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19. 하류 (3)
“……공이라.”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법이다.
모처럼 다른 사람들이 축구를 하는 걸 보자 루페르트는 피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공을 못 찬 지도 참 오래됐지.’
황제 후보가 되기 전까지 루페르트의 신분은 사실상 한량이었다.
그도 비슷한 처지였던 카를 호이징거같이 노는 걸 좋아했는데, 친구도 별로 없고 돈도 별로 없는 그가 즐길 수 있는 놀이는 자연스레 돈이 안 들어가는 종류로 한정됐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놀이는 플루트와 축구였다.
어느 쪽도 좋아했지만 잘하는 건 축구였다.
하켄하임에서 루페르트의 이름이 알려진 건 그 천재적인 축구 실력 때문이었고, 곧 그는 축구 용병으로 활동했다.
피혁업자 길드, 수도회, 인근 마을 친선전까지 루페르트가 안 끼는 곳은 없었고, 그가 가는 곳마다 승리가 있었다.
나중엔 초월적인 실력이 소문나 출전 금지까지 될 정도였으니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꼭두각시 황제 시절에도 루페르트의 축구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제국에서 가장 공을 잘 찬다는 사람과 모아 시합을 하기도 했고 거기서 자신이 나름 제국에서 공 좀 찬다는 친구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걸 확인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축구의 황제라고 할까.
하지만 그조차도 오래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 가는 데 황제라는 작자가 하층민이나 즐기는 축구 놀음이나 한다는 비판을 듣다 보니 그 좋아하는 축구도 플루트도 그만뒀다.
회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위버하임 시절엔 처참한 능력을 키우느라 놀 시간도 없었고, 선제후가 된 이후엔 위신에 손상이 갈까 봐 공을 만지지도 못했다.
그런데 모처럼 주변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공을 발견했다.
강력한 적들이 추격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조금은 숨을 돌리고 싶은 것이 루페르트의 마음이었다.
‘한 번은 괜찮지 않겠어? 나도 사람이야. 사람.’
루페르트는 그대로 외투를 벗어 던지고 아이들에게 난입했다.
“뭐예요? 아저씨?”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아이들이 격렬히 반발하자 루페르트는 품 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 아이들에게 내밀었다.
“공 한 번만 차게 해 주지 않으련?”
제국은 예로부터 상업의 번영을 중시한 나라다.
제국에서 돈 앞에서 안 되는 건 그리 많지 않다.
덩치가 큰 아이가 루페르트에게 공을 차 넘겼다.
아이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딱 봐도 어디 귀족 샌님 같은데. 공이나 한번 차 봤나 몰라.”
“공 한 번 차겠다고 은화까지 주다니. 돈이 썩어 넘치나 봐.”
“아빠한테 털라고 해야겠네.”
“저 샌님 공 제대로 찰 수나 있을까 내기할까?”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고 또 한 명의 관중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마를로네다.
손에 종류를 알 수 없는 고기 꼬치를 든 그녀는 고기를 우물거리며 아이들 사이에 서 있는 루페르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저 사람.”
그녀는 적당한 나뭇등걸 위에 허리에 두르고 있던 이불 같은 천을 끌러 자리를 만든 다음 새침하게 앉아 꼬치를 먹으며 루페르트의 꼬락서니를 지켜보았다.
“그럼 공 보낼게요!”
덩치 큰 소년이 루페르트를 향해 공을 찼다.
마를로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패스가 아닌 강력한 슛.
루페르트의 면상을 노린 악의적인 공격이었다.
순간 마를로네는 생각했다.
이런 공격으로부터도 루페르트를 지켜야 하는지 마는지.
죽기는커녕 조금 아프기만 하겠지만 그래도 룸왕 전하의 위신이 깎이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갈등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개울 너머에서 같은 갈등을 가진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윽.’
지겔슈타트다.
나름 누그러졌다고 하나 저 마법사는 최악이다.
더욱 고까운 건 그 마법사 상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마법사는 그녀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루페르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도 소년이 날린 강력한 슈팅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사냥꾼처럼 전부 불태워 죽이는 건 아니겠지.’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뒤늦게 마를로네는 루페르트 쪽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루페르트의 발이 무용수처럼 높이 올라가 얼굴로 향하는 공을 막고 있었다.
상당한 유연함에 놀라워했지만, 진짜 쇼는 이제부터다.
