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20. 두 개의 길 (1)
“설마하니 슈발츠마인 가문의 방문자가 룸왕 전하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미리 앞서 맞이하지 않은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환갑을 바라보는 슈베린 남작은 왜소한 체구와 움푹 들어간 볼 때문인지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지만, 건강에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황제 시절 루페르트는 슈베린 남작을 직접 알현한 적이 한 번 있다.
꼭두각시 황제라고 소문이 자자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제국의 황제였다.
소귀족에겐 여전히 하늘과 같은 존재다.
게다가 같은 슈발츠마인계이기도 하겠다 슈베린 남작은 루페르트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한 사람이었다.
“속히 전하에 어울리는 침실과 편의를 제공하겠습니다. 물론 일행분들에게도 응당한 편의를 제공할 작정입니다. 그 붉은 명찰을 단 분들을 포함해서요.”
“남작님의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식사와 안전의 보장.
이 또한 루페르트가 슈베린 남작에게 기대한 것이지만 루페르트의 진정한 속내는 따로 있다.
루페르트와 슈베린 남작은 같은 파벌이다.
슈발츠마인 가문이라는 거대한 배에 올라탄 동승자다.
“전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같은 파벌이라는 건 손해와 이익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줄 수 있는 가짓수가 훨씬 많다.
“전하께서 호위대를 놔두고 소수의 인원만으로 은밀하게 움직이고 계시는 걸 보니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시겠지만…….”
슈베린 남작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현재 테타우에선 터무니없는 반역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루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선거를 무효로 돌리는 것 말입니까?”
“역시, 알고 계셨군요.”
“누굽니까?”
루페르트가 알고 싶은 건 그것이다.
누가 반역자인가.
누가 루페르트를 붉은 산맥 아래에 잡아 두고 그를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하는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라고 해도.
은밀한 분노를 푸른 눈동자에 갈무리한 채 루페르트는 남작의 입이 열리는 걸 기다렸다.
슈베린 남작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루페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사람인가?’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어스는 한 달 전, 선제후 자격으로 임시 제국 의회를 소집을 촉구했다.
제국 의회는 제국 전체를 대표하는 의사 결정 기구.
소집권자는 제국의 황제와 선제후단 의장이나 긴급한 사안이 발생할 경우 선제후가 다른 선제후 둘의 동의를 얻어 임시 제국 의회를 소집할 수도 있다.
제국 의회의 결정이 선거 결과를 뒤집는 효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제국의 크고 작은 군주가 모두 참석하는 그 자리에서 여론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다른 선제후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황제 또한 선제후단의 결정에는 구속되니까.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이 독단적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선제후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이의를 제기했다면 임시 제국 의회 자체가 뒤로 미뤄지거나 취소됐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건 현재 여섯 선제후 중 루페르트를 순수하게 지지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아카이아 대주교조차 방관할 줄이야. 하긴 그 노인은 내가 단지 내가 신심이 다른 선제후보다 깊어 보인다는 가벼운 이유로 표를 던졌었지.’
그 제국 의회는 3일 뒤 개최된다.
사태는 긴급을 요한다.
거기서 선거 결과가 뒤집히진 않겠지만, 더 크고 구체적인 음모의 발단이 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니.
반역의 불길은 빠르게 진압해야 한다.
“제가 가진 가장 뛰어난 말들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슈베린 남작은 가문의 사람답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구간에서 가장 뛰어난 명마들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이 고마움을 뭐로 표현해야 할지.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영광입니다. 전하! 하지만 늙은 저보다는 제 아들놈을 기억해 주십시오! 크리스티안. 수줍어하지 말고 어서 룸왕 전하에게 인사드리거라! 곧 이 제국의 황제가 되실 분이다!”
슈베린 뒤에서 겨우 십 대 중반의 앳된 소년이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에게도 연줄을 대려 하는군.’
루페르트는 이에 대해 조금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추종자가 생기는 건 좋은 일이다.
루페르트는 소년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이름이 크리스티안이라고?”
이에 소년은 앳된 얼굴에 홍조를 붉히며 수줍게 답했다.
“네. 제가 크리스티안입니다.”
슈베린 남작이 옆에서 쾌활하게 웃었다.
“이해해 주십시오. 전하. 크리스티안은 오래전부터 전하를 동경했으니까요.”
“나를 동경한다고요?”
루페르트는 강한 어색함을 느꼈다.
동경이라니.
모두의 조롱을 받던 꼭두각시 황제와는 가장 거리가 먼 단어다.
