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탈맹 (6)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그야 뭐....”
두툼한 턱살을 긁적인 장경이 머쓱하게 웃었다.
“흐, 별거 있겠냐. 사천으로 돌아가서 계속 분타주 노릇이나 해야지. 아, 근데 중경은 안 간다.”
“왜?”
“승진했거든.”
중경 분타에서 강엽을 포함해 여러 낭인들을 발굴한 공로로 사천 분타로 영전한 것이다.
“뭐, 이것도 임시직이라고 하더구먼. 낭인전도 체제를 손볼 모양이던데... 그때가 되면 확정이 되겠지. 별 걱정은 안 해.”
광명마교와의 정마대전은 낭인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어떤 곳은 낭인들이 줄고, 어떤 곳은 늘기도 해서 분타끼리 통폐합을 한다는 모양.
“그렇군. 모르는 데서 그런 일이....”
“너야말로 어쩔 거냐?”
낭인전을 탈퇴한 건 아니나, 일월신교로 가면 낭인전 소속으로 활동하진 못하겠지.
악다문 입술 사이로 씁쓸한 감정을 흘려보낸 강엽이 허리춤에서 금빛의 패를 꺼냈다.
“어쩌긴 뭘 어째. 반납해야지.”
“끄응, 낭왕께서 아쉬워하겠구먼.”
“나중에 개인적으로 서찰 보낼 거다.”
낭인전에 들어갔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고작 이 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건들을 겪었던가.
금패를 받고 나선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지만, 낭인패를 반납하는 게 아쉽긴 했다.
“여기서 헤어지겠네.”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니겠지.”
가볍게 얼싸안고 재회를 기약하는 두 사람.
장경이 쩝 입맛을 다시며 물러난 이후엔 전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여러모로....”
“저야말로.”
함께 싸운 적은 많지 않았지만, 전강은 강엽이 피를 마시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었다.
만약 그가 그때 다른 선택을 내렸다면 강엽의 인생도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으리라.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천산으로 오십시오. 제가 그때 천산에 있다면 환영하겠습니다.”
소림의 제자인 전강이 마교에 가는 건 불가능한 일.
그러나 전강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거절하는 대신 설핏 웃음만 남기고 장경과 함께 떠났다.
“저도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강 도우가 저까지 인질로 잡을 생각이 없다면 말입니다.”
이미 강엽이 추격대를 붙잡았다는 것을 들었기에 청수는 쓴웃음이 섞인 농담을 흘렸다.
“걱정 마라. 그들은 풀어줄 생각이야.”
물론 추격을 중단해야 하겠지만, 달리 여력이 없는 무림맹으로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
“하하, 전장에선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강 도우랑 적이 되는 건 무섭거든요.”
영원히 한 편이 될 수 없는 친구를 떠나보낸다.
아쉬움보다는 씁쓸한 감정이 더 많이 들었지만, 결정을 내린 이상 뒤돌아보진 않을 것이다.
* * *
장경과 전강, 청수가 무림맹으로 떠난 뒤.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온 강엽과 하후진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당문주님.”
“협상을 하고자 왔네. 총군사께 권한도 위임받았지.”
무장을 내려놓고 온 백기 사절단.
당천경을 위시로 사천삼패의 수장들이 인질들을 돌려받기 위해 몸소 온 것이다.
강엽은 즉답하는 대신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애달픈 눈빛을 보내는 당묘정을 잠깐 동안 돌아봤다.
부친이 왔음에도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멀리서 간절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딱한 처지.
가문을 버리고 따라온 만큼 억장이 무너지겠지만 감히 내색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른다.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평무인들은 이 자리에서 풀어줄 수 있지만, 문주들은 안 됩니다. 그들은 천산 어귀에서 풀어주겠습니다.”
“이보게, 그건....”
보다못한 청성의 이송 진인이 참견했지만 당천경이 그가 말할 기회를 가로챘다.
“받아들이겠네.”
“당문주?”
“대신 날 잡아가게.”
사전에 논의된 바가 없었는지 이송 진인과 혜정 사태가 탄식했지만 당천경은 자못 당당했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팔가의 가주가 인질로 잡힌다면 무림맹은 경동하지 못할 걸세. 여기 있는 협상단의 이름으로 추격대를 보내지 않겠다고 각서도 써주지.”
“나중에 당문에 불똥이 튈 수 있을 텐데요.”
당묘정이 강엽과 함께하는 이상, 당천경이 볼모가 된다 해도 그의 희생을 알아줄 가능성은 낮았다.
