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7.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 (1)
[ 누구나 강력한 마법사를 꿈꾸지만 모든 사람이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랍니다. 이 세상에 분명 존재하지만,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마나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자만이 마법사가 될 자격이 있죠. 이 사람은 그 자질이 있습니다. ]
피리스의 카드에 표시된 특징 중 하나인 마법사의 후각에 관한 설명이다.
“이 능력은……?”
이에 제단 위의 소라고둥이 대답한다.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이제 마법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답니다. 소위 말하는 제국의 전쟁 마법사처럼 완벽한 형태와 기원, 실체를 파악할 정도의 정교함은 없겠지만, 범인이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을 안다는 건 퍽이나 요긴한 일이죠.”
“마법이라…….”
루페르트는 황제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법사. 의지의 힘을 실체적인 힘으로 변환시키는 권능을 지닌 존재.
제국에서 마법사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특히 전장에서 활약하는 전쟁 마법사들은 제국을 떠받드는 기둥 중 하나다.
피리스가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카드에 적힌 그녀의 특징과 등급은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통찰의 만화경 속의 등급이 바뀐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카드의 등급도 바뀔 수 있는 거군요.”
제단 위의 소라고둥은 곧 특유의 청아하고 기품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인간이 지닌 운명의 실은 여러 갈래니까요.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 변화가 나타난다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어요. 운명이 변한다는 말은 저의 평가가 바뀔 수 있는 것과 일맥상통하지요.”
“……그렇군요.”
타오르는 불꽃처럼 밝은 빨간 머리와 고양이처럼 큰 눈을 지닌 아름다운 여성의 초상화가 그려진 카드를 보며 루페르트는 조용히 읊조렸다.
“전생에서는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지금은 영혼 동맹을 맺을 정도로 발전하다니. 인간의 운명이란 정말로 알기 어렵군요.”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답니다. 균형의 여신인 저조차 한눈에 모든 걸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요.”
통찰의 만화경 속의 등급은 변화할 수 있다.
피리스의 구원으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다.
‘여신님의 힘은 정해진 운명마저 바꿔 놓는구나.’
한 여성의 운명을 바꿨다.
제국의 운명과 무게감은 다르지만, 변화는 루페르트의 심장에 신선한 자신감을 이식했다.
그 길로 루페르트는 책 한 권을 피리스에게 선물했다.
마법제요, 당대에 이름 높은 제국 전쟁 마법사 헬브라이트 베틀렌의 저서로 현재 테타우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마법 입문서다.
“남작님. 이건 뭐죠?”
하녀복 대신 평상복을 입고 첫 근무에 나선 피리스는 눈을 크게 뜨고 루페르트가 내민 책을 응시했다.
“너, 마법 좋아하지 않았어?”
루페르트는 목수들이 작업대로 쓰던 간이 탁자 위에 두꺼운 책을 올려놓았다.
피리스의 눈동자가 책의 제목에 꽂혔다.
마법제요. 그녀도 익히 아는 제목이다.
“그,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는 혀를 살짝 깨물었다. 전생에서 마냥 쌀쌀맞은 모습만 보던 루페르트에겐 신선한 광경.
그는 오두막 너머 목수들이 오가며 작업을 하는 걸 지켜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전에 병에 걸려 앓아누웠을 때, 네가 읽는 책을 봤거든.”
“그랬었던가요? 하지만 이걸 읽을 시간이 있을까요? 저를 위해 일자리까지 주신 루페르트 님께 보은하려면 하루 종일 일해도 모자랄 거 같은데…….”
피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감사한 마음에 울컥 무언가 속에서 치밀어 오른 것이다.
루페르트는 피리스를 부드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이곳 관리라고 해 봐야 딱히 할 일은 없을 거야.”
그의 목소리를 들은 피리스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루페르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기껏해야 양초나 갈고 건물 앞이나 비로 쓸고 그런 거겠지. 시간이 많이 남아돌 거야. 하녀 생활과는 달리.”
“남작님…….”
“딱히 네가 예뻐서 이런 특혜를 베푸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루페르트는 목에 걸고 있던 소라고둥이 갑자기 흔들리는 걸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빛의 문자 형태로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 쓸데없는 소리는 자제하세요. ]
루페르트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루페르트가 실소를 터뜨리고는 입을 열었다.
“방금 한 말은 농담이야. 아무튼 앞으로 내 일을 잘 도와줬으면 좋겠고, 너도 잘됐으면 좋겠어. 그게 내 본심이고.”
피리스는 소탈한 루페르트의 모습에 마음이 풀리는 걸 느끼고 두 손으로 탁자 위의 큼지막한 책을 안아 들었다.
“정말로 감사히 받을게요. 하지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고양이처럼 큰 눈이 아래로 향한 채 심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은혜? 그건 강력한 마법사가 된 다음에나 갚아. 제국 전쟁 마법사가 딱 좋겠네. 내가 황제가 되면 네가 전쟁 마법사로 날 보필하는 거야. 이 책을 쓴 헬브라이트 베틀렌처럼 말이야.”
루페르트는 서점에 붙어 있던 벽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내년에 제국 마법 아카데미 시험이 있다고 들었는데.”
“시험요?”
“응. 마법의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지원할 수 있다고 하던데 한번 도전해 보는 게 어때? 혹시 알아? 네가 어엿한 제국의 마법사가 될지?”
피리스는 루페르트가 선물한 책을 안은 채 눈물기 도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 * *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이 서서히 시들고 북쪽에서 찬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왔다.