“크리스티안은 전하의 무용담에 푹 빠졌죠. 밤새 등불을 밝히고 전하의 무용담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렇지 않느냐? 크리스티안?”
“네. 아버님.”
크리스티안이 수줍음이 남은 얼굴로 루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감회라는 일렁거리는 파도 위에서 샛별처럼 반짝이는 그 눈동자는 두말할 것 없는 동경의 빛 그 자체였다.
“전하의 모든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특히 리히트보덴에서의 활약은 또 읽고 읽었어요!”
‘그런 것도 출판된 모양이군.’
돈에 눈이 먼 인쇄업자들이 잘 팔리지도 않는 호라교 경전 대신에 별 같잖은 가십을 팸플릿 형태로 찍어내 판다는 건 흔한 일이다.
그들의 방대하고도 조잡한 출판물 리스트에 제국 전역에 이름을 오르내리는 화제의 인물인 루페르트의 이야기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보나 마나 인쇄업자 놈들 상상으로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를 적어 놓았겠지만, 어떤 내용인지 조금은 확인해 볼까?’
루페르트는 모처럼 장난기가 발동하는 걸 느끼며 크리스티안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그래. 크리스티안. 그 리히트보덴 모험담 중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느냐?”
이에 크리스타인아 안 그래도 반짝이던 눈을 더욱 반짝이며 신이나 떠들었다.
“무능한 도펠죌트너가 겁을 집어먹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자 전하께서 대로하셔서 홀로 스크라엘링 무리에 뛰어 들어가 수십 마리를 썩은 짚단처럼 베어 내신 부분요!”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멀찌감치 서 있는 베르크 란 조손을 자기도 모르게 응시했다.
마를로네가 무표정한 얼굴로 루페르트를 빤히 쳐다보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렇구나.”
“정말인가요? 그 이야기가?”
“과장이 심한 거 같구나.”
루페르트는 미소 지은 얼굴로 소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시간 나면 다른 판본들도 살펴봐야겠어. 대체 어떤 헛소리를 늘어놓았는지 궁금해.’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
오히려 약간의 놀라움 섞인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늘 조롱받고 천대받던 그가 이제는 동화 속에서 나올 법한 영웅처럼 묘사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이 모든 건 결국 여신님 덕분이겠지.’
루페르트는 즉시 떠날 채비를 했다.
마음 같아선 하루 이틀 더 묵으며 루페르트 자신의 모험담을 보고 싶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그럼, 대관식에서 뵙겠습니다.”
루페르트는 자신을 둘러싼 슈베린 남작 가문의 일원을 흐뭇한 얼굴로 돌아보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기꺼이!”
힘찬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다섯 필의 말이 테타우를 향해 출발했다.
남은 시간은 3일.
정확히는 이틀하고도 약 10시간 정도이다.
슈베린에서 테타우까지는 통상 속도로 3일, 서두를 경우엔 이틀이 걸린다.
대단히 촉박한 여정이다.
‘시간 싸움이라는 건가.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별 위험은…….’
위험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루페르트는 갑자기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위기 감지가 발동한 것이다.
루페르트는 조건반사적으로 뒤쪽을 돌아보았다.
콰쾅!
굉음이 울리며 슈베린 남작의 저택 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창가에서 붉은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는 가운데 검은 연기를 하늘 전체를 가릴 기세로 솟구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추적자가 따라온 것 같군요.”
한스 징펠만이 망원경으로 뒤를 살피며 말했다.
지겔슈타트가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추적자는 저의 감지 범위를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탕!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쪽을 노리는 게 아니다.
날카로운 비명이 저택 쪽에서 울려 퍼졌다.
“저런 저주받을 사람들!”
한스 징펠만이 망원경으로 뒤를 살피며 짤막하게 보고했다.
“추적자들이 남작 일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추적자가 뭘 노리는지 알아차렸다.
‘우리를 부르고 있군.’
추적자의 의도는 명확하다.
지겔슈타트가 있는 루페르트 일행을 건드릴 수 없으니 대신 발목을 잡고자 남작 일가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 녀석도 있군.”
베르크 란이 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늘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더욱 진한 불길이 타올랐다.
그의 동공의 중심엔 불타는 검을 들고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 앞에 도도하게 선 염소 가면의 도펠죌트너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불길의 잔상만이 허공에 새겨졌다.
일방적인 도륙.
하급 군주의 병사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남작과 그 일가가 저택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농성할 작정인데…….”
