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모략 (6)
화려하진 않되 정갈한 접견실.
방 주인의 고아한 기품을 보여주는 정경이었지만, 강엽은 마음 편히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할 말이 있나?”
방 주인의 눈빛이 무거운 압박으로 다가왔으니까.
살기를 흘린 것도, 기세를 발한 것도 아니지만 세상 그 어떤 절세고수의 압박보다 묵직했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하게. 내 인내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때에 말일세.”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송구? 송구하다고?”
“제가 먼저 찾아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당장이라도 살수를 날리고 싶다는 충동을 보여주듯 한껏 비틀린 입매.
강엽이라고 어찌 할 말이 없겠냐만은, 굳이 시시비비를 가려서 좋을 게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자신만이라도 맨정신을 견지해야 당천경이 이성을 잃더라도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당 소저를 외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랬다간 사생결단을 낼 거다.”
물론 당문주의 무공으로는 강엽을 죽일 수 없겠지만, 지금은 사소한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강엽은 의자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당 소저를 데려가고 싶습니다.”
“...허.”
“부족한 몸이지만 평생 헌신하겠습니다.”
“헌신, 헌신이라....”
같은 말을 몇 번이나 굴린 당천경이 혀를 찼다.
“자네는 검후와 흑호선을 배필로 삼았지. 한데 당문의 금지옥엽까지 데려가겠다는 건가?”
“....”
“아니면 그 둘을 포기할 건가?”
“송구하단 말씀을 또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보게. 영웅호색이라지만 너무하지 않나? 내 자네가 부족하다는 말은 않겠네. 아무렴 광명마교주를 꺾은 천하제일인이 아닌가.”
강엽이 사윗감으로 부족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당천경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세 번째는 너무하지 않나?”
“....”
강엽이 입을 다물자 당천경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자네가 정아와 혼인한다고 치세. 본문의 자존심과 체면을 다 버리고, 혼인한다고 가정해보자고. 하나 심각한 문제가 있네.”
“당문의 가규입니까?”
당문의 딸과 혼인한 사내는 데릴사위로 들어와야 한다는 오랜 전통.
아무리 당천경이 가문의 주인이라도 가규를 무시할 순 없을 터였다.
“원로들을 설득하는 게 어렵겠지만, 어떻게든 설득할 수는 있겠지.”
“하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자네가 정파가 아니라는 것.”
“....”
“맹주님을 비롯한 중진들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네. 자네가 사공(邪功)을 익혔다는걸.”
모두가 알면서도 쉬쉬하고 있었다.
강엽의 힘이 부담스럽기도 하거니와, 마교와의 싸움에 없어선 안 될 존재라고 판단했기 때문.
“지금은 그냥 넘어가도 언젠가는 문제가 될지도 몰라. 자네는 스스로 떳떳하다고 자부하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망설임 없는 부정에 당문주의 눈썹이 휘어졌지만, 강엽은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설령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전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현실과 타협을 한 적도 있었고, 어쩌면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피를 얻기 위해 무림에 투신한 걸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요.”
강엽의 눈에 일순 붉은 기광이 스쳐가자 당천경이 무겁게 탄식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건가.”
“하늘에 맹세코 무고한 이를 해친 적은 없습니다.”
혹시나 남에게 들킬까 봐, 내면의 인간성이 마모되어 괴물이 될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매순간이 살얼음판이었고, 천장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만약 무림맹이 자넬 공적으로 선포한다면 어쩔 건가? 그땐 본문도 자네를 비호할 수 없네.”
“그럼 무림맹은 강력한 우군을 잃을 겁니다. 하지만 당문은 최후의 보루를 남겨두게 되겠지요.”
“최후의 보루라....”
“무림맹이 절 버려도 전 당문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무림맹, 아니 정파 전체가 자네를 적으로 돌려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는 건가?”
“예.”
강엽은 눈치를 보며 조금씩 무릎을 폈다.
정중하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게 당천경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혈교는 건재하고, 혈마 역시 부활할 겁니다. 그때야말로 무림맹은 사활을 건 싸움을 시작하겠지요.”
“혈마가 부활한다고 확신하나?”
얼버무리지 말라고 종용하는 눈빛에 강엽은 솔직히 대답했다.
“올해 겨울은 혹독할 겁니다.”
“정아가 자네 곁에 있다면 따뜻하겠나?”
“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한마디를 안 지는군.”
“죄송합니다.”
