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24. 황제의 검 (2)
“폐하.”
집무실에 반가운 인물이 나타났다.
루페르트가 가장 신뢰하는 이 중 하나, 한스 징펠만이 평소보다 훨씬 때깔이 좋은 노란색의 제복을 입고 루페르트에게 과다할 정도의 몸짓으로 인사했다.
“오, 한스 징펠만 왔는가?”
말투가 변했다.
당연한 일이다.
이제 루페르트는 일개 군주가 아닌 그 자체가 제국을 대표하는 자니까.
“자리에 앉게. 고생 많이 했을 테니.”
말투가 변했어도 자신의 굳건한 동맹을 바라보는 눈빛은 변치 않는다.
루페르트는 따뜻하면서도 신뢰가 깃든 시선을 그의 사냥꾼에게 보내며 자리를 권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폐하. 휴식이라면 오는 도중 충분히 취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청이 있다면…….”
“우유라도 드릴까?”
한스 징펠만은 빙그레 웃으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제 한스 징펠만은 평범한 사냥꾼이 아니다.
그는 루페르트의 위임장을 가진 명실상부한 제국 수렵대의 총사이자, 황제의 사냥꾼이다.
제국의 어떤 군주도 그를 함부로 구금할 수 없고 자신의 숲에 드나드는 걸 거부할 수 없다.
황제의 사냥꾼은 메헨부르그의 야수처럼 제국에 위해를 끼치는 모든 짐승을 사냥할 권리가 있다.
가끔 인간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 한스 징펠만은 최근 루페르트의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다름 아닌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 관한 건이다.
“현재까지 선제후 쪽에서 큰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레벤호스트와 게오르크 아르님이 공공연한 불만을 늘어놓는다고 하지만 그게 실제적인 움직임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눈치입니다.”
황제의 사냥꾼인 한스 징펠만이 현재 사냥하려는 짐승은 반역이라는 이름의 짐승이다.
루페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턱을 쓰다듬으며 질문을 던졌다.
“모독자들에 대한 행방은?”
“모독자들은 지금 제국 국경을 벗어나 저지대 연맹 쪽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들의 우두머리 헨드릭 빌렘은 최근 몇 달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소문에 따르면 요새도시 브레나우의 술집에 숨어 있다고 하더군요.”
“브레나우라…….”
루페르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염소 가면에 대해서는?”
“그 사내에 대해 알려진 건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카제인호프 사냥꾼 일부를 붙잡아 심문했으나, 출신은커녕 이름조차 모르더군요.”
“그렇군, 수고했어. 징펠만 총사.”
“아닙니다.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기회를 주시면 개인적으로라도…….”
“일단 대기하고 있게. 앞으로 그대에게 시킬 일은 너무나도 많으니.”
루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한스 징펠만도 고집을 꺾었다.
입구 쪽엔 흑백의 옷을 입은 쌍둥이들이 가만히 서서 그들의 스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쌍둥이 소년 소녀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기와 루였나. 그때보다 키가 자랐군. 하긴, 한창 클 나이겠지.’
쌍둥이 남매를 루페르트와 눈이 마주치자 거의 동시에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들이 떠난 후 루페르트는 서재로 시선을 옮겼다.
서재 위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처리에 관한 문서가 수북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회귀 직후 루페르트가 최대의 정적으로 생각한 건 레벤호스트였다.
늘 그는 루페르트를 무시했고 신교 세력의 수장으로 활동했으니.
암살 건을 겪으면서 루페르트는 골트문트라는 새로운 적을 재발견했다.
실제로 그는 황위에 오르는 내내 루페르트 최대의 위협이었다.
하지만 정작 황제에 선출된 이후 최대의 정적으로 떠오른 건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였다.
그가 베르너에게 말한 한 단어는 제국의 파멸을 의미한다.
현재 제국에서 신교를 국교로 택한 선제후는 레벤호스트, 게오르크 아르님, 막스 게오르크 셋이다.
일곱 선제후 중 이미 셋이 신교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까지 가담한다는 소리는 선제후의 과반이 신교 세력을 형성한다는 걸 의미한다.
종교 분쟁으로 내전이 벌어질 경우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넘어갈 수 있다는 소리다.
‘막스 게오르크는 중립을 지키겠지. 그렇다고 하지만…….’
문제는 렌타이어마르크의 위치다.
