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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94화 (94/225)

94화 25. 믿음 (2)

오랜만에 만난 루돌프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당당하며 기품 있으며 능히 만 명을 호령할 수 있는 강렬한 기세를 그늘진 눈에 갈무리한 노인.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젊어 보였다.

오십 대, 아니 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십 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젊음이 느껴졌다.

“오랜만이군. 루페르트 가우저. 아니, 이제는 폐하라고 불러야 하나.”

“당치도 않습니다. 진정한 황제는 루돌프 님이신데요.”

둘 앞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루페르트가 직접 주전자를 따라 차를 루돌프에게 대접했다.

특별할 것 없는 행동이지만 루페르트의 심장은 전례 없이 쪼그라든 상태다.

“…….”

루돌프에겐 거대한 죄를 지었다.

그의 아내의 시체를 파헤친 것도 모자라 그 시신을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방식으로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예나라는 마법사가 해부 운운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이다.

루페르트 본인이 의도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시각과 청각 후각에 평생 씻겨지지 않을 끔찍한 추억을 새긴 탓일까, 루페르트가 루돌프에 느끼는 죄악감은 자랑하는 감정의 가면을 제대로 유지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드릴 말씀이 없다. 사실을 말하고 싶지만……. 그건.’

루돌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눈언저리를 두건이 드리운 그늘에 가린 채 무표정한 입가에 찻잔을 갖다 대고 차의 향과 맛을 음미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더군.”

루돌프가 고개를 들어 그늘진 눈을 드러냈다.

“왜 그를 석방했지?”

매서운 물음.

루페르트는 대주교에게 했던 것과 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루돌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대단히 훌륭한 계획이군.”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칭찬이 인색하기로 소문이 난 철혈대제다.

훌륭하다는 칭찬은커녕 제대로 했다는 말을 듣기 어려운 판국에 대단히 훌륭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건 루돌프가 할 수 있는 최상급이 칭찬이 아닐까.

곧 루돌프가 정돈된 목소리로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우리처럼 실수를 되돌릴 수 있는 사람들은 평범하게 가서는 안 돼. 언제나 극단에 걸어야지. 극단에 걸더라도 물론 가능성이 크고 이익이 큰 방법을 취해야 하지. 이번 사태에 대한 그대의 대처는 리프니에의 축복을 얻은 군주가 할 수 있는 아주 모범적인 사례라고 해도 무방해.”

“그렇습니까……?”

루페르트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죽어 가는 몸을 안고 자신에게 야무지게 선제후의 만행을 고발했던 소년의 모습이 눈가에 어른거렸다.

“고민이 있나?”

“그게, 사람이 죽었습니다. 내막은 이후에 파헤쳐 봐야겠지만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반항하는 사람들을 잡아서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거 같더군요.”

“알을 낳는 닭을 잡았군. 궁지에 몰린 군주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이지.”

루돌프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늘 그렇듯 그에게 타인의 희생이나 죽음은 감정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 듯했다.

안젤리나. 필생의 반려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곧 그가 루페르트의 표정을 읽고 불쑥 물었다.

“사람이 죽은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

“어제 렌타이어마르크에서 온 소년이 선제후의 만행을 고발하고 죽었습니다.”

“하나가 죽는 걸 눈앞에서 봤군.”

“뭐, 따지고 보면 그런 셈이죠.”

“눈앞에서 본 죽음을 특별히 여기지 말게. 눈앞에서 죽은 한 명의 목숨의 가치를 서류에서 보고 받은 천 명의 죽음보다 높은 가치를 매기는 건 그대가 생각해도 정당한 평가가 아니지 않나?”

루돌프가 차를 마시며 물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그러합니다.”

“다른 방법을 택한다면 이보다 적은 희생을 낼 수 있다고 보나?”

그늘진 눈은 마치 심문하는 것처럼 루페르트의 얼굴을 매섭게 향했다.