“혼인도 안 한 아이가 애를 가졌네. 세간에 알려진다면 본문은 망신을 당하겠지.”
“산서의 스승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매파를 부탁할 사람은 있나?”
“추천할 분이 계십니까?”
“본문과 오랫동안 알고 지낸 노부인이 계시네. 혈족들이 혼인할 때 몇 번이나 힘을 써주셨지.”
“그럼 그분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전에 하나 더.”
“...?”
중매 말고 다른 게 더 필요하던가?
당천경이 짐짓 엄하게 말했다.
“옛부터 본문에 데릴사위가 들어오면 장인이 사위를 시험했지. 무인이라면 무공으로, 문인이라면 학문으로. 그 또한 당문의 가규일세.”
“하면 문주님께선 절 무엇으로 시험코자 하십니까?”
“백 초식을 받아내게.”
“예?”
“한 자리에서 백 초를 받아내란 말이야.”
그건 그냥 살아있는 목인장이 되라는 것 아닌가?
하물며 십 초도 아니고 백 초라면....
“왜, 싫은가?”
“아닙니다.”
“만천화우도 쓸 테니 알아서 잘 해보게.”
암만 봐도 원망하는 마음에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았지만, 강엽은 떨떠름하게 당천경을 따라가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 *
“정매, 들어가도 되겠소?”
“엽랑?”
방 안에 갇혀있던 당묘정은 조심히 들어온 강엽의 소매가 너덜너덜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상처는 없었지만 옷은 넝마주이가 됐던 것이다.
“별거 아니오. 당문주님의 무공을 받아내는 바람에 옷이 좀 헤지긴 했는데....”
“아, 아버지와 싸우셨다고요?”
머릿속이 대략 아득해지는 말에 당묘정이 졸도할 것처럼 비틀거리자 강엽이 얼른 말했다.
“걱정 마시오. 당문주님은 무사하시니까.”
‘지쳐서 쓰러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있는 내공 없는 내공 다 끌어다쓰며 암기 세례를 날리는데 단전이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뭐, 마지막에 당문십독을 쓰시긴 했는데....”
참고로 당문십독은 당천경도 억지로 쓰진 않았다.
강엽이 독에 내성이 있다고 고백하지 않았다면 하독할 생각조차 못했으리라.
“전부 갖고 계신 건 아니어서 다 시험하진 못했는데, 그럭저럭 잘 통과한 것 같소.”
“며, 몇 개나 시험하셨는데요?”
“절반쯤?”
“....”
당묘정은 놀라기보단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독에 따라 효과도 다르다 하나, 당문십독은 몇 방울로도 능히 코끼리를 즉사시킬 수 있는 절독.
아무리 강엽이 천하제일인으로 추앙받는다고 해도 그런 절독을 절반이나 쓰다니?
어지간한 절세고수라도 오장육부가 녹아내려서 죽었을 것이다.
“그쯤 되니 독살당할 염려는 없다고 하시던데....”
“그야 당연하죠!”
아마 당천경의 심경도 복잡했을 것이다.
사위로 삼을 사람이 강한 것과는 별개로 가문의 자부심인 독이 아예 안 먹혔다는 소리 아닌가?
“어쨌든 당문주님의 인정을 받았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아무리 엽랑이어도 위험했어요. 만약 아버지께서 무형지독을 쓰셨다면....”
당문십독 중에서도 지독한 무형지독을 썼다면 강엽이라고 해도 견딘다는 보장이 없었다.
‘무형지독, 이미 썼는데....’
그것까지 말하면 당묘정이 정말로 졸도할 것 같았기에 강엽은 말을 삼갔다.
“근데 울었소?”
당묘정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눈도 조금 부어 있었다.
“아, 아니에요. 울기는요.”
강엽이 가볍게 껴안으면서 등을 토닥이자 당묘정은 눈가를 훔치면서 배시시 웃었다.
“당문주님도 허락하셨으니 길일만 잡으면 바로 혼인할 것이오.”
“아....”
붉게 상기된 당묘정의 뺨을 만지며 분위기를 잡은 강엽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맛을 쩝 다셨다.
“크흠!”
당천경이 일부러 기침을 하면서 존재감을 알렸던 것이다.
민망해하며 떨어진 당묘정의 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본 당천경이 강엽을 마뜩찮게 흘겨보았다.
“이 목석 같은 사내가 그리 좋더냐?”
