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02화 (102/225)

102화 26. 성 에디지우스 (3)

루페르트는 어두운 마차 안에 있었다.

이미 전쟁의 승부는 기울었다.

만슈타인이 도시를 차단했고, 황제의 이름으로 지원병을 가로채 병력을 불렸다.

하지만 그걸로 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회귀했다.

루페르트는 이제 사람의 모습을 한 리프니에를 응시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여신님.”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혹적이고 뇌쇄적인 미가 느껴지는 아찔한 미소였지만, 루페르트에겐 그저 끔찍한 추억을 부르는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 소녀의 얼굴은 그가 두 번째 부모로 여겼던 안젤리나와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으니까.

그녀가 콧노래를 불렀다.

제국에서 널리 연주되고 불리는 곡조와 전혀 다른 이국적인 곡조.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콧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옛날 옛적에 심술 맞은 왕이 살았답니다.”

어둠 속에서 소녀가 화롯가에서 동생에게 책을 읽어 주는 소녀처럼 말했다.

“왕은 매력이 없었어요. 얼굴은 그럭저럭 봐줄 만했지만, 성격이 마을에서 놀림 받는 곰보 꼽추의 얼굴보다 못생겼지요. 낳아 준 부모도, 아내도, 첩도, 자식도 모두 그를 싫어했답니다. 그래서 그는 악마를 불러냈어요.”

처음 루페르트는 리프니에가 무슨 의도로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야기가 진전될수록 리프니에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과거의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가.’

리프니에가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주세요.’라고.”

리프니에가 미소 지은 얼굴로 말을 멈추고 루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루페르트 가우저. 이 이야기는 희극일까요? 비극일까요?”

“글쎄요. 비극 같군요.”

“땡-. 희극이랍니다.”

“희극요?”

“네. 누구도 믿지 못하던 왕이 결국 모두와 한 몸이 됐으니까요.”

“설마…….”

루페르트는 선제후 궁전 앞에서 서로를 깨물며 하나의 구체를 이룬 셀 수 없는 벌레들을 떠올렸다.

“미네아의 붉은 벌레?”

리프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아주 잠깐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신님. 전에는 분명 그걸 모른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지는 몰랐네요. 워낙 옛날 일이고 그보다 더한 희극과 비극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저처럼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는 참 뭔가를 떠올리는 것도 큰일이지 뭐예요.”

리프니에가 새침하게 너스레를 떤 후 루페르트를 똑바로 쳐다봤다.

별처럼 맑은 눈동자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서려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역시 그 괴물을 처리해야겠지요?”

“처리할 방법이 있습니까?!”

“당연하죠. 저, 여신이라고요?”

루페르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얼굴을 본 리프니에가 해맑게 웃었다.

“어머, 루페르트 가우저. 오랜만에 보여 주는 진짜 미소네요.”

“그, 그런가요?!”

“제가 그 여자의 시체를 먹은 이후 줄곧 저에게 거부감을 느꼈었잖아요?”

“아, 아닙니다.”

“정말요~?”

리프니에가 대담하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루페르트는 그답지 않게 시선을 회피하며 다급히 얼버무렸다.

“사, 사실은 조금 좀. 그런 감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신님!”

리프니에가 싱긋 웃으며 거리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이제야 좀 솔직해졌네요. 역시 당신은 그 사람보다 나은 구석이 없잖아 있어요.”

“그 사람요?”

“삐치면 혼자 꽁해서 마음에 담아 두고 룸인들이 게걸스럽게 먹던 생선 썩은 것처럼 삭히는 사람이 있어요.”

‘설마, 루돌프 님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이번 일은 당신이 나서 줘야 할 거 같아요.”

“제가요?”

어리둥절해 하는 루페르트를 향해 리프니에가 부탁하는 모양새로 두 손을 내밀며 애교를 섞어 덧붙였다.

“네!”