감히 마주치기 어려운 눈빛을 받으며 루페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거 같네요.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전쟁은 빨리 끝낼수록, 휘말린 세력이 적을수록, 병력이 적을수록 해악을 덜 끼치지. 고향에서는 착실한 청년, 누군가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병사라는 놈들이 군기 아래서 얼마나 사악하고 흉포해질 수 있는지 그대는 잘 알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대는 최선의 방법을 찾았어. 행여나 그 소수 때문에 회귀할 생각을 한다면 포기하는 게 좋아. 더 많은 죽음과 파멸을 보게 될 뿐이니.”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맞아. 겨우 소년 하나의 죽음에 이렇게 흔들릴 이유가 없어. 그나저나 루돌프 님은 언제나 필요할 때마다 최고의 조언을 해 주시는군.’

어떻게 보면 리프니에보다 더 신통한 감마저 든다.

어떻게 그렇게 최고의 순간에만 나타날 수 있는 걸까.

흥미로운 의문 속에서 루돌프의 낮은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전쟁이 곧 일어나겠군. 그래, 장군은 구했나?”

“장군은 아직 구하지 못했습니다만, 사실상의 군을 이끌 자는 구했습니다.”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루돌프는 운명의 실타래가 하나로 고정됐다는 말에 큰 흥미를 보였으나, 개인에 대한 논평은 하지 않았다.

“장군들이라는 건 자아가 강한데. 하나 같이 제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이지.”

“그래서 고민입니다.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목록이 있나?”

루페르트는 오토 브라에가 작성한 장군 후보 명부를 내밀었다.

루돌프는 천천히 문서를 눈으로 훑어 나갔다.

“잘 작성된 문서군. 일목요연하고 불필요한 부분 없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어. 룸어 같은 쓰레기 언어나 배우고 허세를 부리는 덜떨어진 치와는 한결 다르군.”

루돌프가 문서를 내려놓았다.

“분더발트, 이 친구가 좋겠어.”

“분더발트요?”

“딱히 그가 인내심이 뛰어나거나 자아가 약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하지만 그대와 그와는 약간의 연이 있지 않나?”

“그건 그렇지요.”

“그를 기용하되, 친정(親征)을 하게. 만슈타인의 생각을 그대의 입으로 말한다면 그게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나?”

“확실히,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황권이 공고해지기 전까진 친정을 자주 하는 게 좋을 거야. 병사의 사기도 오르고 그대의 명성도 크게 오를 테니. 백성들이란 늘 전장의 선두에서 싸우는 군주에 환상을 품는 법이니. 어차피 우리 같은 사람이 전투에서 패배할 일은 드물지 않겠나?”

루돌프는 루페르트의 목에 걸린 소라고둥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 루돌프가 입을 열었다.

“결투장에 나타난 소녀를 보았네.”

“…….”

“그거, 여신님인가?”

그늘진 눈이 송곳처럼 루페르트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루페르트는 가슴이 찔리는 섬뜩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었군.”

루돌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신님은 지금 어디에 있지?”

루돌프는 소라고둥을 보지 않았다.

마치 리프니에가 황궁 어딘가에 육체를 가지고 존재하는 걸 안다는 것처럼.

“미궁 안에 있습니다.”

“지금 만나러 가겠네.”

“사람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네.”

루돌프는 문을 열어젖히고 홀로 복도를 향해 걸어갔다.

루페르트는 한동안 루돌프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

하지 못한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 * *

“이걸 봐 주십시오.”

침상 위엔 모포에 덮인 시체가 누워 있었다.

모포 끝자락에 삐져나온 작은 발을 보고 루페르트는 어렵지 않게 시체의 주인을 추측했다.

예나 슈타이너가 은쟁반 위에 담긴 물건을 루페르트에게 보여 줬다.

“이건?”

마치 지렁이처럼 생긴 것들이 쟁반 위에 담겨 있었다.

