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27. 더 끔찍한 것 (1)
이상한 소녀다.
명랑하고 밝은 미소를 두르고 있지만, 미소로도 감출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역력하여 모두가 그것을 느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지겔슈타트였다.
그는 리프니에와 마주치고서 마치 고양이를 본 쥐처럼 내장이 떨리는 전율 속에 잠겨 들었다.
그가 태어난 이래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뭐지, 저 소녀는? 대체 뭐냔 말이냐.’
마치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거부하는 느낌이랄까.
알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대학에서 배운 금단과 금기가 뇌리를 뱀처럼 휘감았다.
위대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외면을 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되는 걸 들여다본 대가는 혹독하다.
자신은 물론 소중한 모든 걸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으니.
저 소녀에겐 그런 위험한 금단의 냄새가 났다.
‘못 본 척하자. 그게 답이다.’
그뿐만 아니다.
한스 징펠만도, 마를로네도 지겔슈타트처럼 확실하진 않지만 리프니에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그 결과 기이한 침묵이 리프니에와 루페르트를 사이에 두고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녀의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침묵 속에서 리프니에가 앞장섰다.
“자, 그럼 출발을 해 볼까요?”
리프니에가 마차에 올랐지만, 누구도 마차에 탈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오직 단 한 명, 루페르트만이 거부감 없이 마차에 동승 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각자의 말을 탔고, 말이 없는 마를로네는 마지못해 마부석에 앉았다. 마부의 얼굴을 보고 마차 뒤편으로 돌아가 앉아 난간을 붙잡았다.
그녀보다 작고 어린 쌍둥이 도제들이 조랑말을 탄 채 그녀를 지나치자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한스 징펠만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마를로네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 도제가 아니라 저 마부가 이상하다고!’
마치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느낌이랄까.
불길한 예감이 들어 죽음의 냄새를 추적했으나 이상한 구석은 없었다.
하지만 불길한 건 불길한 것.
마를로네는 기꺼이 불편을 감수했다.
‘그 여자아이. 결투장에 나타났던 그 반짝이던 사람? 닮은 거 같은데, 전혀 느낌이 달라. 전에는 사람 같은 느낌조차 안 들었는데 오늘 만난 건 사람이었지. 응, 겉은 확실히 사람 같았어.’
의문 속에서 마차가 출발했다.
중간에 만슈타인의 기병이 마차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으나 그들은 마차에 채 접근하기도 전에 말 머리를 돌렸다.
검은 마차는 순탄하게 렌타이어마르크의 가도를 따라 늪지대로 들어섰다.
렌타이어마르크의 악명 높은 늪지대는 소문대로 악취 섞인 해로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를로네는 진녹색의 늪에서 조부에게 들었던 오싹한 소문을 연상했다.
빈궁한 겨울이 다가오면 렌타이어마르크의 어머니들이 불필요한 자식을 베개로 눌러 죽여 늪 속에 던져 버리는데, 어떤 아낙네가 갓 죽인 아이의 시체를 늪 속에 던져 넣었을 때 늪 안에서 썩어 가는 수많은 아이들이 고개를 쳐들고 아낙네를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봤다는.
‘이 비참한 동네에서 도망가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어.’
마를로네는 황궁에 있을 조부를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황제 앞에서 공적을 세울 수밖에.’
조부의 소원은 그녀의 소원과 맞닿아 있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소원 속엔 조부의 소원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걸 위한 원정이다.
끔찍한 악취와 살풍경한 곳이지만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굳은살이 밴 자신의 손바닥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저쪽에 마을이 보입니다.”
한스 징펠만이 음울한 숲과 늪 옆에 자리 잡은 촌락을 가리켰다.
[ 호스 ]
이끼 낀 쓰러져 가는 간판에 적힌 이름이다.
마을에서는 삶의 흔적이 희미해 보였다.
인기척도 없고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굴뚝에도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다.
버려진 촌락이다.
루페르트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마을을 보며 리프니에에게 물었다.
“여기에 뭔가 있습니까?”
“은둔자 한 명이 살고 있을 거예요.”
“어떤 사람입니까?”
“렌타이어마르크에 올 때 커다란 바위를 본 거 기억하세요?”
