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암야 (7)
저잣거리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는 무림인과 양민을 가리지 않고 혼란에 밀어넣었다.
황보진악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이놈들... 갈 때까지 가보자는 거냐!?”
관무불가침이란 격언이 왜 생겨났겠는가.
따지고 보면 관부가 무림에 개입하는 것을 꺼려하기 이전에 무림이 알아서 고개를 숙인 것이다.
무림인들끼리 지지고 볶을지언정 민간에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
수백 년간 이어진 관례를 깬다면 관부가 민생 안정을 빌미로 무림의 일에 끼어들어도 할 말이 없을진대.
하나 암야각의 고수들은 양민들이 죽든 말든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라는 듯 독탄을 던질 뿐이었다.
“이건 상정하지 못한 사태인데....”
맞은편에서 척마대와 대치하고 있던 멸마전의 갈마중 역시 침중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그가 한숨처럼 말했다.
“이제부터 암야각을 제압한다.”
“갈 사형!?”
초륜이 진심이냐는 듯이 부르는 말에 갈마중은 어쩔 수 없다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대사형의 명이라도 지금은 상황이 안 좋아. 여기서 저들의 편을 들었다간 우리가 덤터기를 쓴다. 정녕 그걸 바라는 게냐?”
“그건 아니지만 대사형께서....”
“책임은 내가 진다. 만약 대사형께서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멸마전의 아라한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갈마중이 눈알을 부라렸다.
“어서 움직여!”
그제서야 몸을 돌려 복면인들을 향해 달려가는 멸마전의 아라한들.
갈마중은 맞은편에서 대치한 척마대원들이 새삼스럽다는 시선을 보내자 쓴웃음을 지었다.
“상황이 요상하게 흘러가는군. 우리 일은 상황이 정리된 뒤에 해결하는 게 어떤가?”
“...좋습니다.”
척마대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화산검룡 무일기를 필두로 척마대원들이 암야각을 공격했고, 일부는 사람들의 피난을 도왔다.
“피독주가 없는 분들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말을 아끼세요! 경파로 연기를 날리시구요!”
당묘정의 외침에 척마대원들이 장풍이나 검풍 등으로 독연을 밀어내며 사람들을 구했다.
게거품을 물고 경련하는 사람들을 살핀 당묘정은 용태를 살펴보고 작게 신음했다.
소창후와 황보진악, 남궁상아, 연가휘 등 친분 있는 이들이 그녀를 보조했다.
사방에 퍼진 독연 때문에 다들 육성 대신 전음만 주고받았다.
[어떻습니까?]
[신경에 작용하는 독이에요. 혈도의 운행을 막아 호흡을 방해하고, 근육까지 경직시켜요. 독성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해요.]
[그런....]
[완 노사님이 계셨다면....]
완안극은 백담서원에 남아 있었다.
본인은 오고 싶어 했지만, 스승의 안위를 염려한 강엽이 그를 백담서원 최후의 보루로 남긴 것이다.
[당 소저라면 할 수 있소. 자신감을 가지시오.]
황보진악의 말에 당묘정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없는 사람을 아쉬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해약을 드릴 테니 사람들에게 먹이세요. 혹시 모르니 여러분도 조금씩 복용하시고요.]
[당 소저?]
일행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당묘정이 해약이 든 주머니를 내밀자마자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양이 부족해서 새로 만들어야 해요. 마침 근처에 약방이 있으니 바로 가겠어요.]
[제가 당 시주를 돕겠습니다.]
소창후가 당묘정의 뒤를 달려가는 모습에 일행은 서로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몇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파를 감지하고 안색이 딱딱해졌다.
멀리서도 피부를 자극할 만큼 웅혼한 불문 정종의 공력.
자욱한 연기 사이로 십수 개의 금빛이 번뜩이며 바람을 일으키고 복면인들을 공격한다.
노란 가사를 걸친 승려들. 이마에 여섯 개의 계인이 박힌 무승들의 등장에 남궁상아가 경악했다.
“십팔나한...!”
당황한 것은 일행만이 아니었다.
갈마중을 위시로 한 멸마전의 아라한들은 더욱 당황하고 있었으니까.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 복면인을 때려눕힌 갈마중은 철탑같은 근육을 지닌 거구의 무승을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설마... 무각 사형?”
“나무아미타불... 갈 사제.”
통나무처럼 굵직한 목에 염주를 두른 무승.
존재만으로 멸마전의 아라한들을 압도한 그가 한숨처럼 말했다.
