 없던 거한, 크리오네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그런데.
“음?”
마차 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루페르트가 황궁에서 서른 걸음 거리의 대성당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루페르트는 발걸음을 멈추고 좌우에 명했다.
“저 마차를 뒤져라.”
기병대가 마차에 접근했다.
잠시 후 기병 장교가 소식을 전했다.
“마차 안엔 아무도 없습니다. 빈 마차입니다.”
“……그래?”
루페르트는 실망감을 드러냈다.
‘뭐가 문제지? 설마 내가 역으로 반격하려는 걸 미리 읽고 줄행랑을 친 것인가.’
이쪽이 아마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일 것이다.
크리오네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교활하고 눈치가 빠른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수백 명이나 동원한 함정이 자연스레 들킬 수밖에.
‘다시 회귀를 해야 하나.’
루페르트는 망설였다.
다시 회귀를 한다고 해서 그 괴인과 마주칠 수 있을까?
괴인을 홀로 압도할 수 있는 소수 정예가 있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대규모 병력 동원만이 그 상식을 뛰어넘는 제국 성인을 처치할 유일한 방법이다.
제국의 황제라는 자리가 주는 자존심도 회귀를 주저하게 했다.
‘암살자 따위를 피해야 하는가? 제국의 황제가?’
노예제 티그리트는 그 자신부터가 초월적인 전사다.
창업 군주답게 티그리트는 무수한 암살의 위협을 받았다.
그때마다 티그리트는 그가 가장 잘하는 것, 살인의 기술을 발휘하며 암살자를 살해했다.
티그리트처럼 하라는 건 아니지만 선대의 모범이 남은 제국은 암살을 비겁하고 비열하며 이민족이나 하는 짓이라 치부했고, 실제로 암살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있다.
루페르트도 그 풍조를 이어받은 제국의 황제다.
겨우 암살에 벌벌 떨며 해야 할 일도 못 한다면 그거야말로 티그리트의 후예답지 않은 짓이라 생각했다.
장고 끝에 루페르트는 그대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래. 겨우 암살자다. 약하니까 암살이나 하는 거다. 그 크리오네라는 자는 에디지우스보다는 명백히 아래고 판텔레온보다 아랫급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루페르트에겐 소라고둥이 있다.
이번엔 워낙 느닷없는 기습이라 제대로 불지 못했지만, 다음은 다를 것이다.
루페르트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너무 느슨했다.
근래의 성공에 취해 자만했다.
두 눈을 감고 반성했다.
언제든 소라고둥을, 여신님의 성물을 옆에 두고 수족처럼 쓰리라 다짐하며 루페르트는 현장을 떠났다.
* * *
“독신 선언이라. 위대한 결단이십니다. 하지만 폐하. 그건 알려진 만큼 간단한 게 아닙니다. 독신 선언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대외에 알려진, 인상적인 부분만을 추린 구호에 지나지 않으며…….”
제국의 법도는 복잡하다.
특히 호라 교단이 장악하다시피 한 교회법은 교단법 학자라는 독자적인 집단 속에서도 의견이 갈릴 정도로 상충되는 사례가 많고 잘 정리되지도 않았다.
루페르트가 사전에 호라 교단 고위 성직자를 만난 것도 그 때문이다.
“순결제께서는 교회법적으로 한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그 수도회의 규율에 의해 독신이라는 지위를 지킬 의무를 부과받은 것입니다. 다만, 교회법에 의하면 군주는 그 왕관을 벗기 전까지 입회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성직에 들어서고자 하는 자는 모든 걸 벗어던지고 맨발로 들어와야 한다는 소리지요. 하지만 제국의 황제는 누구보다 고귀한 자, 그 왕관을 벗을 수도 없고 그 위에 다른 자가 있는 것 또한 용납해서는 아니 됩니다.”
길게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졸음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더럽게 복잡하군. 좀 쉽게 하면 안 될까. 이렇게 모든 걸 과거, 과거에 돌리니 신교가 인기를 얻는 거지.’
신교가 반항적인 군주들에게 인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군주의 신하와 상인, 부유한 시민들이 빠르게 개종하는 현상을 깨끗이 설명할 수 없다.
신교도 신교만의 장점이 있다는 소리다.
루페르트는 신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대중이 가지는 추상적인 이미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신교 지역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만 들어 봐도 알 수 있다.
교단 신부님 골방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교회 목사님 독채엔 향긋한 복음이 코를 간질이네
“……순결제께서 그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내놓은 해결책이 해당 교회 합의가 있기 전 설립된 최초의 수도회에 들어가는 것이었죠. 그 수도회는 건물은 남아 있으나 수사(修士)는 한 명도 없습니다. 오직 단 한 명을 위한 수도회이기 때문입니다.”
“그 수도회 이름이 뭔가?”
“회색 속죄회입니다.”
“회색이라. 그건 재의 색이 아닌가?”
“부정되고 망령된 것들을 불태운 잿더미는 부정한 것을 태워 내고 남은 것이기에 어떻게 보면 가장 깨끗하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 그렇게 하지. 회색도 좋아 보이는군.”
회색이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답이 정해진 이 탁상공론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다.
당장 할 일이 태산이다.
오후엔 요하네스와 카렐리아의 재정에 관해 논해야 한다.
상비군을 늘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재정 지출이 있어야 하고 그 돈은 카렐리아 시민의 주머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폐하는 회색 속죄회의 유일한 수사이자 수도원장으로 황제와 수도사의 길을 양립하실 겁니다.”
“그거 훌륭하군. 그래. 그런데 그 수도회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안 되는 건 아닐 겁니다. 모든 수도회는 원칙적으로 모두에게 문호가 열려 있으니까요.”
“그건 곤란한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울피아나. 그 여자. 설마 수도승, 아니 수녀로 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이다.
루페르트는 곧 피식 실소를 머금으며 넌지시 물었다.
“달리 더 알아야 할 게 있나?”
“회색 수도회의 규율이 있습니다. 순결의 의무는 그 규율 중 하나에 불과하죠.”
“고기를 못 먹거나 머리를 깎아야 한다는 의무 따윈 없겠지?”
“그런 건 없습니다.”
“나중에 서면으로 보내주게. 그 정도는 굳이 여기서 듣지 않아도 될…….”
루페르트의 말이 멈췄다.
자신과 교회법 담당 성직자가 자리 잡은 서고의 책이 갑자기 한 번에 울리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뭐지? 기분 탓인가?’
아니다.
다시 한번 책들이 살짝 뛰어올랐다가 저마다의 간격을 두고 차례대로 서가에 내려앉았다.
쿵! 쿵! 쿵!
뒤이어 급격하고 폭력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아아아악!”
“침입자다!”
그리고 아우성.
콰쾅!
벽이 무너지는 소리.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수많은 괴이 앞에서도 의연함을 유지했던 루페르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순수한 짜증 때문이다.
곧 문이 산산이 조각나며 두건을 뒤집어쓴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 성인 크리오네.
“나는 크리오네다.”
그가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이미 소라고둥을 입에 대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우--
회귀의 바람이 루페르트를 과거로 다시 데리고 갔다.
“…….”
어두운 복도.
루페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적은 어쩌면 사람의 신경을 긁는다는 점에서 가장 악랄할지도 모르겠다.
“또 그 장광설을 들어야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