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11화 (411/450)
  • 82화. 신교 (1)

    건조한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

    뒷짐을 진 강엽은 계절에 맞춰 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대산맥의 정경을 가만히 감상하고 있었다.

    “곧 신교에서 마중 올 겁니다.”

    조금 뒤에서 말하는 수성좌의 말에 강엽은 턱을 주억이기만 했다.

    금성좌를 비롯한 교도들이 강엽의 도착을 알리러 갔으니 일월신교에서 반응이 있을 터.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군.”

    “허허, 아닙니다. 소신이 어찌....”

    “날 따라다니느라 가족도 못 보지 않았나.”

    “흔한 일입니다.”

    풍성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허허롭게 웃는 수성좌.

    그간 옆에서 호종만 한 게 아니라 신교의 교주로서 갖춰야 할 소양까지 가르쳐주었다.

    “비단 폐관수련 때문이 아니라도 신교의 일을 하다 보면 가족을 떠나는 일이 잦았지요. 멀리 가면 몇 년간 돌아오지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가족이 신도에 산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신교를 둘러싼 도시지요. 그 규모가 중원의 대도시들과 맞먹습니다.”

    일월신교는 천산, 나아가 신강 일대를 지배하는 맹주.

    황실과 관부의 영향도 받지 않기에 실상 이 지역의 사람들을 통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신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신도의 인구는 십만을 넘습니다. 그들이 전부 교주님을 섬기지요.”

    놀라운 말에도 강엽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똑같은 말을 전에도 몇 번이나 들었기 때문.

    물론 수성좌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껄껄, 규모만 따지면 광명마교와 흑룡교도 신교의 상대는 안 될 겝니다.”

    짐짓 호탕하게 웃으면서도 일행의 눈치를 보듯 힐끔 곁눈질하고 있는 시선.

    일사도와 팔사도, 그리고 흑룡교의 인사들이 인상을 구기는 모습에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남궁상아와의 인연으로 무림맹에 남은 연가휘를 대신해 흑룡교의 잔당을 이끌고 강엽의 세력에 합류한 이 노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신도가 크긴 하지요. 흑룡교가 건재하던 시절에도 주변에 도시가 있었지만, 냉정히 말하면 신교엔 규모가 미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강엽을 따라왔다 하나 남의 집에 온 만큼 스스로를 낮추는 처세.

    일사도와 팔사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꼬투리를 잡진 않았다.

    “거기에 우리 교도들이 머물 곳이 있을까요?”

    본래는 옛 흑룡교의 터인 서장에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최근 그곳에 혈교가 출몰한다는 소식을 듣고 얌전히 강엽을 따라온 것이다.

    “천산은 넓으니 머물 곳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걸세.”

    “그러면 다행이지만....”

    “약속하지.”

    두 사람의 말을 끊은 강엽이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담담히 선언했다.

    “흑룡과 광명, 두 종파가 내 영도 하에 있는 한 탄압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용혈의 주인이자 가루라의 화신이기도 하니.”

    용혈의 영성과 가루라의 영성.

    진조와 일월성신에 비할 수는 없어도, 백무량과 예사란에게 받은 심상으로 개화시킨 영성.

    서로 다른 네 영성들이 섞이면서 강엽은 흡혈귀를 초월한 무언가로 변했고, 그 변화는 지금도 내면의 심상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 말씀입니까. 저희는 신인을 따를 뿐입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도 역시 공손하게 읍했다.

    강엽은 광명마교를 몰락시킨 원수지만, 그들을 무림맹의 손길로부터 지켜준 은인이기도 했다. 심지어 폐인이 되었던 일사도를 회복시켜주기까지 했다.

    과거의 앙금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나, 교맥을 이으려면 휘하에 들어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난 일월신교의 교주로만 머물지 않는다. 혈마와 싸웠던 네 영웅의 후신으로서, 그들의 후손과 무맥을 아우르는 종주가 될 거다.”

    “오오...!”

    무릎을 꿇은 완안극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위대한 길을 걷는 피의 주인을 경배했다.

    “주인님이야말로 진정한 대종사! 천마가 군림하는 길에 만마가 앙복할 것입니다!”

    “...음.”

    시도 때도 없이 주접을 떠는 완안극의 모습엔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기에 강엽은 떨떠름해졌다.

    한데 수성좌 또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소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감히 주군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주책을 떨었습니다.”

    귀까지 벌겋게 익은 나머지 고개를 들지 못한 수성좌가 이 노사와 두 사도에게 사과했다.

    “미안하오. 이 늙은이가 체신머리 없이 텃세를 부렸소이다. 앞으론 처신에 주의하겠소.”

    “어찌 수성좌께서 사과를 하십니까. 일월신교의 입장에선 저흰 객이 맞는 것을요.”

    “아니오. 우리 모두 주군의 아래에서 한 식구가 되지 않았소. 주인이니 객이니 그런 건 따지지 맙시다.”