한스 징펠만이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버티긴 어렵겠지요.”
모두의 시선이 루페르트를 향했다.
남작 일가를 구하느냐, 이를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느냐.
그걸 결정하는 건 루페르트의 몫이다.
“…….”
정답은 정해져 있다.
무시하고 그대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쪽이 시간을 벌 수도 있고 불필요한 전투를 피할 수도 있다.
‘철혈대제라면 약간의 고민도 하지 않고 그들을 버렸겠지.’
루페르트도 남작 일가를 무시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옳은 것일까?’
루페르트의 눈앞에 자신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크리스티안이라는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년과 루페르트는 어떤 관계도 아니다.
그들이 슈발츠마인계에 가깝다고 하나 형식적으로는 고어문트 계열이며, 소년과 루페르트는 오늘 만나기 전까진 일면식도 없었다.
애당초 남작의 도움도 서로의 이익을 원한 것이지 이타심이나 충성심에서 나온 게 아니다.
일개 소군주 같은 건 쉽게 버려도 되는 패다.
그런데 왜일까.
자꾸 이 쉬운 길에 회의가 드는 것은.
“잠깐.”
루페르트가 고삐를 잡아 말을 세웠다.
군주가 멈춰서자 그를 따르던 수행원 또한 일제히 말을 멈췄다.
푸레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루페르트가 말머리를 돌렸다.
“돌아갑시다.”
시선들이 루페르트의 얼굴을 향했다.
그 대부분의 색채는 의문이었다.
그 의문의 무게를 마음속 깊이 느끼며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쉰 후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들을 버리는 건 쉬운 일이다. 양심으로부터 잠시 고개를 돌릴 수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허나.”
루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쉬운 길만을 가지 않겠다.”
모두가 루페르트의 결정에 의문을 품었다.
오직 단 한 명, 마를로네를 제외하고는.
‘저 사람.’
그녀가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조부를 닮은 암녹색 눈동자에 늘 서려 있던 안개가 걷혔다.
루페르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칠칠치 못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놈의 슈발츠마인 가문 소속만 아니라면.
그래도 선은 분명히 그었다.
그 남자, 루페르트 가우저는 권력자다.
권력자의 속성은 그녀가 보기엔 욕심 많고 이기적인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갖가지 감언이설이니 꾸며 낸 위엄, 그럴듯한 대의명분으로 무장했지만 결국 그들이 원하는 건 눈앞의 이익이다.
루페르트 또한 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편견은 서서히 흐릿해져 갔다.
함께한 시간이 길수록, 함께 경험한 수라장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그 사내가 막강한 전사와 마법사 사이에 서서 그야말로 한 명의 군주로서 명하고 있다.
“나는 선제보다 야망은 크지 않을지 몰라도 욕심만큼은 많은 모양이다. 제국 의회의 소집도 막을 것이고 나를 지지해 준 남작 일가 또한 지킬 것이다.”
루페르트가 앞장서서 저택으로 말을 내달렸다.
군주의 선택이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말없이 뒤를 따랐다.
습격자들은 승냥이처럼 교활하고 비열했다.
저택을 포위하고 사로잡은 병사와 하인을 재미 삼아 고문하고 살해하던 그들은 루페르트가 돌아오자마자 부리나케 달아났다.
루페르트가 다가오는 걸 보자마자 남작이 문을 활짝 열고 후다닥 달려 나왔다.
“페하! 오! 황제 폐하!!! 저 같은 하찮은 귀족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백발의 슈베린 남작 뒤에 창백한 소년이 활짝 웃고 있었다.
건조하고 뒤틀린 마음에 약간의 안식이 찾아오는 감각을 느끼며 루페르트는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두 명을 남기겠다.”
모두의 놀란 시선이 루페르트를 향했다.
여기서 두 명을 남기겠다니.
“지겔슈타트 법사와 징펠만 총사.”
입을 닫고 있던 지겔슈타트가 열국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여기 남는다면…….”
“걱정 마십시오.”
루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남은 두 명을 돌아보았다.
“이들은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믿을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저에겐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
“피차 서로 가진 말의 속도는 대체로 비슷하다.”
“그 말씀은?”
지겔슈타트는 루페르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둘은 이제 영혼 동맹이다.
설명 따윈 필요 없다.
지겔슈타트, 한스 징펠만과 루페르트는 단순한 신뢰를 넘어선 영혼으로 묶인 동맹 관계니까.
루페르트 일행이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