평범한 지렁이가 아닌 깃털 비슷한 것이 달린, 보다 화려하고 역겨워 보이는 종류였다.

그 벌레들에게선 썩은 선창에서 나는 비린내가 강하게 풍겨 나왔다.

“뭔가? 이 냄새 나는 벌레는.”

“이것은 미네아의 붉은 벌레입니다.”

“미네아?”

“룸 제국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의 해양 문명인 미네아를 멸망시켰다고 전해지는 끔찍한 마물이지요.”

“마물이라고? 이런 것이?”

겉보기엔 조금 역겹게 생긴 지렁이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예나 슈타이너가 지렁이 위에 식초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쟁반 위의 지렁이들이 마치 되살아난 것처럼 맹렬하게 요동쳤다.

수십 마리의 지렁이가 일제히 발광하는 모습에 루페르트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면서 그 지렁이들의 특징을 발견했다.

“이빨? 이빨이 있군.”

곧 지렁이들이 잠잠해졌다.

“세상에 셀 수 없는 지렁이들이 있지만 이빨이 달린 건 하나도 없지요. 저도 이 이빨을 보고 이 벌레가 미네아의 붉은 벌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이 마물이 저 소년의 몸에서 나왔다는 건가?”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마물은 사람 몸에 들어가 사람의 몸을 산 채로 파먹는데, 기이하게도 그 사람의 몸을 파먹는 동안 어떠한 고통도 통각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분비물을 배출합니다.”

“혐오스럽군.”

“이 마물의 진정으로 무서운 점은 먹이의 사고마저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고?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전설에 의하면 미네아를 멸망시킨 암흑 주술사는 대악마 야둔의 종복으로 야둔에게서 붉은 벌레를 통해 왕과 귀족들을 조종하는 법을 배웠다고 전합니다.”

예나 슈타이너의 주름 진 얼굴에 진정으로 짙은 근심이 드리워졌다.

“수많은 악마와 이단 신을 조사하며 평생을 보냈지만, 이런 끔찍한 물건을 직접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마를로네가 마치 배경처럼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차분하게 서 있었다.

마법사의 시선이 닿자, 그녀가 오랜 침묵을 깨고 특유의 조곤조곤한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제후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강제로 이상한 문신을 새겼다고 하네요.”

그녀는 그날 소년이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했다.

“그 문신을 통해 벌레를 넣었대요. 칼로 피부를 째지도 않고. 그 벌레가 들어간 사람은 한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갑자기 조용해졌고, 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하네요.”

“룸 제국의 옛 기록에 나오는 미네아 전승과 유사한 내용입니다.”

예나 슈타이너가 덧붙였다.

“…….”

루페르트는 한동안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

몇 개의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 떠올랐다 사라졌는지 모른다.

짧지만 영원 같은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 루페르트가 물었다.

“소년은 어째서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던 거지?”

이에 마법사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

“아마도 선제후가 의도적으로 우리 쪽으로 보낸 게 아닐까요?”

마를로네가 항의를 담아 마법사의 옆모습을 노려보았지만, 마법사는 그녀의 눈빛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소년의 몸을 갈랐을 때 소년의 내장은 거의 다 파먹힌 상태였습니다. 이미 죽은 몸이었죠. 벌레들이 살려 둔 것이지요. 벌레들의 주인이 소년에게 명령을 내린 겁니다.”

“왜 그런 짓을 한 것일까?”

“과시하고 싶었겠지요.”

“과시?”

마법사가 비릿한 냉소를 머금었다.

“하나의 문명을 파괴한 고대의 금지된 지식을 손에 넣었는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는 좌우에게 명했다.

“분더발트를 불러라.”

황제가 돌아섰다.

“곧 전쟁이 있을 것이다.”

정물처럼 가만히 서 있던 마를로네가 루페르트 앞으로 걸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도 가게 해 주세요.”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내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조부를 대신해 내 곁을 지켜라.”

고개를 숙인 채 마를로네는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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