오히려 뒤에서 밀약을 맺진 않았는지 의심하는 시선이 늘어날 터.
“...각오했네.”
대답이 잠깐 늦긴 했어도 당천경은 결연한 낯빛을 해보였다.
‘무림맹의 여력상 추격대를 보낼 순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대놓고 그 사실을 인정하진 못하겠지.’
결국 협상을 이끈 당사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테니, 당천경이 모든 오욕을 뒤집어쓰리라.
“제 조건은 같습니다. 첫째, 평무인들과 당문주님을 교환하는 것. 둘째, 우리를 추격하지 말 것. 셋째, 광명마교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할 것.”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그렇다 쳐도... 광명마교에 대한 탄압을 멈추라고?”
“원시안진, 받아들이고 말고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일세.”
무림맹이 공문을 전해도 맹방들이 따르지 않으면 그만. 하물며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는 자들까지 무림맹이 어찌 통제한단 말인가.
“전부 통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의만 보이면 된다는 거군. 자넨 일월마교로 가면서 광명마교까지 품에 안을 생각인가?”
“또한 무림맹에 귀의한 흑룡교의 잔당 중에서도 저를 따라오겠다는 사람은 막지 말아주십시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어지는 말에 세 수장들의 안색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제서야 두 마교의 후인들을 사병으로 삼으려는 강엽의 노림수를 깨달은 것.
강엽은 단순히 일월신마공의 표식이나, 심상지경의 경지에 도달한 무력만 앞세울 생각이 없었다.
‘일월신교의 권좌만 노려서는 부족하다.’
단지 권좌를 탐해서야 일월신교를 갈라먹은 두 계파의 후계자들과 다를 게 없다.
일월신교의 교도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사려면 새로운 담론을 제시해야 할 터.
당천경과 이송 진인은 눈을 질끈 감았고, 혜정 사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잘게 떨었다.
“아미타불... 강 시주는 무엇이 되려고 하십니까?”
“모든 마도 종파의 종주.”
사마외도를 아우르는 대종사.
천 년간 이어진 마교를 일통하는 절대자.
“천마(天魔).”
언젠가 진조가 말했던 존재.
당시엔 유치하다는 생각에 질색했지만, 원하는 바를 손에 넣으려면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귀영은 사라지고, 천마가 그 자리를 대신하리라.
“나는 천하를 돌며 마도를 일통할 테니, 당신들은 새로운 맹주를 뽑을 궁리나 하시오.”
훗날 무림의 전설이자 백도 정파의 치욕으로 여겨지는, 천마의 군림행(君臨行)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 * *
강호에 풍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린 귀영이 마도로 전향, 스스로 천마를 자처하여 강호 무림을 순회한다는 풍문.
여행객들과 상인들이 모인 노상 객잔도 무림에서 들려오는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자네 들었나? 천마가 무림맹의 인사들을 인질로 잡고 항주까지 갔다더군.”
“나도 들었네. 앞길을 막은 백도 정파를 발구름 한 번으로 무릎 꿇렸다고 하던데....”
“말세로구먼. 천하제일인이 마인이 되다니. 쯧쯧, 세상이 어찌되려고 이런 일이....”
“더 심각한 건 무림맹은 꼼짝 못한다는 거지.”
주변을 살핀 자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면서 속삭였다.
“사실 그럴 만도 해. 맹주가 죽고, 대문파의 수장들이 인질로 잡히지 않았나. 소문에 의하면 몇 명은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을 했다더군.”
“그래서 누가 죽었는가?”
“아무도 안 죽었지.”
“자결했다면서?”
“듣자하니 천마에겐 신묘한 재주가 있어서, 스스로 혀를 잘라도 되살렸다고 하네.”
“아니, 약선도 아니고 무슨....”
“예끼,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증인들도 많단 말일세. 하루는 천마가 성수장이 있는 악양에 들렀는데... 약선도 고치지 못한 장님의 눈을 낫게 하고, 중병에 걸려 죽을날만 기다리던 병자도 되살렸다고 하네.”
“...암만 그래도 그건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그건 아닌 것 같네. 중병을 앓은 사람이 악양부 지부대인의 따님이었거든. 정체불명의 괴질을 앓고 있었는데 천마의 손길이 닿자 싹 나았다고 하더군.”
“사실이라면 신통하긴 하구먼. 근데 천마가 성수장엔 왜 간 것인가?”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네. 한데 천마가 성수장을 떠나 모용세가의 옛 장원으로 갔는데, 그날 거기 있던 광명마교의 탑이 사라졌다더군.”
