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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401화 (401/450)
  • 80화. 태풍 (1)

    삼서육례(三書六禮).

    세 가지 문서를 교환하며 여섯 가지 예법에 따른다는 혼례 절차였다.

    신랑이 매파를 통해 납채를 보내면, 신부의 가문도 그에 화답하며.

    신랑과 신부의 점괘를 봐서 길일을 잡고.

    약혼 선물을 주고받는 납길과 예물을 주고받는 납폐를 거친 뒤.

    신랑은 매파를 통해 혼례 날짜를 보내며.

    마지막으로 신랑이 신부의 가문을 방문하여 예를 갖춰야 한다.

    그 뒤 붉은 혼례복을 입은 남녀가 식을 진행하면, 그때부터 두 사람은 만인이 인정하는 부부가 된다.

    “어휴, 두 번은 못할 짓일세....”

    오늘로 유부남이 된 하후진은 진이 빠진 얼굴로 한숨을 늘어놓으면서 강엽을 흘깃 돌아봤다.

    나름 삼화취정을 이룬 초고수인데도 눈밑에 짙은 음영이 드리운 게 꽤나 심력을 쏟은 듯했다.

    “불쌍한 새끼, 이걸 세 번이나 해야 한다니.”

    “왜 세 번이나 하나? 한꺼번에 하면 되지.”

    “양아치 새끼....”

    “너 하는 걸 보고 있자니 세 번이나 할 엄두는 안 나서 말이지.”

    “와, 진짜 나쁜 놈일세.”

    “사실 세 번이나 하는 것도 문제야.”

    어떤 신부와 먼저 혼례를 올린단 말인가?

    순서로 따지자면 당연히 백서희가 첫 번째가 되어야 하겠지만, 그럼 태화문과 당문의 체면이 상할 터.

    그렇다고 시기를 늦출 수도 없으니, 함께 올리기로 점창과 태화문, 당문이 합의를 봤다.

    “뭐, 난 좀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새삼 스승인 송계학의 표정이 떠오르자 입맛이 썼다.

    고아한 기품도 잊고 용정차를 대차게 뿜은 뒤에 쓰레기를 쳐다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던 것.

    저간의 사정을 안 뒤엔 그럭저럭 이해했지만, 그땐 오히려 강엽을 측은하게 여겼다.

    -쯧쯧, 한 명도 힘든데 세 명이라니... 넌 세 배가 아니라 곱절인 아홉 배로 고생하겠구나.

    ...한 치의 과장도 없는 동정심에 순간 자신이 수렁으로 끌려가는 게 아닐까 의심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너도 얼른 혼인해라, 친구여. 이 좋은 걸 나만 순 없지.”

    “어째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은데...?”

    “어허, 무슨 소리. 난 행복해. 가끔 우리 정매가 철 지난 산딸기를 먹고 싶다고 조르고, 아닌 밤중에 뜬금없이 뭔가 먹고 싶다고 외치다 막상 음식을 대령하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면서 물린 적도 있고, 왠지 모를 우울증에 신경질을 내기도 했지만 난 행복하다니까?”

    “....”

    엄지까지 치켜들며 미소를 짓는데 왜 반쯤 해탈한 것처럼 보일까.

    하후진이 길동무를 찾은 물귀신 같은 표정으로 어깨동무를 하며 폭소했다.

    “크헤헤, 넌 세 배로 겪겠지만 그게 다 행복 아니겠냐? 원래 행복은 다다익선인 법이지! 암, 그렇고말고!”

    강엽이 묘한 표정으로 침묵하는 동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청수는 고개를 살살 저으며 잔치에 나온 술병을 들이켰다.

    “원시안진, 두 분의 앞날에 가정의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이젠 자기 혼자만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지껄이는 걸 보면 설득력이 전혀 없었지만.

    강엽과 하후진이 떨떠름하게 돌아보자 모른 척 도호를 읊조리는 청수였다.

    * * *

    “일단 맹방대회합부터 치른 뒤 길일을 잡지.”

    당천경의 제안에 강엽도 동의했다.

    하후진의 혼인식을 치렀을 땐 맹방대회합이 열리기까지 며칠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

    현 맹주인 멸도 팽무강의 퇴임식을 먼저 치른 뒤에 보름 간격을 두고 신임 맹주를 선출할 것이다.

    팔가주인 당천경과 구파 장문인인 종현은 맹방으로서 맹주의 선출에 큰 영향을 행사하는 존재.

    “무림맹주를 어떻게 뽑는지 아는가?”

    “맹방의 칠 할이 지지를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잘 아는군. 맹방들이 표를 행사하지.”

    그 뒤에 원로원의 재가를 받아야 하지만, 당천경은 어차피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다만 한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최후의 한 명이 정해질 때까지 반복하네.”

    예컨대 후보가 세 명인데 지지를 갈라먹는다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두 명만 후보의 자격을 유지한다.