“바위. 바위라…….”
기억을 가다듬던 루페르트는 렌타이어마르크 입구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닮은 거대한 조각상을 떠올렸다.
‘맞아. 분명 여신님께서 언급하셨지.’
“그때 여신님께서 말씀하신 그 바위 말씀입니까? 스스로 움직인다는.”
“기억력이 좋네요.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가 미소로 화답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루페르트는 여신이 농담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짜 움직인다는 건가. 그 바위가.’
“그 바위를 움직이는 열쇠를 그 은둔자가 가지고 있지요.”
“어떤 사람입니까?”
“좋은 사람은 아닌 걸로 기억해요.”
리프니에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루페르트의 전사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말이 안 통할 수도 있겠지요.”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 좋은 예감밖엔 안 드는데.’
마차의 문이 열렸다.
“자, 가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는 내리지 않았다.
혼자 가라는 소리다.
루페르트는 만일에 대비해 시간의 책갈피로 현재를 기록했다.
마차 밖엔 시간이 멈춰 버린 마을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는?’
수백 년 전에 멈춰 버린 마을이다.
고고학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고 지식도 얼마 없지만, 스러져 가는 폐허의 양식은 어지간히 오래됐다는 도시나 마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조잡하고 원시적이었다.
드문드문 들어선 룸 제국 양식 건물이 이 마을이 세워진 연대를 어렴풋이 말해 주었다.
“룸 제국의 식민지로 보이는군요. 이 마을은.”
일행 중에 가장 유식한 지겔슈타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룸 제국의 식민지?”
“룸 제국 전성기엔 우리 제국은 물론이고 북부인의 땅까지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하죠. 대부분은 사라지거나 다른 마을, 도시로 변했지만 여기는 과거 룸 제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군요.”
지겔슈타트가 마을 중앙에 서 있는 외로운 오두막을 가리켰다.
“저기에 사람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을 불러 모았다.
“나와 함께 한 귀인께서 말씀하시길, 이 마을엔 마술적인 힘을 가진 은둔자가 있다고 한다.”
루페르트의 발언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지겔슈타트는 의문을 표했고 마를로네는 쓴웃음을 머금었지만, 한스 징펠만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왜 황제인 내가 이런 곳까지 은밀히 와서 은둔자를 찾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제국 성인이라는 괴물과 손을 잡았다. 미네아의 붉은 벌레는 그 증거. 그들이 악마와 손을 잡았다면 우리 또한 악마를 물리칠 수단을 확보해야겠지.”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한 후 루페르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폐허 속에 외로이 서 있는 건물을 노려보았다.
“저 오두막 안에 고대의 은둔자가 살고 있다. 내 친히 그분을 설득할 것이다.”
루페르트가 한스 징펠만에게 손짓했다.
“이번엔 함께하세.”
웃음에 대한 보답이다.
한스 징펠만은 기꺼이 루페르트의 옆을 지켰다.
둘은 오두막을 향해 걸어갔고 나머지는 둘의 뒤를 따랐다.
“어떤가. 도펠죌트너.”
지겔슈타트가 마를로네에게 말을 걸었다.
“네? 뭐가요?”
“저 안에서 죽음의 기운이 풍기는가 묻고 있는 거다. 일일이 풀어서 설명을 해야 하나?”
“저는 못 배우고 무식해서요. 돌려 말하면 알아듣지 못한답니다.”
“……뭐가 보이나?”
마를로네가 오두막을 노려보았다.
오두막 안엔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는데요.”
“그래?”
지겔슈타트가 눈을 찡그리며 오두막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그도 딱히 오두막에서 특별한 기운을 느끼진 못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지? 황제 폐하가 말씀하시는 은둔자란.’
루페르트와 한스 징펠만은 오두막 앞에 섰다.
한스 징펠만이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계시오? 안에 계시오?”
오두막 안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사람이 있다.
지겔슈타트와 마를로네는 언제라도 싸울 수 있게끔 경계 태세에 들어갔고 한스 징펠만의 도제들은 가방을 내려놓고 언제든 무기를 조립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 시간에도 한스 징펠만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황제 폐하의 행차이시오. 안에 사람이 있다면 응당 문을 열어 그대의 황제를 맞이하시오.”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엔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키가 작은 사내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황제 폐하가 당신 앞에 있소. 예를 갖추시오.”