“이런 시국에 만나서 유감이네.”
“우릴 어쩔 셈이오?”
“사숙들께서 오셨네. 그분들께서 자네들과 대화를 나누고자 하시니, 이 우형은 그저 준비를 할 뿐일세.”
“여차하면 힘으로 제압하겠다는 뜻으로 들리는구려.”
“....”
무각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치하는 동안에도 십팔나한은 복면인들을 제압하고, 척마대와 함께 사람들을 옮기고 있었다.
초륜이 입술을 핥으며 씩 웃었다.
“좋소! 한번 싸워봅시다!”
“초 사제!”
짐짓 꾸짖는 말에도 초륜은 사과하기는커녕 외려 철곤을 땅에 쾅 내려치면서 강렬한 살의를 발산했다.
“말리지 마시오, 갈 사형! 소림은 우릴 버렸소! 한데 이제 와서 우리를 다시 찾는 이유가 뭐겠소!? 우리가 설치는 게 눈꼴시었던 거지!”
“으음.”
갈마중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침음할 때 다른 아라한들도 병장기를 꼬나쥐며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우리가 피 흘리며 싸우는 동안 산문에서 눈 감고 귀 막으며 편하게 산 사형제들에게 보여줍시다! 우리가 지난 세월 얼마나 큰 오욕을 견뎠는지...!”
“쉽게 흥분하는 성미는 여전하구나, 초 사제.”
한숨 섞인 말에 초륜이 살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뭐 보태준 거 있으쇼?”
그렇게 같은 뿌리를 둔 두 아라한들이 부딪치며,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 * *
당묘정은 약재가 든 서랍부터 뒤졌다.
“잔대, 계요등, 창이자....”
“여기 야백합이요!”
소창후가 건네는 약재를 받아든 당묘정은 각 재료의 양을 재고 절구에 빻기 시작했다.
막힘없는 손놀림에 소창후는 적잖이 감탄했다.
“무슨 독인지 아는 겁니까?”
“이름은 몰라요.”
“예?”
“하지만 진단은 할 수 있죠. 뱀독을 여러 약초들과 섞었을 거예요. 뱀독에 중독된 증상과 비슷해요.”
“그래서 뱀독에 효과적인 약재를....”
“문제는 약재의 배합인데....”
아무리 당묘정이 독공의 고수라도 혼자서 그 많은 약을 뚝딱 만들어내는 건 무리겠지.
소창후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저도 돕겠습니다. 당 시주 만큼은 아니지만 약초를 다뤄봤으니 도움이 될 겁니다.”
“바로 알려드릴... 흐읍!”
당묘정이 말하다 말고 체한 것마냥 구역질을 하자 소창후가 조심스러운 낯빛으로 그녀를 살폈다.
“당 시주? 호, 혹시 중독된 게....”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가슴을 누르면서 숨을 고른 그녀가 신색을 정돈하면서 약재를 빻았다.
“의원이라도 무사했다면 한결 쉬웠을 텐데....”
하필 두 사람이 들어온 약방의 의원이 독을 들이마시고 정신을 잃었기에 손이 부족했다.
그 덕분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 약재를 뒤질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말할 시간도 아껴가며 약을 만들 때였다.
꽈콰쾅!
약방의 문이 산산이 박살나면서 피투성이가 된 인영이 굴러들어왔다.
피와 나무조각을 뒤집어쓴 복면인이 약재를 빻고 있는 두 여인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이 씹어죽일 계집들이...!”
척마대의 무복과 하는 행동을 보고 본능적으로 알아챈 기색.
뒤에서 적이 달려드는 것도 개의치 않고 품에서 암기를 꺼내 던진다.
“죽어라, 무림맹의 개들!”
“큭!”
그 앞을 막은 소창후가 암기를 쳐내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튀어나온 철곤이 복면인을 후려쳤다.
기절한 복면인의 뒤에서 황색 가사를 걸친 소림승이 들어와 장내를 살폈다.
“시주들은....”
“저희를 지켜주세요! 해약을 만들고 있습니다!”
당묘정의 외침에 소림승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면서 문을 등졌다. 칠 척의 거구가 사천왕처럼 굳건히 지키니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소창후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바깥 상황은 어떻습니까?”
“복면인들은 거의 다 제압했소. 독연 역시 멀리 퍼지지 못하도록 막았고. 하나 사람들이 많이 쓰러졌소.”
피해가 더 커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리라.
