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6. 청소 (3)
몇 번이나 소나기가 왔다 그쳤을까.
적당한 소란 속에서 안온한 한 달이 훌쩍 흘러갔다.
신전은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커다란 홀이 딸린 아담한 2층 건물이었다.
도시에 있는 대성당에 비하면 초라한 규모지만, 마감재와 내장재, 부조로 쓸 장식은 형편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상의 품질로 주문했다.
오크족의 움막과 크게 다를 바 없던 예전 신전에 비하면 환골탈태 수준의 변신이다.
새로운 신전이 어느 정도 완성될 무렵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다시금 루페르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강 돌아가는 판세는 파악했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돌아왔다.
루페르트는 그를 신전으로 안내해 보고를 속행하게 했다.
이어진 보고에서 루페르트는 잊고 있던 이름을 듣게 된다.
“빌헬미나라는 여자, 아래에 있는 위버하임 촌락의 유지이자 촌장인 도리안 비하스의 딸이라고 하더군요.”
“도리안 비하스?”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이라고 주인이 없던 위버하임에서 사실상 영주 노릇을 하던 사내였다.
그 사내가 빌헬미나의 배후라면 위버하임 장원의 사람들이 왜 그토록 빌헬미나에게 쩔쩔매는지 납득이 간다.
루페르트가 위버하임 장원에 머무는 건 잠깐이지만, 도리안 비하스는 그가 죽을 때까지 위버하임 영지에 머무를 테니 말이다.
마을 유지에 촌장, 거기다 인근 지역의 지방법원 판사직까지 돈으로 사들인 그 사내는 위버하임 촌락에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어느 쪽에 붙는 게 유리한지는 명약관화하다.
“도리안 비하스의 뒤엔 누가 있습니까?”
“일곱 선제후 중 한 명과 연줄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게 누굽니까?”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번갯불 같은 불빛이 번뜩였다. 한스 징펠만은 주위를 둘러본 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궁중백 골트문트 님입니다.”
“골트문트라…….”
의외의 결과다. 그는 일곱 선제후 중 그나마 루페르트를 대접해 준 인물이었다.
황후 울피아나 또한 골트문트의 여식.
이웃 강국의 왕자들이 하나 같이 원하던 귀한 딸을 자신에게 내준 사람이다.
드러내놓고 루페르트에게 적대하던 레벤호스트와는 대칭점에 서 있는 존재라고 할까나.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다.
그는 새로운 입장에서 모든 것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집 안에 있는 쥐새끼를 청소하고 싶군요.”
루페르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스 징펠만은 콧수염을 매만지며 명랑한 음성으로 답했다.
“집안의 쥐새끼라면 저 대신, 제 도제들에게 의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스 징펠만의 도제.
기와 루라는 이름을 지닌 쌍둥이에 대해 루페르트가 아는 건 거의 없었다.
그들은 한 달 전부터 위버하임 장원에 머무르긴 했지만, 방안에서 두문불출했고 식사 시간 이외엔 바깥에 나오지 않았다.
하녀들의 말에 의하면 그 쌍둥이들은 온종일 책상 위에 담요 같은 걸 깔고 그 위에 복잡한 쇳덩이를 수십 개나 펼쳐 놓고 놀고 있다고 한다.
“생긴 건 귀여운데 뭐랄까. 조금 분위기가 무섭다고 해야 하나.”
가끔 그들의 방을 정리하러 들린 피리스가 하녀들에게 말하던 평가다.
이제 루페르트는 그 문제의 쌍둥이가 묵는 객실 앞에 섰다. 그는 문가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대답이 없다.
루페르트는 문가에 서서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루페르트 가우저. 이 장원의 주인이야. 잠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괜찮겠어?”
그 말을 하고서도 안에선 대답이 없었지만, 곧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루페르트는 열린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좀처럼 보기 힘든 흑백의 옷을 입은 쌍둥이들이 문가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남녀 쌍둥이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죽은 생선의 눈처럼 광채 없는 눈으로 루페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다.
루페르트는 문을 닫고 어지러이 총기 부품이 널린 탁자를 지나 활짝 열린 창가 앞에 서서 풍경을 한 차례 감상하고는 커튼을 닫으며 쌍둥이에게 말했다.
“너희들하고 이야기하는 건 처음인 것 같네. 걱정하지 마. 다 너희들의 주인에게 허락을 맡고 온 것이니까.”
“주인님이요?”
한마디 말도 없던 쌍둥이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죽은 눈동자에 생기가 돈 것도 그 무렵이었다.
루페르트는 그 작은 변화를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에 아주 큰 쥐가 살고 있어서 말이야. 겨울이 오기 전에 청소를 하려고 하는데 엽사님이 말하길 너희들이 제격이라고 하더군. 해서, 너희들에게 쥐 청소를 의뢰하려고 하는데.”
루페르트는 금화를 한 닢 꺼내 탁자 가장자리에 올려놓았다. 한스 징펠만이 귀띔한 의뢰의 방식이다. 쌍둥이들은 한동안 금화를 바라보다 서로를 마주 보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를 받아들인 것이다.
쌍둥이 중 맏이는 루였다. 5분 간격 차이로 태어난 누나라고 한다.
그녀는 루페르트에게 기계적인 어조로 그들의 계획을 말했다.
계획을 전해 들은 루페르트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니까, 그 여자를 도둑으로 몰아 쫓아내자고?”
진부하고 고전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쌍둥이는 진지했다.
“저희들이 준비한 대로 연기해 주세요. 나머지는 저희들이 처리할 테니까요.”