    그때 초원 너머에서 일단의 무리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왔다. 시커먼 철갑으로 몸을 감싼 기마대의 모습에 강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신교의 타격대인가?”

    “묵갑철마대(墨鉀鐵魔隊)입니다!”

    수성좌가 반색하며 외쳤다.

    묵갑철마대의 대주는 소위 중립을 따르는 인물로, 금성좌와 같은 계파에 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엽은 묵갑철마대보다는 그들이 호위하는 마차를 주목했다.

    우우웅!

    공명음을 토하는 양손의 문양.

    지난날 태화문에서 신녀를 만났을 때와 같은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현가장이라... 여기에 그가 머문단 말인가?”

    고집스럽게 생긴 초로인의 질문에 맞은편에 앉은 신녀가 면사 너머로 미소를 지었다.

    “벽 노야께선 그분이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 사이엔 서른 살도 넘는 차이가 있었지만 노인은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신녀는 존귀한 유가의 후예이자 교주의 조언자.

    비록 장로원의 일원이라고 해도 지위고하로 따지면 엄밀히 신녀의 아랫사람이었다.

    “다만 장로원은 전통을 수호하는 집단입니다. 노신들이 두 후계자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일월구천관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천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분이 일월구천관을 통과하시면 교주로 인정하겠다는 건가요?”

    “그야....”

    초로인은 말끝을 흐렸다.

    마침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면서 우레처럼 쩌렁한 묵갑철마대주의 목소리가 울렸던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장로님.”

    마차에 신녀가 있음에도 장로에게 고한다. 묵갑철마대주가 누구에게 충성하는지 보여주는 대목.

    신녀의 눈매가 살짝 굳어졌지만, 곧 여유롭게 웃으면서 벽 장로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대문 앞엔 잘 차려입은 부유한 중년인이 처자식을 데리고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현가장주인가?”

    “그, 그렇습니다. 현 모가 신교의 관개신검(貫開神劍) 벽해상 장로님을 뵙습니다.”

    “날이 추운데 고생이 많구먼. 한데 자네들만 나왔는가?”

    강엽은 그렇다 치고, 수성좌나 다른 사람들이 마중을 나오지 않은 것은 의외였다.

    현가장주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분들께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런 건방진....”

    그들이 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거늘, 코빼기도 모습을 비추지 않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입술을 씰룩거린 묵갑철마대주가 현가장주의 어깨를 잡고 부리부리한 호목을 들이밀었다.

    “안쪽에 들어가서 고하시게. 신교의 벽해상 장로님과 신녀께서 오셨다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성좌는 나와봐야 할 것 아닌가?”

    “그, 그게... 그분들께선 안에서 기다릴 테니 저보고 안내하라고 하셔서....”

    “그러니까 장로님과 신녀께서 오셨다고...!”

    “소용없답니다, 묵갑철마대주.”

    신녀의 나긋한 목소리에 묵갑철마대주가 퍼렇게 질린 현가장주를 내버려두고 고개를 휙 돌렸다.

    “속하가 아둔하여 신녀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내려주시겠습니까?”

    “그분은 제가 오는 걸 알고 계셨을 거예요. 그런데도 사람을 보내지 않은 거지요.”

    “설마 장로님과 신녀님을 무시...!”

    “됐네.”

    벽 장로가 손을 들어 만류하자 묵갑철마대주가 마뜩찮은 기색으로 신음을 흘렸다.

    “명색이 교주 후보가 아닌가. 그 아랫사람들도 한가락 할 테지. 금성좌의 보고에 따르면 광명마교와 흑룡교, 게다가 염왕도문의 전인까지 거두셨다고 하던데.”

    기실 장로원이 뻣뻣하게 나오는 건 믿기 힘든 보고 때문이었다. 일월신교의 교주가 될 사람이 광명마교와 흑룡교의 잔당들을 주렁주렁 달고 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흑룡교야 과거의 연이 있다지만, 광명마교와 염왕도문은 본교의 주적이 아닙니까? 그런 근본 없는 것들을 어찌....”

    “그러고 보니 자넨 염왕도문에 원한이 있었군.”

    “....”

    이제 생각났다는 듯이 말하는 투였지만, 능구렁이 같은 장로가 그도 모르고 인선을 짰을 리 만무.

    ‘신인은 감히 건드리지 못해도, 그 아랫사람들은 힘으로 찍어누르겠다는 심산이겠지.’

    어쨌든 대문에서 교주 후보를 부를 수도 없는 마당이니, 집주인의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월동문을 지나 연못과 기암괴석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벽 장로가 이채를 띠며 물었다.

    “본채로 가는 게 아니군. 별채로 가는 건가?”

    “예? 아, 예! 그, 그분께선 한적한 곳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아, 들었네. 그분의 부인께서 회임을 하셨다고. 한데 벌써 아이를 낳을 때가 됐나?”

    “아닙니다. 태어난 아이는 호위장의 딸입지요.”

    “허, 호위장이라.”