루페르트는 가볍게 공의 기세를 낮춘 후 본격적으로 진정한 황제의 발재간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툭 툭 툭 툭.
무릎, 발등, 머리, 가슴, 때로는 발꿈치까지.
루페르트는 사용 가능한 모든 부위를 이용해 공을 허공에 튀기면서 바닥에 닿지 않는 묘기를 선보였다.
아이들의 적의와 시기가 관심과 선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평가를 피부로 느끼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신님의 평가 항목에 빠져 있지만 내 축구 실력은 마스터급이지.’
공을 튀기던 루페르트가 타이밍 좋게 허공에 있는 공을 걷어찼다.
장대 두 개를 세워 만든 조잡한 골문을 지키던 덩치 큰 소년이 이리저리 움직이다 공을 쫓으려 해 보지만 루페르트의 공은 소년 앞에서 마술처럼 휘어지며 장대 안으로 들어갔다.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걸 들으며 루페르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나는 축구의 황제다.’
멀리서 지켜보던 마를로네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오.”
남은 고기를 우물거리며 그녀는 루페르트가 보무도 당당히 마을 쪽으로 가는 걸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우리 황제 폐하. 재주 하나는 있으셨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마를로네만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전하는 경이롭군.”
신비로운 눈동자에 경의를 담으며 지겔슈타트는 멀어지는 루페르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축구까지 이렇게 잘하실 줄이야!”
지겔슈타트가 다급히 루페르트의 뒤를 따랐다.
마를로네는 마법사의 평소 같지 않은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정오의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이 지금 그녀에겐 더 소중한 행복이었다.
한껏 몸을 이완한 채 마를로네는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했다.
* * *
“전하.”
지겔슈타트가 루페르트를 뒤에서 불렀다.
루페르트가 돌아섰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다름이 아니오라.”
어딘가 쑥스러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늘 신비롭고 오만하며 무엇보다 강력한 마법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루페르트는 의아함을 느꼈다.
‘뭘 말하려는 거지? 설마 여기 있는 도펠죌트너를 죄다 죽이겠다는 말을 늘어놓는 건 아니겠지?’
“사실 이게 욕먹을 짓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건 조금 윤리적인 문제가…….”
“정말로 여기 사람들을 죽이려는 겁니까?”
루페르트가 정색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놀란 건 지겔슈타트다.
바로 놀란 얼굴로 되물어온다.
“누굴 죽인다는 겁니까?”
“여기 사람들.”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오해가 있었군요.”
“제가 대학의 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건 사실이지만, 아무 절차도 없이 사람을 해칠 정도로 막돼먹은 사람은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잠깐의 오해가 풀린 후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여전히 지겔슈타트는 주저하고 있다.
‘뭘 말하려는 거지?’
곧 지겔슈타트가 결심한 표정을 지으며 루페르트를 결의에 찬 눈으로 응시했다.
“전하.”
“말씀하세요.”
“짧지 않은 여정 속에서 저는 전하 바로 옆에서 전하의 말씀을 들었고 행동을 목격했습니다.”
‘그건 그렇겠지. 항상 내 옆에서 날 지켰으니.’
“대학의 마법사로서 정치에 관여하거나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건 금지되어 있으나, 개인적인 감상을 말할 자유는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지겔슈타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전하는 따뜻한 심장의 소유자이십니다.”
‘또 선량하다는 칭찬인가.’
“동시에 전하는 사자의 심장을 가지신 분이기도 합니다.”
“!”
실망의 문턱에 서 있던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축구도 잘하시지요.”
“역시 사각 마법사다운 뛰어난 안목이시군요.”
“전하의 용단과 비할 바 없는 용기로 밑바닥에 던져진 이 요한 카델라 폰 지겔슈타트는 잃어버린 광명을 되찾았습니다.”
지겔슈타트가 더할 나위 없는 경의를 담아 지팡이를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대학의 마법사는 대학의 의지에 구속됩니다. 위대한 오각의 마법사조차 그럴지언정 사각의 마법사에 불과한 저도 예외는 아니지요. 하지만 마법사 또한 한 명의 인간입니다. 대학이 아닌 다른 사람을 따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전하는 곧 황제가 되실 분입니다.”
그 순간 루페르트는 보았다.
그의 손바닥 위에 마술적인 빛줄기가 모이며 한 장의 카드가 나타나는 것을.
‘이건?’
틀림없다.
