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73화 (367/450)

74화. 암야 (5)

불권의 제자이자 멸마전의 수장.

강엽은 그 무게감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암신을 꿰뚫어본 것만으로도 그는 천하팔존의 반열에 들 만한 자격이 있었으니까.

백서희가 암야마독을 향해 쏘아지고, 아래에서는 척마대가 멸마전의 아라한들과 대치하는 상황.

콰아아아앙!

먹구름이 쏘아보낸 벼락이 적미성의 호신강기를 타고 아래로 떨어진다.

그 사이 한 줄기 빛살로 화한 강엽이 그의 위쪽에서 출현, 양손에 심상을 쥐었다.

제아무리 호신강기라도 심검 앞에서는 한낱 종잇장이나 다름없을 터.

그러나 적미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터어엉!

그 역시 양 주먹에 심상의 기운을 모았던 것이다.

“착각하지 마라, 귀영.”

심권으로 심검을 상쇄한 적미성이 사납게 웃었다.

“심상의 힘은 너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신에서 뿜어져나온 찬란한 황금빛이 강엽을 멀리 내던진다.

그러나 강엽은 창백한 빛살로 변해 적미성의 배후를 점했다.

지난날 일월신교주와의 싸움에서 얻은 깨달음.

일월신교주가 그랬듯 그 역시 이젠 심상의 기운으로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고 있었다.

“놀랍군! 벌써 여기까지 이르렀나!”

적미성은 강엽의 움직임을 쫓지 않았다.

바위처럼 발달한 근육을 불끈거리는 것만으로도 강엽의 심검을 막아냈던 것이다.

‘금강불괴...!’

거기에 심상의 기운을 엮기까지.

거칠게 휘두른 팔뚝이 머리로 짓쳐든다.

강엽이 다시 공간을 넘어 피하자 팔뚝에 쏠린 심상의 경파가 멀리 산 저편까지 날아갔다.

쿠르릉거리는 우레음과 함께 무너지는 절벽.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방금의 일격으로 십 장이 넘는 절벽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민가에 맞았다간 남아나지 않겠어.’

심상지경의 고수쯤 되면 작은 도시쯤은 여반장처럼 박살낼 수 있는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다.

이 자리에서 전력을 다해 부딪친다면 지난날 일월신교주와 싸웠던 북해의 참상이 재현될 뿐.

“이봐, 귀영. 우리가 싸워봤자 밑의 사람들만 고통스러울 뿐이다.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떤가?”

“....”

무언의 긍정으로 화답한 강엽이 빛살로 변하자 적미성 또한 허공을 박차고 뛰었다.

한 걸음에 수십 장씩 포물선을 그리는 보신경.

순식간에 인적이 드문 산 어귀에 당도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격돌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감이 들었지.”

찰나에 수십 번씩 공방을 교환한 적미성이 낮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너와는 사이 좋게 못 지낼 것 같다고 말이다.”

투아아아앙...!

산봉조차 깨트릴 파천황의 거력.

타격점에서 터진 심상의 경파가 수십 그루의 나무를 박살내며 산 중턱까지 뻗어나간다. 별 의념도 담기지 않은 평타에 담긴 위력이 그 정도.

“이렇게 주먹을 맞대니 알겠다. 네가 정파인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적미성의 눈에 어린 짙은 살광이,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세를 내뿜었다.

“찢어죽여야 할 사마외도였구나!”

산자락에 메아리치는 사자후.

불가의 법력이 깃든 대갈일성이 밤하늘을 강타하고, 전신에서 찬란한 금광이 쏟아졌다.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

대애애애앵-!

범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적미성의 출수 속도가 종래의 배 이상으로 빨라졌다.

‘이건...!’

불권이 선보인 무상대능력과 짝을 이루는 기공.

무상대능력이 대상의 적의를 꺾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한다면, 반야대능력은 그 반대였다.

딱히 잠력을 격발한 것도 아닌데 적미성의 존재감이 사위를 압도할 만큼 확장되고 있었다.

“사부가 네놈을 만났다고 했었지. 네놈이 사마외도인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왜 살려준 건지 모르겠구나.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약해진 건가?”

“사부에게 못하는 말이 없군.”