    “반반으로 갈리면 그때부터 원로원이 중요해져. 원로원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무림맹주가 정해지기 때문일세.”

    만약 원로원의 총의가 모이지 않는다면 누가 맹주로 적합한지 끝없이 논해야 한다.

    “기실 여기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신경 쓸 건 없지만... 만약 원로원의 굴뚝에서 흰 연기가 나면 맹주를 뽑았다는 뜻이지.”

    그때까진 푸른 연기만 나오는 방식.

    당천경의 설명을 들은 강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민의를 중시하는군.’

    아무래도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만큼 맹주를 뽑는 방식도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엔 비효율적인 방식이야.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선출식을 뒤로 미루네.”

    아마 맹주가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돌아가는 정세를 봐서 한동안 그 자리를 유지했으리라.

    “맹에 소문이 돌더군. 자네가 이송 진인을 지지한다고 말이야.”

    “황보가주보단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앞으로 혈교와 전쟁을 한다면, 사천에 뿌리를 둔 청성파의 장문인이 더 민감하게 반응할 테니까요.”

    반면 황보세가는 산동에 있는 만큼 상대적으로 서무림의 동태에 둔감한 편이었다.

    ‘실제로 공약도 혈교와의 전쟁 대비보다는 광명마교에게 피해를 입은 문파들을 복구하는 데 중점을 뒀고.’

    물론 그 역시 중요하겠지만, 혈교가 발호한다면 전 대륙이 전화에 휘말릴 공산이 컸다.

    애써 동무림을 재건해봐야 도로아미타불이란 뜻.

    황보가주 역시 아둔한 인물은 아니니 그 점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겠지만....

    “동무림의 인사들이 황보가주를 지지하는 한 그가 뜻을 바꿀 가능성은 없겠지.”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흔든 당천경은 강엽과 함께 대회합이 개최되는 회당으로 향했다.

    * * *

    광명마교주에 의해 무림맹이 반파되었을 당시, 대회합이 열렸던 회당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아직 그때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한 만큼 대회합의 장소는 멀쩡한 전각으로 옮겨진 상태.

    어쩐지 급하게 보수한 흔적이 남은 전각에 들어서자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오셨습니까, 당문주.”

    “종 장문인께서 먼저 오셨군요.”

    점창파 장문인 종현이 반백의 수염을 쓸면서 강엽에게 눈인사를 건넸고, 강엽도 포권으로 화답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같이 앉게나.”

    종현의 옆엔 백서희가 있었다.

    본산 제자를 데려오는 대신 팔존에 꼽힌 백서희를 대동한 것이다.

    ‘고수의 이름값은 곧 사문의 이름값이니....’

    백서희가 팔존의 반열에 든 순간부터 본산과 속가의 구분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당천경을 향해 예를 갖춘 백서희는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

    [저쪽에 조 언니도 있어.]

    태화문은 맹방이 아니지만, 맹주전의 초대를 받고 귀빈의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다.

    조영옥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작게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강엽 역시 미소로 화답하는데, 별안간 무거운 기척이 회당을 짓누르듯 덮쳐왔다.

    “크읍...!”

    내공 화후가 얕은 자들은 신음을 흘릴 지경.

    정기신 합일을 이룬 초고수들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가운데 노란 무복을 걸친 거구의 사내가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온다.

    적미성을 본 백서희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저 인간은 왜 왔대?”

    “허허, 맹주위를 노리는 자라면 와야 하지 않겠느냐.”

    종현이 달래듯 말했지만, 적미성을 보는 그의 눈길 역시 마냥 호의적이진 않았다.

    마침 적미성 역시 이쪽을 힐끗 돌아보는데, 입가에 걸린 조소가 알게 모르게 신경을 자극했다.

    “이젠 한 계파의 당수가 됐군.”

    적미성을 떠받치듯 호종하는 무리들. 맹방의 문주들이 그를 중심으로 큼지막한 도당을 이루고 있었다.

    “얼핏 보면 군소방파들만 모아놓은 것 같지만 방심하면 안 되네. 곤륜과 개방도 적미성을 지지하고 있어.”

    비록 중원에서 멀지만 무당, 화산과 더불어 삼대도문으로 통하는 곤륜파와, 명실상부 백도 무림을 통틀어 가장 많은 제자들을 보유한 개방.

    당천경의 말에 백서희가 아연해했다.

    “그들이 왜 적미성을 지지하죠?”

    “현실적인 이유 때문일세.”

    “...?”

    “곤륜은 일월마교를 견제하는 최전선.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적미성이 지원을 대폭 늘리겠다고 약속했더군. 개방도 마찬가지. 하오문 때문에 일거리가 줄었으니, 그들을 배제하겠다고 약속했다면....”

    “빈도도 들었습니다. 맹주와 총군사가 하오문과 가까이 지내면서 개방의 지분이 줄었다지요.”