“광명마교라....”
“그러고 보면 광명마교가 천마에게 충성했다는 말도 있네. 자기네들 교주를 죽인 원수를 따른다니. 이건 내가 봐도 헛소문 같긴 한데....”
발 없는 말은 천 리를 간다지만, 소문이 으레 그렇듯 천마의 행보는 과정되거나 왜곡되기도 했다.
수천 리 너머에 있는 천산에도 소문이 닿았다.
“천마라... 근본도 없는 놈이 감히 본교의 교주를 자처하더니 별호 하난 거창하구나.”
책상을 쾅 내려친 수려한 사내. 아랫사람들이 보낸 서찰을 구긴 그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회당에 모인 이들이 하나같이 심각한 기색을 띠는 가운데, 우두머리 사내는 여유롭게 섭선을 부치는 문사 청년을 힐끗 곁눈질했다.
“귀군(貴君).”
“예, 이성군(二星君).”
“대책이 있나?”
“있습니다.”
그 말에 일부는 반색했지만, 대다수는 근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천마는 광명마교주와 무림맹주를 격살한 천하제일인이오. 그런 자를 어찌 상대한단 말이오?”
“천마든 뭐든 일월신교주의 권좌에 도전하려면 일월구천관에 도전해야 하지요. 그 안에서 죽으면 그자가 권좌에 앉을 일도 없습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 거요? 천마는 일월신마공을 대성했다고 하지 않소!? 하물며 심상지경에 올랐으니 일월구천관쯤은 능히 통과할 터!”
일월구천관이 언급되자 이성군의 눈썹이 위로 까딱였지만 좌중은 신경 쓰지 못했다.
교주 무맥이 끊긴 이래로 일월구천관은 권좌를 노리는 자들의 역린.
혹자는 일월구천관을 통과지 않고 권좌에 앉기도 했으나, 얼마 못 가서 살해당한 바.
그런 식으로 교주를 참칭한 자들이 연이어 죽어나가면서 저주라는 유언비어도 퍼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성군의 앞에서 감히 일월구천관을 입에 담는 자는 없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만약 그자가 일월구천관을 통과한다면....”
이성군의 눈치를 보느라 뒷말을 잇지 못했으나, 그 뜻을 짐작하지 못할 자는 없다.
천 년간 이어진 유가의 권좌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외인에게 넘어갈지도 모르는 일.
“신녀께선 뭐라 하십니까? 그분도 일월성신의 혈통이니 탐탁치 않으실 텐데...!”
“이 친구, 어디 폐관수련하다 왔나? 천마를 권좌에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신녀일세! 천마가 초대 조사의 환생이라는 헛소리를 들먹이고 있단 말이야!”
“그런...!”
의문을 제기한 자가 찌그러질 때, 이성군은 문사 청년을 지긋이 노려보며 물었다.
“놈을 어떻게 제거할 거지? 심상지경에 올랐다면 실상 심상절예 말고는 죽일 방법이 없다.”
“제게 전권을 주신다면 일월구천관을 그자의 관으로 만들겠습니다.”
“.......”
자신 있는 대답에도 허락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성군의 얼굴에 어린 번민과 고뇌를 읽은 문사 청년은 혀를 찼다.
‘겁을 먹었군. 천마의 위명에 사기가 꺾였어.’
이성군 역시 대권을 노리는 만큼 절세의 무공을 지녔으나, 천마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아니, 그와 대립하는 일성군과 협력해도 천마를 당해낼 순 없겠지.
‘본교의 호교사천이라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청년, 혈교 팔대교왕의 일좌인 혈옥귀군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전음으로 계획을 읊었다.
혹시나 이 자리에 있는 중 일부가 딴마음을 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기 때문.
한동안 혈옥귀군의 계책을 음미한 이성군은 자신감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방법대로 해라. 지원은 얼마든 해주마.”
“이, 이성군...?”
“이십 년을 노렸던 자리다. 이제 와서 포기하는 건 지난 생애를 부정하는 짓이지.”
권좌를 포기하느니 죽는 게 낫다. 유가의 핏줄만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외인에게 넘겨주느니, 실낱같은 시도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일성군 역시 같은 생각일 터.”
호적수만큼 서로를 잘 아는 사람도 없다. 일성군도 수십 년간 권좌에 목을 맸으니 포기하지 않으리라.
“일성군과 천마의 동태를 샅샅이 살피도록. 놈들이 누굴 만나고, 어디로 가는지 모두 알아내야 한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 때.
천마가 천산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신교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