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24. 황제의 검 (1)
카렐리아 왕국의 수도 슈코브는 한때 대륙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도시였다.
테타우조차 슈코브 앞에서는 시녀에 머물러야 할 정도로 융성한 도시였다.
무엇보다 슈코브는 제국의 수도였다.
렌타이어마르크 가문이 황위를 손에 넣었을 때, 2백 년 넘게 제국의 수도로 다른 도시들을 호령했다.
하지 가문이 황위를 잃고 렌타이어마르크 자체가 궁핍에 빠져들면서 슈코브의 지위 또한 몰락 일변도를 겪었다.
그래서일까.
모처럼 왕관의 주인이 나타났건만 도시의 반응은 냉담했다.
“또 슈발츠마인인가. 언제쯤 황위가 렌타이어마르크 쪽으로 다시 넘어갈까?”
“그러게 말이야. 슈발츠마인이 황위를 독식하니 좀처럼 수도가 바뀔 일이 없잖아.”
“듣자 하니 새로 황제가 된 선제후는 독실한 구교 신자라고 하던데. 세상에 선제후나 되는 사람이 태형장의 의식을 치렀다지 뭐야?”
제국처럼 슈코브도 두 개의 믿음이 충돌하고 있다.
보다 우세한 건 신교다.
상류층과 교양 있는 시민을 중심으로 퍼져 현재는 능히 주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세를 가지고 있다.
신도를 잃은 텅 빈 성당들이 문을 닫았고, 이듬해 신교의 교회로 바뀌어 신도들로 북적였다.
카렐리아 주교가 매일 같이 지원을 호소하지만 슈코브를 장악한 신교의 물결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지금은 하층민 중심으로 구교가 유지되고 있지만 시간문제이리라.
슈코브에서 신교가 유행한 진정한 이유는 교리의 차이 따위가 아니니까.
슈코브가 전정으로 원하는 건 잃어버린 영화다.
“……아마 제국에서 내전이 일어난다면 이 땅에서 전화의 불길이 타오르겠지.”
그 슈코브의 유서 깊은 광장을 응시하며 만슈타인은 커피를 음미하며 나지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동석한 동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멀리 보는 거 아닌가? 당장 렌타이어마르크에서 들고일어나오게 생겼는데. 대리 결투에 관한 소식을 못 들은 건 아니겠지? 만슈타인.”
만슈타인이 빙그레 웃으며 확신에 찬 갈색 눈동자를 번득였다.
“당연히 알고 있지. 계시의 성년가 뭔가 기묘한 여성이 출현했다는 소식 또한.”
“자네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아니, 렌타이어마르크가 그 결과에 승복하리라 보나?”
“그가 승복한다고 해도 주변 선제후들이 승복하지 않겠지.”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동료의 물음에 만슈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쪽을 응시했다.
“그야 내가 막을 거니까.”
“자네가 어떻게 막는다는 건가. 선제후도 뭐도 아니고. 심지어 제국 의회에 출석할 깜냥도 안 되지 않나?”
“그 황제는 날 만나 줄 거야.”
동료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지만, 만슈타인의 눈동자에 서린 확신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별들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 * *
루페르트는 굳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집무실의 풍경에 눈에 들어온다.
방의 구조, 가구, 책상 위에 올려진 장식품과 필기구의 배치까지.
당장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기억 어딘가에 자리 잡은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루페르트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은 여기까지 왔군.’
황제가 되었다.
꼭두각시가 아닌 진정한 황제가.
그토록 원하던 위치였건만 루페르트의 마음은 어두웠다.
그 어두움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역시 리프니에일 것이다.
아무리 잊어버리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눈을 부릅뜬 채 들썩거리던 안젤리나의 처참한 시체와 밤새 들어야 했던 시체를 갉아 먹던 소리, 침소에 만연했던 시체의 냄새가.
마를로네의 격려로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이미 뒤틀린 마음의 형태가 그리 쉽게 수복될 리 없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 잃은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루페르트는 여전히 리프니에의 신자로 남겠지만, 전처럼 맹목적으로 그녀를 추종할 수 있을까?
그건 루페르트 자신도 확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루돌프처럼 되진 않겠지만, 예전처럼 리프니에만을 바라보던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잊지 못할 그 끔찍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은 말이다.
“…….”
현실도 녹록지 않다.
또 다른 문제가 루페르트의 마음에 또 다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닌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처분이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그는 대리 결투로 모든 걸 잃었고 렌타이어마르크 또한 루페르트의 손아귀에 들어온 게 아니냐고.
터무니없는 소리다.
꼭두각시 황제라고 해도 근 10년간 황궁에 있어서 잘 안다.
선제후들의 이기심과 피해의식을.