렌타이어마르크는 제국 남동부에 자리 잡고 있다.
서쪽에 치우친 기존의 신교 선제후와 연대하면 구교 세력의 뒤통수를 겨냥할 수 있는 자리다.
‘선제후는 이를 전부 다 알고 말한 것이겠지.’
겉으로는 모든 걸 잃은 자가 외려 협박하는 모양새로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보다 제국 최상층, 그들만의 유대를 잘 아는 루페르트는 잘 알고 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잃은 건 표면상의 지위와 신체의 자유뿐이라는걸.
그에겐 기존 선제후와의 연대, 20년 넘게 렌타이어마르크를 통치하면서 쌓은 명성과 경력, 신민의 지지와 그에게 충성하는 군주와 귀족들이라는 무형의 자산이 있다.
그건 황제인 루페르트조차 가지지 못한 것이다.
황제가 됐다고 하나 여전히 루페르트는 선제후 회의에 막 진입한 근본 없는 친구니까.
‘여기서 시간의 책갈피를 사용해야겠어.’
선택의 때가 왔다.
* * *
황제의 주거지는 황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위압적으로 솟은 황궁의 건물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 이름은 미궁.
그 이름대로 저택 주변엔 사람의 키를 상회하는 생울타리가 미로처럼 펼쳐져 처음 오는 사람을 헤매게 한다.
미궁의 구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신하들에게 공격받았다.
그 복잡한 구조 때문에 암살자가 숨어들기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천 년에 가까운 제국의 역사 중 미궁에 암살자가 숨어들거나 암살 시도를 한 일은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생울타리로 이루어진 미로는 저택으로 통하는 대로를 비켜난 외곽을 채우고 있을 뿐으로 황제와 사람들이 저택에 드나드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단지 정원사만 고생할 뿐이라고 할까.
그 유서 깊은 황제의 처소에 황제가 도착했다.
아직 해는 저물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검은 포석을 깔아 만든 길을 느릿한 걸음으로 걸으며 길 양옆을 채운 생울타리 미로를 곁눈질로 응시했다.
전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
장미 덤불로 만든 생울타리다.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는 여인의 얼굴을 애써 지워 버렸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면 곧 만날 또 다른 여성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저택 앞에서 루페르트는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실내엔 시종과 시녀들이 도열해 황제를 맞이했다.
시종장이 다가와 루페르트에게 필요한 걸 정중하게 묻는다.
“간단한 식사와 세숫물을 준비해 주게. 분명히 말했네. 간단한 식사라고.”
미궁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1층과 3층은 하인들이 관리하는 공간이나 2층은 온전히 황제 개인의 공간이다.
특히 2층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넓은 방은 황제의 철저한 사적 공간으로 황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다.
시녀들은 그 방은 금단의 방이라고 불렀다.
루페르트는 그 금단의 방 앞에 섰다.
“…….”
소라고둥에서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잠시 후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오세요. ]
문을 열자 빛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루페르트를 감싼다.
루페르트는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빛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곧 등불이 켜졌다.
등불의 빛은 어둠에 숨겨져 있던 소녀의 모습을 드러냈다.
열넷, 혹은 열다섯.
아직 채 피지 않았지만 지고의 아름다움을 갖춘 소녀가 미소로 루페르트를 반겼다.
“루페르트 가우저.”
황제는 그 소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신님.”
리프니에는 이제 살아 있는 소녀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황궁에 산다.
가끔 소라고둥에 깃들긴 하지만 그녀의 본거지가 황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금단의 방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릿한 바다의 악취를 느끼며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에게 자신의 용건을 이야기했다.
“……이런 이유로 시간의 책갈피를 사용하려 합니다.”
“그런가요?”
리프니에가 빤히 루페르트를 쳐다보았다.
조각상 시절 소녀 같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 아니었다.
작은 행동거지, 버릇 하나하나가 저잣거리에서 뛰어노는 소녀의 행동과 쏙 빼닮았다.
그것도 지나칠 정도로 명랑한.
“흠흠! 큰일이네요. 그 선제후가 내전을 유도한다니.”
그녀는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눈동자를 굴려 루페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루페르트는 침묵했다.
할 말이 없었고, 지금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특히 리프니에가 명랑한 소녀처럼 굴 때마다 루페르트가 느끼는 이질감은 더욱 짙어졌다.
