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불권 (1)
은은한 서광이 내리쬐는 전당.
육방(六方)이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석실 중앙엔 옥색으로 빛나는 깊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 한복판에 부글부글 기포가 끓는 순간, 포말과 함께 인영이 불쑥 튀어올랐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전라의 사내.
날카로운 턱선을 따라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 시비들이 수건을 갖고 와서 사내를 닦아주고, 미리 준비한 비단옷을 입혀주었다.
사내 역시 자연스럽게 시중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였다.
[일사도.]
머릿속에서 들리는 전성에 사내가 손을 들었다.
“남은 옷은 내가 알아서 입지. 물러가라.”
“알겠습니다, 존귀한 분이시여.”
남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은 일사도는 바깥으로 나갔다.
대전으로 향한 그는 호교 무인들이 열어주는 문을 따라 안쪽 깊숙이 나아갔다.
장내엔 이미 몇 명이 있었다.
절강성 포정사로서 평상시엔 공무에 매진하는 이사도 또한 오늘은 자리에 나와 있었다.
“일사도, 태산의 석탑을 통해서 왔다는 말은 들었네. 몸은 어떤가?”
“문제 없다.”
성의 없는 답변이었지만 이사도는 여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고, 다른 사도들도 침묵을 견지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웃기는군.”
지엄한 일사도의 면전에서 비아냥거리는 작태.
다른 사도들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돌아보는 곳엔 하얀 장포를 길게 늘어뜨린 청년이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형제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똑닮은 얼굴.
“한때 ‘팔성자(八聖子)’ 중 최고라 불렸던 예건룡이 적에게 패한 것도 모자라 목숨을 구걸하다니. 나였다면 접싯물에 코 박고 죽어버렸을 텐데.”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히 올린 얼굴로 시비를 건다.
그러나 당사자인 일사도보다는 다른 사도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함부로 말하지 말게, 신임 사사도.”
“암만 일사도와 같은 팔성자라도 이제 겨우 사도가 되었는데 너무 입을 막 놀리는 게 아닐지?”
선배격인 이사도와 구사도가 나섰음에도 신임 사사도는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귀영이라는 놈이 살려주지 않았다면 다 죽었을 거라면서?”
그의 시선이 한쪽에 선 금발의 여인에게 돌아갔다.
“입이 뚫렸으면 변명해보지 그러나, 팔사도? 당신 때문에 우리 형제인 예간성이 객사했는데?”
“...전 실패한 게 맞습니다.”
덤덤하게 인정하는 팔사도의 모습에 신임 사사도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이번엔 팔사도가 그를 도발했다.
“하지만 당신이라고 달랐을까요?”
“뭣이?”
분노를 쏟아내려는 찰나 팔사도가 간합을 빼앗듯이 말을 이었다.
“상대는 일월마교의 주인. 심지어 영약을 취해서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을 이뤘지요. 당신이라고 그와 대적해서 살아남을 것 같진 않군요.”
“하,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헛웃음을 흘린 신임 사사도는 그녀와 일사도, 그리고 또 다른 모습으로 참석한 괴뢰마를 싸잡아 조롱했다.
“팔사도, 당신은 적에게 잡힌 시점에서 자결했어야 했다. 일사도와 칠사도는 즉시 이탈했어야지. 자기 역량을 모르고 설친 시점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로군.”
다른 사도들과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장포를 두른 장신의 괴인.
사람의 두개골을 형상화한 하얀 가면을 쓴 마의가 딱하다는 목소리로 혀를 내둘렀다.
“어리다. 생각도 짧고. 건수를 잡았다 싶으니 상대방을 헐뜯어 격을 끌어내리겠다... 일사도가 되지 못한 열등감을 이런 식으로 표출한다고 뭐가 달라지지?”
“너, 삼사도! 패배자 주제에...!”
“우릴 깔아뭉갠다고 네 격이 올라가진 않는다.”
눈구멍에서 노릿한 안광을 발한 마의는 신임 사사도를 향해 나직이 경고한 뒤, 고개를 돌렸다.
“너희 모두 마찬가지지.”
신임의 옆에 선 똑닮은 남녀.
모진 놈 옆에 있다 불똥을 맞은 두 사람이 신경질을 냈다.
“우린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눈빛이 건방졌다.”
“그게 뭔....”
황당해하는 두 남녀를 무시한 마의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팔성자. 역대 교주들의 심상 파편을 모체에 심는 대법으로 태어난 기적의 아이들.”
“.......”
“너희가 혹독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무수한 시련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겠지. 그런 점에서 너희는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다.”
조금 전까지 사정없이 깎아내린 언행과 어울리지 않은 칭찬에 장내에 있던 이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지만 스스로 존귀하다고 여긴다면 다른 사도들을 존중하도록. 너희 중 심상지경의 고수를 두 명이나 맞닥뜨리고 살아 돌아올 자는 없다.”
쿠구구구구궁...!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마의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세가 흘러나와 장내를 흔들었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세 남녀는 물론 다른 사도들도 심각해졌다.
“육신을 바꿨는데 어찌...!”
“멋대로 내 한계를 가늠하지 마라.”