* * *

루페르트는 그답지 않게 불안한 얼굴로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황제의 숙소로 사용 중인 여관 건물 주위엔 창과 할버드를 든 병사를 위시해 커다란 깃을 꽂은 챙 넓은 모자를 쓴 기병들이 수시로 순회하며 가까이 접근하는 모든 이를 검문했다.

여관 안엔 루페르트의 호위인 도펠죌트너와 제국 마법사까지 있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경계라고 할까.

이런 곳을 루페르트는 몰래 빠져나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것은 몰래 들어오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당장 늘 곁에 머무는 시종부터 속여야 하니 말이다.

시종이라는 작자들은 눈치가 빠르다.

애당초 눈치가 없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직종이겠지만.

루페르트는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문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 벤치에 앉아 있던 시종은 문이 열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이 물끄러미 루페르트를 올려다본다.

스무 살 조금 넘은 시종은 디터팔츠 출신으로 현재 루페르트를 모시는 다섯 시종 중에 가장 교활하고 눈썰미가 좋은 친구다.

그 시종을 보며 루페르트는 여신의 호언장담을 떠올렸다.

“제 권능은 장난이 아니라고요? 루페르트 가우저. 일단 한번 써 봐요. 저의 선물을! 분명 깜짝 놀랄 거예요!”

여신에게 권능의 아티팩트를 받았다.

그 아티팩트의 이름은 “안개 가면”.

여신은 이 권능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이 가면을 뒤집어쓰고 가면에 당신이 생각하는 모습을 마음으로 전해 주세요.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상으로 타인의 눈에 비춰 보이게 될 거예요. 아, 물론 당신 같은 건장한 남성이 어린아이나 저처럼 아리따운 여성을 생각하진 마세요. 변태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당신과 비슷한 체격의, 얼굴 가죽 정도만 다른 생명체로 변할 수 있답니다!”

당시 루페르트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이지 인간 형태로 변한 이후, 우리 여신님. 왜 이렇게 호들갑에 사사건건 귀여운 척을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소라고둥 형태일 때도 귀여운 척을 많이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몸을 떨기도 하고 똑바로 일어서기도 했을뿐더러 삐치면 홱 돌아서는 행동도 했었으니.

다만 소라고둥이라서 그다지 와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지금 루페르트는 디터팔츠에서 온 눈썰미 좋은 시종이라는 벽을 넘어야 한다.

시종의 밝은 초록색 눈동자가 루페르트의 얼굴을 상에 담는다.

그가 보는 건 의심할 길 없는 제국의 황제.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 맺힌 상은 그가 알던 황제와 모습이 다르다.

젊고 활기차면서도 겸손한 청년 황제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볼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삐쩍 마른, 수도사 같은 사내가 퀭한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폐하……?”

시종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잘못 봤습니다.”

고개 숙인 시종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진짜야. 진짜로 속여 넘겼어!’

시종만이 아니다.

늘 2층 계단을 지키는 장교도, 홀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장군도, 문 앞을 지키는 병사와 순회 기병도 어느 누구도 루페르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것만으로 놀라운 권능인데 안개 가면엔 또 하나의 특별한 권능이 숨겨져 있었다.

여신의 입을 빌리자면,

“아, 안개 가면을 쓰면 타인의 관심이 현저하게 줄어든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도 못하고 인식조차 잘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마치 안개 그 자체가 된 것처럼요!”

처음 들을 때만 해도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안개 가면의 성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 유용함은 통찰의 만화경과 회귀에 버금갈 정도.

‘이런 게 가능했다니. 역시 여신님. 여신님은 대단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황제의 처소를 빠져나온 루페르트가 향한 곳은 군대가 장악한 촌락 경계 밖에 자리 잡은 작은 마구간이었다.

울타리가 쳐진 작은 목장엔 한 마리의 말도 보이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자 기병대를 마련하겠답시고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병사들이 모두 징발했기 때문이다.

돌볼 말이 없어지자 주인이 자리를 비운 마구간엔 빈집이 되어 버렸지만, 그 빈집 안엔 일단의 무리가 어둠 속에 소리 없이 숨을 죽인 채 모여 있었다.