루페르트가 대리 결투에서 얻은 권리를 전부 행사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반기를 들 것이다.
레벤호스트와 게오르크 아르님 같은 권력자가 뼈 있는 말을 남긴 것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다.
선제후나 되는 고위 군주가 의견을 표명하는 것 자체가 정치의 범주에 들어가는 행위다.
루페르트는 그것을 일종의 경고로 해석했다.
‘신교를 믿는 두 선제후가 같은 말을 했다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닐 공산이 크지.’
자칫 잘못하면 즉위 직후부터 내전이 일어날 공산이 있다.
신교 선제후의 연합은 루페르트가 생각하는 가장 강력한 내전의 신호니까.
결국 루페르트가 생각하는 절충안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슈발츠마인 가문 내에서 반발이 있을 것이고, 중립 세력에게 루페르트의 유약함을 내비칠 수 있다. 어쩌면 선제후들의 기만 살려 줘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을 퍼뜨릴지도 모른다.
어떤 선택을 하든 동전의 양면처럼 이익과 불이익이 함께 따라온다.
그 이익과 불이익은 눈으로 계량할 수 없다.
당장의 이익이 훗날의 불이익, 심지어 재앙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당장의 불이익이 훗날의 횡재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모든 걸 고려해서 결정해야 한다.
황제로서 하나의 결단을 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대목이랄까.
‘여전히 쉽지 않군.’
온전한 황제의 권위를 가졌지만, 여전히 루페르트는 불안한 반석 위에 서 있다.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소라고둥을 쓰다듬었다.
결국 루페르트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리프니에뿐이다.
그건 변치 않을 사실이다.
그녀가 무슨 짓을 했든 간에 말이다.
루페르트는 자신의 조언자들을 불렀다.
베르너, 오토 브라에, 요하네스.
안젤리나가 루페르트에게 남긴 젊은 삼인방이 황제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사이에 인사치레는 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루페르트는 서류에 눈을 고정한 채 시종이 내온 커피를 마시며 그의 신하들에게 과제를 내주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삼인방의 얼굴에 저마다의 감정이 떠올랐다.
베르너는 심각함, 오토 브라에는 무표정, 요하네스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의 반응을 보며 루페르트는 신선함을 느꼈다.
살아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혼자서 궁리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훌륭한 답이 나올 것 같은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그래, 내겐 이 친구들이 있었지.’
꼭두각시 시절 루페르트 곁에도 신하라는 작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러나 다른 선제후가 보낸 감시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이 아닌 선제후의 의견을 말했고, 강요했다.
지금은 다르다.
황제에겐 믿고 생각을 나누고 조언을 구할 신하들이 있다.
그것도 저마다의 색깔이 뚜렷한.
“후임자 결정권은 렌타이어마르크에 돌려주고 선제후 직을 박탈하셔야 합니다.”
베르너는 실리보다는 눈에 보이는 권위와 명예를 중시하는 타입이다.
“감히 폐하에게 도전한 자를 그냥 놔두면 폐하의 권위에 의심을 품는 자들이 나타날 겁니다. 이제 시작된 폐하의 치세인데 처음부터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토 브라에는 그 반대다.
“선제후 직을 유지하게 하고 후임자만 우리가 결정하는 건 어떨까요?”
그는 겉모양보다는 차근차근 이쪽의 내실을 키울 수 있는 실리를 중시한다.
“어차피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오래 살지 못할 사람입니다. 어쩌면 올해를 버티지 못할지도 모르죠. 그에게 명예를 남기되, 우리에게 우호적인 후임자를 결정함으로 렌타이어마르크를 우리 지배하에 놓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루페르트의 시선은 마지막 주자인 요하네스에게 향했다.
‘요하네스 사기란 게 대체 뭘까?’
그만 보면 늘 품는 의문을 떠올리며 루페르트는 요하네스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모든 걸 포기하는 건 어떨까요?”
요하네스는 엷은 입술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마를로네만큼은 어둡지 않은 녹색 눈동자로 루페르트를 지그시 응시했다.
오토 브라에와 베르너의 눈동자에 의문 부호가 떠오르는 게 보인다.
루페르트도 의문을 느끼긴 마찬가지.
“무슨 생각이지? 요하네스?”
루페르트가 묻자, 요하네스는 미소 지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운에 기대는 방법입니다. 운이 나쁘다면 모든 걸 잃을 수 있겠지만, 운이 좋다면 모든 걸 얻을 수도 있겠지요.”
루페르트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간. 도박꾼 체질이군.’
통찰의 만화경에서 충분히 보았든 요하네스는 편안하고 안정된 길을 걷는 자가 아니다.
쫄딱 망할 위험을 무릅쓰고 극한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도박은 아니다.
요하네스에겐 남들이 가지지 못한 통찰의 빛이 번득이고 있다.