    벽 장로와 묵갑철마대주가 은밀히 눈빛을 나누는데, 신녀가 돌연 멈칫하면서 시선을 멀리 향했다.

    연못을 가로지른 다리 한복판에 서 있는 사내.

    머리카락을 숫사자의 갈기처럼 뒤로 넘긴 흉터 청년이 히죽 웃으면서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어서 오시오, 일월신교의 여러분들.”

    “그 기질... 네놈, 염왕도문의 전인이냐?”

    “한눈에 알아보시는군. 그렇소. 내가 염왕도문의 당대 문주인 사자염도 하후진이외다. 방금 여러분이 말씀하신 주군의 호위장이 이 몸이오.”

    “어이가 없군. 염왕도문의 당대 전인이 신교의 호위장을 맡는다고?”

    “우리 사부는 상관없다고 하시던데.”

    “뭐라?”

    “내 지위야 주군이 정한 건데 댁이 왜 왈가왈부하는 거요? 주제 넘은 짓 마시오.”

    “이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어디서 감히!”

    “됐고, 무장이나 넘기시오.”

    묵갑철마대주를 비롯한 모두가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짓자 하후진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무장을 넘기라고 했소. 무당파의 해검지(解劍池) 알지 않소? 그것처럼 무장을 풀라는 거요.”

    “이런 미친놈을 봤나.”

    묵갑철마대주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하후진을 바라보는데, 신녀가 뒤를 돌아보며 명했다.

    “무장을 푸세요. 비수, 암기 하나까지 모두.”

    신녀를 따르는 이들은 그 명령에 군말 없이 병장기를 풀어 연못 어귀에 쌓아 놓았다.

    반면 벽 장로의 수하들과 묵갑철마대의 무인들은 상전의 눈치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벽 장로가 재밌다는 듯이 수염을 쓸었다.

    “만약 풀지 않는다면 어쩔 건가?”

    “주군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수다. 소위 장로라는 자가 쓸데없이 자존심을 부린다면, 즉참하라고 말이오.”

    직후 싸늘한 안광을 뿌리는 하후진의 전신에서 뜨거운 기도가 흘러나와 사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묵갑철마대가 이를 악물고 기세를 돋웠지만, 한 사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두껍게 얼어붙은 연못이 급속도로 녹으면서 허연 수증기를 뿜어내는 열탕지옥으로 화하는 정경.

    돌다리를 찍은 대도를 들어올린 하후진이, 칼등으로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저잣거리 파락호처럼 껄렁거리고 있지만, 그 눈빛은 누구 하나 토막칠 듯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무장을 손에서 떼면 주군을 만날 수 있고,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살수로 여기고 손을 쓰겠소.”

    “만약 네놈을 꺾는다면?”

    묵갑철마대주가 기세를 끌어올리면서 대항하자 하후진이 하얗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럼 뭐 그대로 주군을 찾아가면 되겠지. 근데 감당할 수 있겠소?”

    “뭐?”

    “당신 수하들은 중독됐거든.”

    “...!”

    그 말에 깜짝 놀란 묵갑철마대주가 고개를 돌리자 묵갑철마대원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반면 무장을 풀어놓은 신녀와 그 무리는 중독된 징후가 전혀 없이, 부리나케 뒤로 물러났다.

    “네놈들...!”

    “만독자 완안극.”

    벽 장로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전각 지붕에 걸터앉은 앳된 소년이 가학적으로 웃으며 작은 호리병을 던졌다 받았다 반복했다.

    “거기 곰처럼 생긴 놈아, 일 각 안에 저 애송이를 꺾으면 해독제를 주마. 근데 꺾지 못하면 네놈 부하들은 염라대왕과 면접한다.”

    “정녕 이게 천마의 뜻이오?”

    “주인님께선 장로원이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 궁금해하시더군. 과연 그대들이 그분의 대업에 도움이 될까?”

    “단단히 오판했군. 장로원의 도움 없이 천마가 교주위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소?”

    비록 신녀가 강엽을 지지하더라도, 장로원이 물밑에서 여론을 조작한다면 민심이 등을 돌릴 터.

    완안극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벽해상. 별호는 관개신검. 이산각(理山閣)과 호법원(護法院)을 거쳐 좌호법까지 고속 승진. 고희연을 치르고 이듬해 장로원으로 이동.”

    “갑자기 그건 왜...?”

    당사자 앞에서 경력을 읊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나 완안극의 말은 이제 시작이었다.

    “장로원의 일원으로 중립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은 일성군과 긴밀하게 연통을 주고받고 있지. 뿐만 아니라 이성군의 세력과도 연이 있더군. 사돈 가문을 가교로 삼아 이성군의 측근과 우애를 진하게 쌓으셨던데.”

    “......!”

    외인이 알 수 없는 긴밀한 정보.

    순간 벽 장로는 신녀에게 고개를 돌렸으나, 그녀도 놀란 얼굴로 벽 장로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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