동장군이 느릿하게 진군을 준비하는 그 시기, 리프니에의 신전 공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었다. 공사를 맡은 목수 길드의 장의 말에 의하면 완공 예정은 내년 봄 무렵이라고 한다.
숨은 폭군이 사라진 위버하임 장원의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그동안 루페르트는 곧 다가올 행사를 차분히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테타우의 궁정 모임이다.
전생에서 루페르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제국을 이끄는 일곱 선제후들과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슈발츠마인의 선제후 자리가 공석이라 여섯 명이지만.
그때 루페르트는 미숙했고 경험도 없었을뿐더러 뭔가를 해야 할 목표 의식도 없었다.
덕분에 당시의 기억이라고는 빛으로 가득 찼던 화려한 연회장의 풍경, 정신없이 연회장을 오가며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과의 인사 따위가 혼재된 정리되지 않은 기억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루페르트는 잘 알고 있다.
1년에 한 번 있는 테타우의 궁정 모임은 제국 회의를 제외하고 가장 큰 제국의 행사로 소위 말하는 일곱 선제후는 물론 제국 각계각층에서 제국을 이끄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주인공이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최소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 줘야 한다.
작은 평판 하나하나가 향후 제위에 올랐을 때 황제의 위신을 구성하는 밑바탕이 되니 말이다.
전생에서 루페르트가 황제가 됐을 때 제국 고위층들 사이에선 궁정 모임의 원숭이가 황제가 됐다는 악소문이 한동안 이어졌었다.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루페르트는 최근 룸어 공부도 마다하고 제국 인명록을 붙잡고 살고 있었다.
제국 인명록엔 소위 제국에서 힘 좀 쓴다는 명사들의 이름과 직업, 작위와 공적 따위가 망라되어 있다.
어떤 모임에서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적지 않은 호감을 심어 주는 건 물론 자신의 품격 또한 높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준다.
명문가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적게는 수천 개, 많게는 수만 개에 달하는 두꺼운 인명록을 달달 외우게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방의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모르는 이름을 암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의미로 난해한 룸어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루페르트에겐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귀족 명문가의 자제보다 유리했다.
10년 동안 황제 노릇을 한 그는 여간한 명사의 얼굴은 물론 그들의 성격, 행동, 간략한 미래까지 알고 있었다.
“드레이아 란그도흐. 이 친구……. 알 것 같아. 고어문트가 신교연합군에게 침략당할 때 구원을 탄원하러 온 사람이잖아?”
그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은 채 인명록을 들고 테타우 궁정 모임에 출석할 만한 명사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추억과 함께 음미하며 읽어 나갔다.
평화롭고 평안한 하루다.
조만간 제국에 닥칠 무시무시한 위기 같은 건 딴 세상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남작님. 바깥에 누군가 남작님을 찾아왔습니다.”
세바스티안이다. 그런데 들려오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루페르트는 책을 덮고 문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인가?”
세바스티안은 상기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왔다. 그는 급히 루페르트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 도펠죌트너가 남작님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도펠죌트너?”
루페르트는 창가로 가 저택 앞에 선 두 명의 손님을 내려보았다.
일로일소(一老一小).
기골이 장대한 늙은이 하나와 십 대 중반 정도 되는 사내아이가 멀찌감치 선 하녀들 너머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그들의 허름한 복장 위에 달린 선명한 붉은 명찰을 눈에 담았다.
“저 빨간 명찰. 확실히 도펠죌트너인 모양이군.”
도펠죌트너. 두 배의 급료를 받는 자들.
원래는 용병들 사이에서 경험이 많고 노련한 정예병을 일컫는 말이지만 철혈대제 치세에 그 단어는 의미를 달리했다.
마도강화병(魔道强化兵).
흑마법인지, 백마법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마법을 이용한 비밀스러운 의식을 통해 평범한 인간에서 초인적인 힘을 지닌 존재로 거듭난 병사들이다.
그들은 철혈대제 치세 초기 일어났던 대전쟁 당시 제국 보병대와 함께 일선에서 맹활약했지만, 대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제국의 골칫거리로 변모했고, 급기야 황제에 대한 반역을 일으켰다.
철혈대제는 반역에 가담한 도펠죌트너를 잔혹하게 처형하여 남은 자들에겐 붉은 명찰을 달게 해 제국 사회에서 영원히 주변인으로 겉돌게 했다.
루페르트가 황위에 오른 뒤에는 빨간 명찰을 단 도펠죌트너들은 시대의 흐름 속에 사멸했지만, 지금 단계에선 생존자가 적잖이 남아 있으리라.
“어떻게 할까요?”
세바스티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
루페르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장고에 빠졌다.
저 빨간 명찰을 단 존재가 사람들의 두려움을 사는 건 힘이 있기 때문이다. 여간한 상식, 알량한 힘 따위는 무자비하게 박살 낼 정도의 강한 힘이.
잃을 게 없는 도펠죌트너가 마을 하나를 몰살했다는 소문은 제국 어디를 가도 들을 수 있다.
한스 징펠만이 도제를 데리고 빙해로 떠난 지금, 저 빨간 명찰을 단 초로의 사내가 나쁜 의도를 품고 왔다면 루페르트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루페르트를 긴장하게 만드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전생에선 없었던 일이다.’
미래라는 말엔 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지만 루페르트는 잠시 그것을 잊고 있었다.
“돌려보낼까요?”
세바스티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여신의 소라고둥을 손에 쥔 채 당당하게 문밖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