“제가 볼 때 선택을 강요받는 건 우리만이 아닙니다. 선제후도 영지에 돌아가면 선택을 해야 할 겁니다. 이대로 굴욕을 받은 채 죽은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모든 것을 걸고 다시 한번 반기를 들든가.”
“그대가 볼 땐 어느 쪽이 가능성이 크나?”
“선제후도 이번 일로 가문의 신뢰를 적잖이 잃었습니다. 아마 그 상실분은 폐하와는 비교도 되지 않겠지요. 가문에서는 직간접적으로 선제후의 퇴위나 권한의 배제를 요구할 것입니다. 사유는 차고 넘치니까요. 그런데 선제후는 한 번 폐하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 사람입니다. 그가 순순히 자신이 뒷방으로 밀려나는 걸 지켜볼까요?”
요하네스가 윤기 나는 금발을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전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제압하면 모든 걸 얻을 수 있다는 건가?”
“적어도 선제후들이 그와 연관되는 걸 꺼릴 순 있겠지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반기를 든 자를 돕는 건 그들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될 테니까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하지만 동시에 매력적이다.
도박의 속성이라고 할까.
운이 없다면 권위도 실리도 전부 잃을 수 있다.
민심은 냉혹하다.
그들은 철혈대제라는 늘 승리하는 황제에 길들었다.
처음부터 패배를 맛본다면 루페르트의 치세는 처음부터 흔들릴 수 있다.
“…….”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매만졌다.
그에겐 모든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결정하진 않겠다.
“선제후의 의중을 알아보겠다.”
황제가 손가락을 들어 한 사내를 지목했다.
“베르너.”
“네. 폐하.”
“그대가 가 줘야겠다.”
루페르트는 더 이상 꼭두각시 황제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다.
* * *
한때 렌타이어마르크의 드넓은 평야와 늪, 산맥을 지배하던 선제후는 이제 독수리궁이라 불리는 아담한 저택에 갇혀 있다.
선제후 직을 박탈당한 건 물론이고 후계자 지명권까지 잃은 그를 가리켜 궁정의 호사가들은 사실상 그의 운명은 종지부를 찍었다고 수군거리지만 기이하게도 선제후에게선 별다른 감정의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늘 죽은 듯이 고요했고 가끔 물과 간단한 음식만을 요구할 따름이었다.
더욱이 이상한 건 렌타이어마르크 쪽의 태도다.
선제후가 터무니없는 사고를 치고 연금되어 있는데도 선제후 가문 쪽에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탄원조차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가문 내에서마저 버림받은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지만, 진실을 아는 건 선제후와 그 구성원뿐이리라.
화제의 선제후는 짙은 어둠과 하나가 된 채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창밖으론 저택으로 통하는 단 하나의 좁은 길과 그 입구를 틀어막은 황궁 근위대가 보인다.
창밖을 응시하던 병색이 완연한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손님이다.
“베르너 폰 카를로비. 황제 폐하의 확인서다.”
병사들이 화려하게 꾸민 서류를 거리를 유지한 채 떨어서 있던 장교에게 내밀었다.
장교는 서류를 검토한 후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병사들이 베르너의 앞을 막고 있던 교차 된 할버드를 수직으로 세워 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별궁 안은 궁정 사회라는 요지경의 축소판이다.
시종과 하녀, 경비와 요리사 모두가 저마다의 뒷배경을 가지고 있다.
경계에 찬 시선이 얼굴에 바늘처럼 꽂히는 걸 느끼며 베르너는 선제후가 머무는 방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혔지만, 비밀은 보장되지 않는다.
문이 닫히자마자 네댓 명의 염탐자가 문가에 귀를 대고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기를 쓰고 들으려고 하니까.
‘끔찍한 곳이군.’
루페르트는 베르너를 접견인으로 선택했다.
단정하고 강직한 외모도 외모지만 그는 삼인방 중에 가장 심적으로 안정된 자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같은 노회한 정치가를 상대로 능히 버틸 수 있으리라는 것이 루페르트의 생각이었다.
문이 열리고 어둠 속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선제후의 모습이 베르너의 회백색 눈동자에 떠올랐다.
‘저것이 선제후인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오랜만의 접견인에게 단 한마디만을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말했을 뿐이다.
그의 입 모양이 가리킨 건 오직 한 단어였다.
신교.
아주 짧게 입을 열리는 와중에도 베르너는 질식할 것 같은 썩은 냄새를 느낄 수 있었지만, 그보다 끔찍한 건 선제후의 생각이리라.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악취 속에서 베르너는 전율했다.
‘내전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인가. 선제후는?’
그러나 그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의중은 외부에 유출됨 없이 안전하게 루페르트에게 전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