심드렁한 목소리로 광오하게 지껄이는데도 세 남녀는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
호광성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육신을 잃고 영락한 처지.
새로운 몸으로 갈아타긴 했지만, 고작 두어 달이 흘렀을 뿐인데 어찌 이리 강해진 걸까.
“지금의 내 기세도 감당할 수 없다면 너희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뜻이겠지.”
“....”
뭐라 하지도 못하고 굴욕감만 곱씹는 세 남녀를 일별한 마의가 기세를 꺼트리며 말했다.
“여기까지만 하지. 더 이상 했다간 불충이 될 것 같군.”
“제군들.”
머리 위에서 내려찍는 존재감.
목소리엔 한 줌의 내공도 실리지 않았으나, 사도들은 본능적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높다란 계단 위의 옥좌에 앉은 하얀 장삼의 사내.
사도들이 인지할 새도 없이 홀연히 나타난 광명마교주가, 그들을 차례대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사사도와 오사도, 그리고 육사도....”
심상치 않은 부름에 세 남녀가 흠칫할 때 교주의 육성이 건조하게 이어졌다.
“마의는 배울 게 많은 사람이다. 그의 말을 새겨듣도록.”
신구(新舊) 사도들의 알력다툼에서 마의의 손을 들어주는 언행.
한마디로 갈등을 정리한 광명마교주가 일사도를 돌아보았다.
“몸은 괜찮은 것 같구나.”
“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자비로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싸우게 해주십시오.”
“그리 해줄 것이다.”
머리를 깊이 조아리는 일사도. 첫 번째 사도를 일별한 교주가 다시 사도들을 굽어봤다.
“그대들도 알고 있을 거다. 무림맹이 시시각각 본교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는 것을.”
호광성의 싸움 이후로 뒤바뀐 전세.
광명마교주는 심검을 봉인당하고, 사도들이 죽어간 이후로 광명마교는 수세를 강요받고 있었다.
“얼마 전엔 소림이 산문을 열었다. 무당 역시 장문인이 바뀌면서 문파의 최정예를 내보냈다. 또한 빙궁이 무림맹에 합세하면서 이백 명이나 되는 빙공 고수들이 전선에 끼어들었지.”
좌우로 도열한 사도들 사이에 거대한 양피지가 떨어졌다.
그것이 강호 무림의 세력을 표기한 지도라는 것을 알아본 사도들의 안색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복건, 절강, 강서, 남직례. 그 외의 자잘한 영역들.
그중 복건과 절강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들이 무림맹의 청죽색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
“마음 쓰지 말라. 얼마나 빼앗겼는지는 중요치 않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본교가 유리해질 터. 그들이 땅을 원한다면 기꺼이 넘겨주겠다.”
그동안 광명마교에 귀의한 문파들이 풍비박산이 나겠지만 누구도 그걸 언급하지 않는다.
“이사도.”
“예, 교주시여.”
“도지휘사를 움직여라. 무림맹을 막지 않아도 좋다. 어떻게든 발목만 잡으라고 하도록.”
“삼가 신명을 받듭니다.”
“이 전쟁은.”
광명마교주의 시선이 한 군데에 머물렀다.
총단이 있는 항주.
“바로 여기서 끝날 것이다.”
* * *
대문이 박살난 어지러운 경내.
곳곳에 피가 뿌려지고 파편이 흩날리는 장원에서 원한에 새된 비명이 폭발하듯 터졌다.
“섬무검예! 이교의 죄인 따위가 감히...!”
하얀 도복을 입은 광명마교의 고수들이 노성을 쏟아내며 달려들었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찰나에 공간을 가른 자색 섬광을 따라 몸통이 갈리면서 피를 쏟아내는 몰골.
뒤를 따르던 누군가가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점창파의 검후....”
본디 검후는 절강 주산군도의 패자인 검각주의 별호.
하지만 백서희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녀를 점창검후(點蒼劍后)로 부르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점창산의 정기처럼 맑은 취색의 장삼을 흩날리는 절세미인의 신위에 남녀를 불문하고 넋을 잃는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납셨군.]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끈적거리는 전성.
태양이 중천에 걸린 한낮인데도 공기가 차갑게 식으면서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쭉 늘어나는 그림자를 발견한 백서희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넌 뭐야?”
[영마(影魔).]
그림자에서 불쑥 솟아오른 인영.
전신을 검은 붕대로 감싼 괴인이 섬찟한 살기를 흘리자 척마대원들이 흠칫 굳어졌다.
백서희가 뒤를 흘낏거리며 물었다.
“누군지 알아요?”
척마대원들 중엔 강호의 마당발이라 불리는 개방의 후개 또한 있었던 것이다.
후개가 불신이 역력한 낯빛으로 대답했다.
“전대의 대마두요. 오래전 강서 무림을 휘저었던 자인데 살아있었을 줄이야....”
사대악인에 꼽히진 못했으나, 전성기엔 그 아성을 넘보았던 개세적인 마공 고수.
영마를 살핀 백서희가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다.