한스 징펠만이 사내를 독려했다.
그러나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루페르트를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후,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에겐 황제가 없지만 도움이 필요한 것 같군.”
사내가 두건을 벗었다.
두건 너머엔 익숙하지 않은 이국적인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밀림 부족? 하브루타인? 동방 제국? 그것도 아니면 신 칼란의 사람들인가. 아니, 어느 쪽도 아니야. 내가 모르는 민족이다.’
“뭐가 필요한가.”
루페르트는 경직된 한스 징펠만에게 은밀히 손짓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말라는 신호였다.
‘어떤 인간인지는 알 수 없다. 허나.’
지금은 이 사람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 수밖엔 없다.
터무니없는 제국 성인을 이기기 위해서 말이다.
“그대가 거대한 석상을 움직이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루페르트가 담담하게 말을 걸었다.
사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지?”
“그건 말할 수 없다.”
“악마에게 들었겠지?”
사내의 입에서 침 한 줄기가 새어 나왔다.
주름진 손 또한 미세하게 경련했다.
‘악마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루페르트는 표정을 관리하며 담담하게 답했다.
“악마는 아니다.”
“악마가 시켰나?”
“악마가 아니라고 했다.”
“악마가 시켰다면 따라야지. 하지만 악마가 아니라면 따를 수 없다!”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할 정도로 악마에 집착하는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신이 말하는 악마가 누구지?”
루페르트의 물음에 사내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하얗게 질렸다.
곧 그의 벌어진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고, 온몸에서 그냥 봐 주기 어려울 정도의 경련이 일었다.
“마, 말할 수 없다!”
가까스로 사내가 경련을 이겨 내며 대답했다.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과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나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저 사내는 ‘악마’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는걸.
그렇다면.
“그래. 악마가 날 시켰다.”
이용하는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알 수 없는 사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미친 사람처럼 떠들어 대더니 루페르트에게 비열하게 절을 했다.
절조차 제국에서 하는 것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아무렴 어떤가.
저 은둔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 루페르트 가우저. ]
‘여, 여신님?!’
[ 방금 그 말, 취소하세요. ]
순탄치가 않다.
루페르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는 농담이고.”
은둔자가 고개를 들었다.
“제국의 황제라는 작자는 말을 이리 가볍게 하나? 내 고향에서 그런 짓을 하면 가죽을 벗기고 혀를 뽑았을 것이다.”
“훌륭한 고향이군. 그래, 이름이 뭔가?”
“이름? 그런 건 진즉에 잊었지만.”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로브를 훌러덩 벗었다.
벗은 로브 뒤엔 햇볕에 탄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가 드러났는데 그 몸엔 마치 그림 같은 문자가 무질서하게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사내가 자신의 몸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하게 사람 가죽 벗기는 놈.”
“?”
“그게 내 이름인 모양이다.”
사내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가리켰지만, 루페르트의 눈엔 그다지 뜻을 알고 싶지 않은 흉측하고 괴괴한 그림만 보일 뿐이었다.
‘이름은 말하지 말자.’
“잠깐 안에 들어가서 단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한스 징펠만이 머뭇거렸다.
루페르트는 그를 돌아다보며 무언의 언질을 줬다.
여긴 괜찮으니 안심하라고.
대신 루페르트는 목에 걸린 소라고둥에 손을 올렸다.
‘어쩔 수 없다. 여신님의 이야기는 영혼 동맹이라고 해도 함부로 입 밖에 내기 곤란하니까.’
그렇게 해서 루페르트는 사내의 오두막 안에서 단둘이서 독대했다.
오두막 안엔 강렬한 시체 냄새가 났다.
사내가 양초를 켜자 그나마 희미한 빛이 나왔으나, 그 양초에서도 이루 말하기 어려운 역한 냄새가 났다.
루페르트는 구역질이 나오는 걸 참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는 여신 리프니에님의 사자다.”
“뭐?”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건 또 뭐 하는 잡신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