    종현이 거들었다. 하오문으로 인해 개방 내에 무림맹에 섭섭해하는 기류가 생겼다던가.

    “그럼 이송 진인은....”

    “장문인께선 현재의 기조를 바꿀 생각이 없으시네. 총군사도 유임하실 게야. 그래서 개방의 지지를 잃었지만, 제갈세가의 지지를 얻었지.”

    “복잡하네요.”

    정치 싸움엔 익숙하지 않은 만큼 백서희는 골치가 아프다는 기색이었다.

    종현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같은 이념을 추종해도 지역과 세력에 따라 이해관계는 다른 법이니라.”

    아무래도 운남의 부족들도 세력권이 복잡하게 얽힌 만큼 이런 환경이 낯설지는 않은 것이다.

    그때 강엽이 말했다.

    “다른 두 계파도 오는군요.”

    서무림의 지지를 받는 이송 진인과 동무림의 지지를 받는 황보가주 파산일권 황보혁.

    이송 진인은 일행에게 인사를 건네고, 서무림의 인사들과 함께 서쪽에 앉았다.

    황보혁 또한 무리와 함께 동쪽 좌석에 앉았기 때문에 장내엔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겉으로만 보면 동쪽과 서쪽으로 양분된 백도 무림의 사이에서 적미성의 세력이 중립을 취한 모양새.

    그때 당천경이 전음을 보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전쟁 중에 황보가주가 혼담을 넣은 적이 있었네.]

    [혼담을... 말입니까?]

    [황보진악과 정아를 짝 지어주고 싶은 눈치더군. 지금은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강엽은 황보혁의 뒤에 시립한 황보진악을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용봉지회에 그가 당묘정을 데려오지 않았던가.

    그땐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뭔가 곡절이 있던 건가.’

    한데 마침 황보진악도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슬쩍 고개를 까딱이면서 눈인사를 해보였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는데, 제갈의현이 들어오면서 맹주의 입장을 알렸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킨 무림맹주, 멸도 팽무강이 퇴임을 선언하는 순간.

    “...어떤 분이 이 늙은이의 뒤를 이어 맹주에 오를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시대의 환란은 끝나지 않았소. 어쩌면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일지도 모르지.”

    일사도와의 격전으로 헐렁해진 한쪽 소맷자락.

    그럼에도 외팔의 노인은 가슴에 주먹을 얹으며 뜨거운 안광을 뿜었다.

    “무림의 안녕을 부탁하오, 동지들.”

    맹원들 역시 기립하며 포권으로 화답했다.

    “맹주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천하팔존 멸도 팽무강.

    위대한 노강호가 은퇴하면서 무림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 * *

    “아쉽진 않으십니까?”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자네 같구먼.”

    덥수룩한 수염을 쓸며 팽무강이 껄껄 웃자 제갈의현은 한숨과 함께 푸념을 늘어놨다.

    “저를 서류의 지옥에 던져두고 혼자 탈출하시다니....”

    그 말엔 팽무강도 찔리는 게 있는지 험험 마른 기침을 했다.

    딱히 맹주의 일에 소홀하진 않았지만, 실상 대부분의 업무는 제갈의현이 도맡았던 것이다.

    오죽하면 맹주전에서도 무림맹의 본체는 맹주가 아니라 총군사라는 말까지 나돌겠는가?

    “어찌 백도 정파의 모범이 되어야 할 맹주가 권력을 탐한단 말인가. 다가오는 시대는 젊은이들의 것. 이 늙은이는 뒷방에서 바둑이나 두겠네.”

    “맹주로 계셨을 때도 모범은 안 보이셨습니다만...?”

    “크흠! 거참 너무하는구먼! 이젠 맹주가 아니라고 그렇게 막 내뱉기 있기인가?”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갈의현의 질문에 팽무강이 딱 멈추더니, 짐짓 한숨을 쉬면서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래서 자네를 남겨둔 것 아닌가.”

    “어차피 황보가주나 불권의 제자가 맹주가 되면 저도 잘릴 겁니다. 애초에 맹주님이 떠나시는데 제가 남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 전쟁이 끝날 때까진 자네가 있어야 하네.”

    “저 말고도 인재는 많습니다.”

    물론 제갈의현도 당장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설령 그를 해임할 사람이 맹주가 되더라도, 인수인계가 끝날 때까지는 맹에 남을 생각이었다.

    문득 팽무강은 정원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 사이로 날아디는 벌과 나비를 보며 웃었다.

    “올해는 꽃이 많이 폈군. 햇볕도 따스하니 무림맹을 떠나기에 딱 좋은 날씨가 아닌가?”

    월동문을 나선 외팔의 노인.

    수행원도 없이 바랑과 한 자루 칼만을 챙긴 노년의 도객은 따사로운 햇살 아래 강호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무림맹엔 또다른 폭풍이 몰아쳤다.

    “황보가주가 대권을 포기하고, 적미성을 지지할 뜻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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