“전대의 대마두라... 광명마교를 때려잡으려고 왔는데 흑룡교의 잔당이 걸렸네.”
영마의 이름은 처음 들어보지만,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흑룡교의 마공을 익혔음을.
붕대에 휩싸인 영마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흑룡교의 마공을 전에도 접했나 보군. 그러고 보니 무림맹에 교룡왕의 맥을 이은 자가 있던가?]
마치 독이 퍼지듯 영마의 그림자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나는 흑룡교의 교도는 아니다. 하지만 네 말대로 흑룡교의 신공을 익혔지. 구천호법의 일좌인 암해령(暗海靈)의 술법신공을.]
-끼이이이이이익!
그림자를 뭉뚱그려 만든 괴물이 달려들자 후개가 급히 경고했다.
“조심하시오! 영마의 괴물들은 어지간한 경파로는 없앨 수 없다는 풍문이...!”
촤아아아아악!
날카로운 섬광이 그림자 괴물들을 베고, 그 너머에 있는 영마를 향해 뻗어나간다.
그림자를 뭉쳐 호신강기를 자아낸 영마를 노려보면서 백서희가 물었다.
“흐음, 흑룡교의 교도도 아닌데 어떻게 구천호법의 마공을 얻었대?”
[시체를 뒤적거렸지.]
“그래?”
다음 순간 자성검에서 검푸른 기광이 일면서 영마의 호신강기를 종잇장마냥 베어버렸다.
가까스로 검권에서 벗어난 영마가 곤혹스러워했다.
[호신강기를 일격에?]
“이번엔 상대가 안 좋았어.”
[무슨 헛소리를....]
영마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공기 중의 수분이 급격히 말라가면서 마공의 근간을 이루는 수기(水氣)를 빼앗아가는 게 아닌가?
중단세의 자세로 검을 들어올린 백서희를 중심으로 일대의 수기가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다.
타고난 혈통에 깃든 수류의 능력이, 구천호법의 무공을 근간부터 무너뜨리는 현상.
“삼화취정은 천지자연과 소통하는 경지. 하지만 그게 모든 자연지기를 다룰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
영마가 익힌 암해령의 마공은 수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지만 이번엔 그게 약점이었다.
회자결로 수류의 능력을 선보인 백서희가 그의 진기 운용을 크게 제약했으니까.
심지어 단전의 공력도 자갈이 낀 것처럼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영마가 크게 당황했다.
[너, 너...?]
“아쉽네. 당신이 흑룡교의 마공만 익히지 않았어도 좀 더 제대로 싸워봤을 텐데.”
그리고 대략 반 각 뒤.
과거 강서 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영마는 그 악명에 어울리지 않은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 * *
“...역시 태기가 있구나.”
완안극의 말에 당묘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한동안 그녀의 맥을 짚으며 상세를 살핀 완안극이 흐음 하며 턱을 매만졌다.
“아직은 몸이 불편할 단계는 아니다만... 그 몸으로 전장에 나서는 건 무리다. 시간이 지나면 의원의 일도 쉬어야 할 게야.”
“그건....”
“아이의 아비가 누구냐?”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는 당묘정의 모습에 완안극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한다. 혼인도 치르지 않았으니 소문이 나면 타격이 크겠지.”
무림의 여인은 자유롭다지만 그게 뭘 해도 용서받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사천당문의 영애쯤 된다면 혼사도 치르지 않고 아이를 배는 것은 지탄을 받을 일.
“말도 안 돼요. 위험한 때도 아니었는데....”
“그건 모르는 거다. 너도 의원이라면 알 텐데. 가능성이 낮다는 거지 아예 없다는 게 아니....”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 완안극의 모습.
돌연 눈꼬리를 치켜뜬 그가 낚아채듯 당묘정의 완맥을 잡고 다시 한번 진맥을 봤다.
“너...!”
뒤늦게 번지는 불신과 경악 속에서 완안극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하, 하나만 물어보자. 주인님께선 알고 계시냐?”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는 당묘정의 모습에 완안극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쿵쿵 쳤다.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 아니다. 나도 느낀 걸 주인님께서 못 느끼실 리가 없단 말이다.”
언젠가는 들킨다. 워낙에 기운이 미약하고 빠르게 사라져서 긴가민가할 순 있어도, 같은 일이 반복되면 강엽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그게....”
당묘정이 머뭇거리면서 저간의 사정을 밝히자 완안극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는 장탄식을 토해냈다.
“그렇군. 하나 주인님이 아시는 건 시간문제다. 당문과 부딪치는 한이 있어도 널 책임지려고 하시겠지.”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어요.”
“이젠 글렀다.”
완안극이 얼굴을 쓸며 입맛을 다셨다.
‘흡혈귀는 자식을 보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설마 당시 주인님의 상태와 관련이 있나?’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해봤자 의미는 없었다.
“문제는 지금 주인님께서 숭산에 계신다는 건데....”
“숭산이요?”
당묘정은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그래, 원래는 주모와 함께 강서성의 광명마교 지단을 밀어버리기로 하셨지만... 소림에서 전언이 와서 그쪽으로 가셨지. 왜 주인님을 불렀는지는 나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