“아, 아버지.”
“넌 이미 가문의 명예를 땅에 떨어트렸다. 알고 있겠지?”
“...죄송해요.”
“내 손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은 해주었다만 몸가짐을 조심하거라. 그리고 자네.”
“예, 빙장....”
“아직 자네 빙장 아니니 그리 부르지 말고.”
머쓱해진 강엽을 지긋이 노려본 당천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만 약조해주게. 훗말 자네가 세력이나 가문을 세우면, 후계 싸움에 손주를 억지로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그 말씀은?”
“손주를 당문의 후계자로 키우고 싶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강엽은 물론 당묘정도 놀란 눈빛을 하자 당천경이 씁쓸하게 말했다.
“물론 아이가 당문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겠지. 하나 그 아이가 당문의 후사를 잇고자 하면 그 뜻을 존중해줬으면 하네.”
“아버지....”
당묘정의 눈빛이 촉촉하게 물드는 가운데 당천경이 강엽을 간절하게 바라봤다.
“약속해주겠나?”
강엽이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고맙네.”
진조의 피를 이은 만큼 태어날 아이는 결코 평범하지 않을 터.
오늘의 약속이 당문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강엽도 짐작할 수 없었다.
* * *
비릿한 피비린내가 가득한 장내.
처참하게 죽은 시체들이 가득 쌓인 목불인견의 참상 속에서 두 사내가 태연하게 서로를 응시했다.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흑포의 중년인이, 알몸으로 정좌한 건장한 사내를 보며 물었다.
“부활한 심정이 어떠신가?”
머리털은 물론 수염과 눈썹도 없어서 기괴하기 그지없는 용모였다. 핏줄이 다 보이는 창백한 피부 때문에 더더욱 괴이처럼 다가왔다.
“호교사천 괴악(怪惡).”
과거 태화문에서 부활한 요선.
그녀와 같은 사대호천의 일인이 오랜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한번 이 세상에 현신했다.
그러나 괴악은 자신의 부활에 대한 감상을 토하는 대신 질문을 내뱉었다.
“요선이 죽었다고 했던가?”
“애석하게도.”
“에잉, 힘을 회복하기도 전에 무턱대고 덤벼대니 그렇지. 눈깔만 믿지 말라고 누누이 충고했건만.”
동료가 죽었다는 말에도 애석한 기색은 안 보였다.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할 뿐.
“수많은 왕조를 멸망시킨 희대의 탕녀가 가버리다니. 이제 무엇으로 눈요기를 하면 좋을꼬.”
“계집이라면 얼마든지 주마.”
“큭큭, 그냥 해본 말일세. 설마 이 나이 먹고 여색을 밝히겠는가?”
“밝힐 것 같은데.”
“...음, 주면 사양하진 않겠네. 이 몸의 백골시혈공(白骨尸血功)을 되찾으려면 음기가 많이 필요하니.”
“심상지경에 오를 때까지 얼마나 걸리겠나?”
“반년.”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검마는 그 말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생각보단 짧군. 일 년은 예상했거늘.”
“물론 제물이 많아야 하네. 하지만 내가 아는 검마라면 그 정도 준비는 해놨겠지.”
“설삼을 주지.”
“그 귀한 걸 어디서 찾았나?”
“운이 좋았다. 사막의 한 제후가 가지고 있더군. 사막을 오가는 상인에게 빼앗았다고 하던데.”
“그 제후는 어찌 됐는고?”
“자네를 부활시킬 제물로 쓰였지.”
“오호통재라.”
사천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검마는 강호 무림에서 제물을 얻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서장에서도 머나먼 곳에 있는 사막의 제후국을 침공, 사흘 만에 멸망시키고 지배층과 주민들을 대법의 제물로 삼았다.
“이 육신은 마음에 드는군. 늙어빠진 전생의 육신보다 훨씬 강건해. 경맥도 튼튼해서 단숨에 많은 기운을 받아들여도 능히 버틸 걸세.”
“좋군. 며칠 있으면 마수(魔獸)도 부활할 테니 둘이 잘 해보도록.”
“그 친구도 부활하나? 그럼....”
“이제 주군의 차례지. 그분이 돌아오시면 본교는 저 오만한 강호 무림을 짓밟을 거다. 천하를 진정한 혈세로 만들겠지.”
“그건 참으로 희소식이구먼.”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호교사천.
마인들의 악의와 함께 시커먼 음모가 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