그들의 태도를 본 루페르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어린 애들이라고 해도 저 한스 징펠만의 도제다. 그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메헨부르그에서 익히 보지 않았던가?
게다가 고전적이고 유치한 방법이 반드시 나쁜 방법이라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제대로 들어맞기만 한다면 상대방을 둘도 없는 굴욕감 속에서 퇴장시킬 수 있으리라.
루페르트는 즉각 테타우로 가서 제법 값이 나가는 반지 하나를 구입했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것을 집사와 하녀들에게 자랑했다.
그날 밤, 루페르트는 불길한 감각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어둠 속에 칼날이 자리 잡은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이 느낌은?’
창문 쪽에 미세한 소리가 났다. 안에서 걸어 잠근 걸쇠가 희미하게 번쩍이는 도구에 의해 말아 올려졌다.
루페르트는 침대맡에 놓아 둔 단검을 베개 밑에 숨기고 서서히 열리는 창문을 노려봤다.
창문 너머에 4개의 불빛이 번득였다.
‘쌍둥이들인가?’
그의 예감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 흑백의 옷을 입은 쌍둥이들이 창틀을 타고 넘어왔다.
그들은 루페르트가 깨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응시했지만, 그것도 잠시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옆 테이블에 올려놓은 반지를 챙기고 소리 없이 자리를 떠났다.
열린 창문이 닫히고 빗장이 바깥에서부터 잠겼다.
그 모든 과정에서 쌍둥이들은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 발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솜씨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루페르트가 완벽한 잠입술을 지닌 쌍둥이의 침입을 미리 감지했다는 사실이다.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다.
‘이것이 영혼 동맹으로 얻은 위기 감지의 힘인가.’
뜻하지 않은 시기에 새로운 능력의 힘을 실감하는 루페르트였다.
다음 날. 루페르트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미리 준비한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내 반지가 보이지 않는데 어디로 간 거지?”
반지는 빌헬미나의 가방 안에 있다.
쌍둥이들은 빌헬미나가 루페르트의 방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동쪽 끄트머리 방에 기거한다는 것까지 알아낸 상태였고 그곳에 은밀하게 침입해 공작을 마쳤다.
이제는 루페르트가 칼을 빼 들고 저택 안의 쥐새끼를 처리하면 된다.
일단 절도가 입증되면 루페르트는 할 수 있는 게 많다. 재판에 넘길 수도 있고 영주의 권한으로 가벼운 그러나, 당사자에겐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는 사적 제재도 가할 수 있다.
‘쥐가 쥐덫에 걸렸군.’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식당 끄트머리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채 자신을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는 빌헬미나를 곁눈질로 응시하고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루페르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범인이 자수한 것이다.
하녀장 마르그리트가 피리스를 루페르트 앞에 끌고 왔다.
피리스의 손엔 루페르트가 가져온 반지가 쥐어져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사색이 된 피리스는 감히 루페르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
루페르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녀장 마르그리트, 집사 세바스티안 그리고 다른 하녀들은 하나 같이 죄를 지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범인의 정체를.
그들은 범인을 알고서도 죄 없는 피리스가 죄를 덤터기 쓰는 걸 방조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자리에 모인 하녀들 너머 홀로 복도 끝자락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빌헬미나를 차가운 눈동자로 노려봤다.
‘……나랑 해 보자는 건가?’
루페르트의 눈동자 안에 차가운 안광이 서렸다.
“남작님.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집사 세바스티안이 더듬더듬 말을 걸어왔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싸늘하게 말했다.
“이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 반지 하나 따위에 내 이름에 누를 끼칠 수는 없으니. 하지만, 죄는 죄. 이 하녀를 저택에서 내보내라.”
그 말을 들은 피리스가 고개를 번쩍 쳐들고 울먹이며 말했다.
“남작님!”
피리스는 처량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남작님! 제가 잘못했어요.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여기서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 가족은 전부 굶게 된다고요!”
루페르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뒤로 돌아섰다.
“뭘 하는가? 내보내지 않고.”
서릿발 같은 명령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피리스의 고양이처럼 큰 눈이 부릅떠졌다가 이내 스르르 감겼다.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루페르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단지 뒷짐을 진 채 창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빌헬미나는 복도 너머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 남작 주제에 제법이네. 얼굴도 예쁘장하고 나름 친하게 지낸 애라서 사정을 봐줄 줄 알았는데. 저렇게 칼 같이 쳐 내다니. 다시 봐야겠어.”
빌헬미나.
그녀는 루페르트가 상상한 이상의 힘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유치한 방법으로 날 건드리려 들다니. 얼마든지 해 보시지. 몇 명이고 대폿밥으로 써 줄 테니까.”
빌헬미나는 싸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처소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한스 징펠만이 저택을 찾아왔다.
“피리스란 하녀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사정이 꽤 딱한 아가씨 같더군요. 부친은 전쟁터에서 전사했고 모친은 중병으로 오늘내일하는 상태. 홀로 어린 동생과 모친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타고난 미모에 주변의 음험한 남자들이 더러운 손길을 뻗치는 와중에서도 꿋꿋이 살아왔는데 이렇게 되니 막막하겠지요.”
그는 저택에서 일어난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뒤엔 약간은 침울해 보이는 쌍둥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한스 징펠만은 루페르트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히 말했다.
“다시 보니 저택에 살고 있는 건 작은 쥐새끼가 아니라 꽤 큰 쥐 같습니다. 야수로 분류해도 될 정도로 말이죠.”
한스 징펠만의 눈동자에서 싸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첩자 생활을 한 한스 징펠만에게 전통적인 방법이란 아마도 피와 죽음을 동반한 것이리라.
루페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생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