안도한 두 여인이 손을 바삐 움직이며 분말을 만들 때였다.
문득 소림승이 어깨를 움찔했다.
“당신은?”
“.......”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청년.
흙과 피가 묻은 흑삼이 흔들리는 순간, 그는 어느새 소림승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에 소림승이 놀라서 손을 뻗었을 때.
“그만. 그는 적이 아니리라.”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이 어깨를 붙잡았다.
그 안에 깃든 항거불가의 공력을 느낀 소림승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멀대처럼 큰 노승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사부님?”
“저잣거리가 혼란스럽더구나.”
“예. 암야각이라는 자들이 독연을 뿌리는 바람에... 저 시주들이 약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데 저자는 누굽니까? 사부님께서는 적 사형을 만나러 가신 게....”
“이미 만났느니라. 저 친구가 잡았지.”
“예?”
얼이 빠진 소림승이 멍하니 강엽을 돌아보았다.
한창 심각한 낯빛으로 장내를 돌아보고 있던 강엽이 두 여인을 향해 물었다.
“혹시 여기에 뭔가 있지 않았소?”
“있었지요.”
“음?”
“저자가 쳐들어왔잖습니까.”
정신을 잃고 엎어진 복면인을 턱짓으로 가리킨 소창후가 강엽을 가자미눈으로 흘겨봤다.
“손이 비었으면 좀 도우세요. 저와 당 시주 바쁜 거 눈에 안 보이십니까?”
“....”
살짝 뻘쭘해진 강엽은 얌전히 두 사람의 앞에 앉아서 약재를 배합했다.
직후 백서희와 척마대원들이 잇따라 나타났다.
“강엽!”
“약은 아직 멀었습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오자 약방은 바깥까지 줄이 길게 이어지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새로운 노승에게 예를 갖추며 안쪽으로 들어온 백서희는 강엽의 옆에서 작업을 도우며 물었다.
“적미성은?”
“소림에 넘겼지.”
“용케 죽이지 않았네.”
“죽일까 생각하던 중에 저들이 와서.”
“근데 왜 약방부터 온 거야? 해약 때문에?”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끝을 흐린 강엽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몰래 전음을 보냈다.
[흡혈귀의 존재가 느껴졌다.]
백서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흡혈귀라니... 설마 불괴강시가?]
[글쎄.]
불괴강시라면 더 강렬하게 느꼈을 터.
하지만 흡혈귀의 기운 자체가 미약했던 데다 그마저 금세 사라진 탓에 이젠 감지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착각했을지도 모르지. 스승님과 외소림 때문에 예민해진 모양이야.]
* * *
갈마중은 한숨을 내쉬었다.
“졌소. 아예 상대가 안 되는군. 과연 십팔나한의 수장다운 무공이구려.”
“너희 또한 강했다.”
무각의 위로에 갈마중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를 제외한 멸마전의 아라한들은 전부 눈을 까뒤집은 채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어떻게 할 거요?”
“너희가 암야각을 도우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이더냐?”
“...부정하진 않겠소. 대사형은 암야각주가 장차 대업에 도움이 될 거라 했소이다.”
“적 사형께서 잘못 판단하셨구나.”
“....”
다른 때였다면 발끈했겠지만 갈마중 역시 이번엔 적미성이 오판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대체 무엇을 보고 암야마독을 끌어들이려고 한 걸까.
‘그녀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영문의 제자이기 때문에 쓸모가 있다고 하셨지.’
하지만 적미성은 패했고, 소림에 붙잡혔다.
최악의 경우엔 단전이 부서지고 사지근맥이 절단되는 형벌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
“우릴 잡아가면 마교와의 전쟁에서 무림맹이 불리할 것이오. 감당하실 수 있겠소?”
“방장께서 산문을 열겠노라 선포하셨다.”
“...!”
“우리가 내려온 게 무슨 의미겠느냐?”
“하, 하하....”
사대금강 둘과 십팔나한이 속세에 내려왔다.
더 이상 세상이 마교에 의해 짓밟히는 것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미.
갈마중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우린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적미성은 이대로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언제든 다시 세상에 나올 터.
“개방과 하오문이 너희가 세상에 나와 한 일들을 알아보고 있다. 죄가 없다면 풀려날 게다.”
“그럼 우리 중 대부분이 잡혀가겠구려.”
갈마중의 얼굴엔 씁쓸한 감정이 역력했다.
“우리 모두 마를 멸하겠다는 명분으로 죄를 저지른 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