여신의 권능, 카드의 군단이다.
손에 쥐어 쥔 카드에 한 사내의 얼굴과 더불어 이름이 빛의 펜으로 쓰여졌다.
[ 지겔슈타트 ]
“아직 여정이 끝난 건 아닙니다. 마무리 지어야 할 일 또한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사히 돌아가서 제국의 품에 안기고 그때 전하, 아니 폐하께서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심지어 대학이 저를 원하는 때라고 할지라도 달려가 제국 마법사의 본분을 다하고 싶습니다.”
루페르트는 담담한 얼굴로 지겔슈타트와 손바닥의 카드를 번갈아 보았다.
황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 말, 기억하겠습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영혼 동맹을 얻었다.
피리스 같은 초급 마법사와 격을 달리하는 진정한 마법사가 루페르트의 군단에 합류한 것이다.
카드를 보았다.
[ ‘마법사 살해자’ 하인리히 지겔슈타트 ]
- 등급
S- 특징
비인가 마법사 사냥꾼 A+
영역 감지자 A+
마법보다는 학문 A+
- 영혼 동맹 효과
마법 무력화 S
‘S라고.’
최상 등급의 인재다.
저 한스 징펠만마저도 뛰어넘을 정도로.
특히 영혼 동맹 효과는 말이 되지 않을 정도다.
능력 쪽을 가만히 응시하자 설명이 떠오른다.
<마법 무력화>
- 지겔슈타트보다 격이 낮은 모든 마법을 무효로 돌린다.
룸 제국의 마지막 황제, 파비안 아비투스가 가지고 있는 것과 거의 같은 능력이다.
‘설마하니 이 정도 사람이 내 영혼 동맹으로 들어오게 될 줄이야.’
문득 루페르트는 외로움을 느꼈다.
항상 이런 일이 있을 때면 그의 여신님이 마음속에 직접 울리는 단아하고 청명한 목소리로 루페르트에게 해석을 해 주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여신님과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이제 아주 조금이다.
루페르트는 자신의 새로운 영혼 동맹을 굳건한 신뢰가 담긴 눈으로 응시했다.
그의 영혼 동맹 또한 더 이상 신비롭지만은 않은 푸른 눈동자로 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 * *
막간의 휴식이 끝나고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이제 고어문트입니다. 선제후에게 도움을 청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고어문트라.”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이 하브루타인에게 구입한 새 지도를 가만히 바라보다 곧 고어문트령 한가운데 섬처럼 뚝 떨어진 영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어문트 선제후도 좋지만, 이쪽이 좋겠군요.”
“슈베린 남작령?”
“골트문트의 친척이지만 처가가 슈발츠마인 쪽입니다. 고어문트 가문 쪽에서는 급이 떨어지고 처가 쪽에서 오히려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지요. 사실상 슈발츠마인계라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루페르트의 말을 듣던 지겔슈타트와 한스 징펠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저 나이에 저 정도의 방대한 궁중 지식을 가지고 있다니.’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귀족과 군주, 가문의 파워밸런스를 한눈에 꿰뚫어 본다.
그건 루페르트 본인도 모르는 그만의 강점이었다.
10년간 꼭두각시 황제 놀음을 했다고 하지만, 그동안에 보고 듣고 경험하고 치열하게 몸부림한 흔적이 지식의 형태로 새로운 루페르트의 뇌리에 자리 잡은 것이다.
“슈베린 남작에게 여비와 소수의 호위를 받은 뒤 전력으로 디터팔츠로 넘어갑시다. 여기에도 친 슈발츠마인 군주가 있습니다. 디터팔츠에 이르면 여정은 거의 끝을 바라보겠지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향하는 동안 루페르트의 시선은 오직 지도의 상단. 테타우만을 오롯이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간다. 황제의 관과 황제의 의무와 황제의 싸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울러.’
루페르트는 가슴 위 허공을 자기도 모르게 어루만졌다.
‘여신님 또한.’
명찰 없는 도펠죌트너들의 배웅을 받으며 루페르트 일행은 무법자의 마을을 떠났다.
볼품은 없지만, 인내심 강한 말 등 위에 올라탄 루페르트 일행은 거칠 것이 없었다.
쾌속으로 북진에 북진을 거듭했다.
거기엔 추격자도 앞을 가로막는 군대도 없었다.
순조롭게 루페르트 일행은 슈베린 남작령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