황제의 침묵 속에서 다시 여신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뭔가 딱딱해진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제가요?”
“늘 절 상대할 땐 작은 일에도 놀라곤 했는데. 그걸 보는 재미도 있었고. 그런데 이제는 그런 귀여운 구석이 잘 보기 힘드네요?”
리프니에가 천천히 걸어 루페르트를 돌아 그의 옆얼굴을 보며 살짝 표정을 구겼다.
“혹시 저한테 감정이 상한 일이 있나요?”
“아니요. 그런 건 조금도 없습니다.”
말로는 부정하지만 루페르트의 감정이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녀가 그날 루페르트의 마음에 남긴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아직 봉합되지도 않았으니까.
‘여신님은 역시 여성인가. 감이 좋군.’
표정 관리에 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관리라는 게 당황이나 분노를 감추는 데 치우쳤던 모양이다.
평소의 작은 습관, 감정까지는 잘 드러내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다.
여신은 뒷짐을 진 채 마치 마를로네처럼 가볍게 앞으로 걷다 홱 돌아섰다.
“뭐,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죠. 늘 쉬이 변하는 법이니까요. 그들은 늘 영원을 이야기하고 동경하지만 정작 그들은 계절보다 빨리 변하니.”
“오해하신 거 같습니다. 여신님. 여신님에 대한 저의 마음은 조금도 변치 않았습니다.”
“행동이 변한 건 사실이잖아요?”
리프니에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루페르트는 뭐라고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을 잃었다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그게. 제가 지금은 황제 아니겠습니까?”
“흐음~.”
“황제면 체통을 지켜야죠. 여신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요. 루페르트 가우저.”
“하하…….”
루페르트는 당황을 느꼈다.
‘젠장, 사람 모습이 되니 더 상대하기 까다로워.’
솔직히 소라고둥 시절이 그립다.
그건 귀엽기라도 했지.
지금은 아무리 예쁘게 꾸며 놓아도 시체를 갉아 먹는 모습밖에 연상되지 않으니까.
“시간의 책갈피를 사용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마침 잘됐네요. 안 그래도 당신에게 충고할 게 있었는데.”
“충고요?”
“네. 회귀 원점을 바꾸는 거요.”
리프니에의 말에 루페르트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회귀 원점을? 지금?’
“당신의 목적은 꼭두각시 황제를 면하는 거잖아요. 제가 볼 땐 최상의 형태로 황제가 된 거 같은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전에 더 이룰 게 있나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이번에 정말로 운이 좋았죠.”
리프니에가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 정말이지. 만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운을 누렸다고요.”
“행운요? 어떤 행운을 말씀하시는 건지…….”
“울타니아에서 설인을 만났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또 다른 섬뜩한 기억을 떠올렸다.
눈사태와 눈보라를 몰고 다니는 10미터에 달하는 막을 수 없는 괴물을 말이다.
리프니에가 미소 지은 얼굴로 은근히 물었다.
“그 설인이 다음 시간 축에도 당신을 그냥 놔둘까요?”
“그건…….”
“그 설인은 절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어쩌면 당신에게서 제 냄새가 나서 그 설인이 봉우리에서 내려왔는지도 모르죠.”
“……!?”
‘설마 여신님이 룸 여정에 따라가지 않은 건 그 때문인가?!’
“당신이 회귀해서 아무리 지금보다 더 높은 성취를 이룬다고 해도 결국 룸 제국의 수도에 갈 거잖아요?”
루페르트의 흉중에 맺힌 경악이 서서히 얼굴에 드러나려 한다.
‘대체, 여신님은 뭘 말씀하시는 거지?’
리프니에가 미소 지었다.
“다음엔 절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루페르트 가우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리프니에의 모습이 어둠에 완전히 잠긴 후 잦아들어 가는 목소리가 갈고리처럼 마음을 할퀴었다.
“……이 세상엔 회귀 그 자체를 감지할 수 있는 존재도 있으니까요.”
여신은 완전히 사라졌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루페르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밭 밑에 타들어 가는 등불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리프니에가 전능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
어둠인지 침묵인지 구분되지 않는 공간 속에서 루페르트는 조용히 어두운 복도를 떠올렸다.
‘하켄하임.’
마음의 고향이 지워지고, 황궁의 풍경이 빈자리를 채웠다.
하나의 과거가 황제의 시간에서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