문 앞에서 루페르트는 안개 가면을 벗었다.

“폐하?”

안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겔슈타트의 목소리다.

루페르트가 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문안엔 루페르트가 가장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각의 마법사 지겔슈타트, 불과 철의 형제단의 한스 징펠만과 그의 쌍둥이 도제들, 그리고 앞선 다른 이들보다는 믿기 어렵지만 여러 번 거듭 행운을 안겨다 주었던 마를로네.

루페르트는 처소를 빠져나오기 전에 미리 그들에게 이곳에 모여 있으라고 말했다.

루페르트의 경호를 맡은 지겔슈타트가 의문을 표했지만, 황제의 명이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물러 있었는데 황제 홀로 용케도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혼자 오신 겁니까?!”

지겔슈타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루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십니다. 이곳이 비록 우리 군대의 장악하에 있다고 하나 이곳은 렌타이어마르크입니다. 어디에 암살자나 첩자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데…….”

“걱정하지 말게. 지겔슈타트. 내 황제가 되기 전엔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니까.”

루페르트는 웃음기 띤 얼굴로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양초가 켜진 탁자에 황제를 중심으로 그의 전사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심에서 황제가 눈을 반짝이며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은 우리가 이기고 있지만, 아직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첩보에 따르면 선제후는 제국 성인과 손을 잡았다고 하더군.”

루페르트가 마를로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리. 네가 볼 때 제국 성인들은 어떤 존재들이지?”

“……제가 본 건 한 명뿐이지만, 그건 괴물이었어요.”

“설명해 줘. 네가 슈발츠마인의 숲에서 본 그것을.”

“배움이 짧아 잘은 설명 못 하겠지만…….”

마를로네는 담백하게 자신이 보고 상대했던 제국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이 어떻게 총알을 튕겨 내고 어떤 괴력을 가졌으며 어떻게 인간을 뒤틀린 괴물로 만들어 사육했는지.

정수리에 달려 있던 두정안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지겔슈타트와 한스 징펠만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마법 대학은 이미 제국 각지에서 암약하는 괴인에 관한 정보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제국의 가장 어두운 그늘에서 활동하는 한스 징펠만은 빛에 가려진 수많은 악몽을 보아 왔으니까.

“그들은 제국의 어둠이야.”

루페르트는 회귀 전 보았던 감정 없이 죽어 가던 무수한 사람과 시체에서 기어 나온 붉은 벌레들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대체 그건 어떤 끔찍한 마술을 부린 걸까.’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서도 안 된다.

제국 성인이라는 이름의 괴물들은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존재들이니.

중요한 건 하나다.

“그 어둠을 걷어 낼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다.”

루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겔슈타트와 마를로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문가를 쳐다보았다.

소녀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문가에 머물러 있었다.

‘언제?!’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 소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리프니에.

루페르트가 인간의 형체를 한 여신을 그의 전사들에게 소개했다.

“이분은 내가 특별히 모셔 온 귀인이시다.”

황제가 존대하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일곱 개의 창과 다섯 왕관으로 불리는 제국 선제후나 강대국의 왕 정도는 되어야 한다.

모두에게 공손했던 루페르트마저도 이제 황제의 어법을 쓰는데, 그런 그가 저 정체 모를 소녀에게 극존칭을 쓰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한스 징펠만은 그 소녀를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그 이상의 감각을 느끼진 못했다.

지겔슈타트는 한스 징펠만과 달리 앳된 겉모습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지만 확신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다.

한편 마를로네는 가장 어린 소녀답게 직관적으로 사물을 보고 평가했다.

“대황후님……?”

마를로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이내 자신의 실수를 발각했다.

“……은 아니네요.”

모두의 시선을 한눈에 받은 채 리프니에가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저는 리프니에라고 해요.”

그녀가 활짝 웃었다.

“참고로 계시의 성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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