차갑게 쏘아붙인 강엽이 심검으로 어깨를 베었지만, 적미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걸레짝이 된 상의를 찢어버리며 처절하게 외칠 뿐.

“네놈도 버림받는다면 내 심정을 절절히 알 거다!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아나!”

“글쎄, 별로 듣고 싶진 않은걸.”

투콰콰콰콰콰콰쾅!

숲이 쓰러지고 대지가 뒤집힌다.

흙먼지가 밤하늘을 자욱하게 가리는 와중에 하늘 높이 솟은 강엽이 몸을 휘돌렸다.

어느새 그와 대등한 눈높이까지 올라온 적미성이 허리를 젖히며 일권을 내지르고 있었던 것.

-금강복마권(金剛伏魔拳).

기수식은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오의는 항마멸사 그 자체. 마의 기운을 꺾는 데 특화되었다.

한 끗 차이로 일권을 피한 강엽은 혈공진기가 크게 깎여나간 것을 알고 표정을 굳혔다.

그와 동시에 뇌력이 깃든 심검으로 복부를 베었지만, 적미성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소용없다! 나는 사부가 만든 걸작!”

사마외도를 멸하기 위해 천년 소림의 정수를 한 몸에 받아낸 희대의 괴물.

그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애초에 마교주를 죽이는 게 내 존재 의의였다!”

화아아아아악!

온몸으로 피와 금광을 뿜어내는 아라한이, 처절한 외침과 함께 강대한 파동을 발했다.

-심상절예 구현.

지고한 경지에 오른 불문의 심상.

일백이 넘는 거대한 화엄신장(華嚴神將)들이 좌우에 도열, 강엽을 향해 권장을 뻗는다.

-천장강신 번천멸각(天將降神 翻天滅却).

모든 것이 사라진 무위의 세상. 마치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것처럼 아찔한 감각이 덮쳐온다.

산악같은 덩치에도 가히 음속에 준할 만큼 쾌속한 출수에 강엽은 이를 악물었다.

빛살로 화해서 전권을 빠져나왔지만, 그 위에도 일권이 닥치면서 대지를 짓이긴다.

쿠구구구구구궁......!

일격에 숲을 뭉개뜨리는 위력.

고도로 연마한 심상절예는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

심상의 규모만 따지면 적미성의 심상절예는 일월신교주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월신교주보다 강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핵심은 심상이 얼마나 거창하냐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법을 얼마나 잘 구현하느냐.’

적미성의 심상절예는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나, 이제껏 상대했던 고수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거냐? 너도 심상지경의 고수라면 심상절예를 꺼내봐라!]

천신의 포고처럼 꽂히는 목소리.

강엽은 화엄신장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치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눈을 크게 떴다.

‘진법...!’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

소림이 자랑하는 절세의 합격진.

절세고수조차 꿈쩍 못한다는 합격진이 화엄신장들을 통해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구우우우우우웅-!

소림의 숭산을 통째로 옮겨온 것마냥 무지막지한 압력이 심상의 공간을 찍어누른다.

‘방식은 다르지만 군림보와 묘하게 닮았어.’

심상지경의 고수조차 가둔 거대한 천라지망. 빛살로 화해서 공간을 뛰어넘는 것도 여의치 않다.

심상절예를 완성한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그 안에 소림 무학의 정수를 녹여내는 위용.

적아를 떠나서 그 압도적인 재능과 무공의 방향성엔 강엽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필시 소림의 그림자를 떠난 뒤로도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연마하며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리라.

[내가 곧 소림이고, 소림이 곧 나다.]

기수식을 취한 백팔의 신장.

아득한 높이에서 강엽을 오시한 신장들이 소림칠십이종절예의 무학들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몸에 소림의 신공절학을 모조리 때려박고, 그걸 백팔의 신장에 나누어 휘두른다.

일권을 피하면서 심검을 휘둘렀으나, 또 다른 신장의 합격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쩌어어어어엉...!

밤하늘의 대기를 흔드는 충격파.

그 안에 담긴 거력을 해소하기도 전에 백팔나한진의 합공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빛살로 변하지도 못하고 튕겨나간 강엽의 위로 집채만한 신장의 주먹이 떨어졌다.

[끝이다, 귀...!]

“확실히 이대로는 불리하겠어.”

말 한마디에 적미성의 전성이 뚝 끊겼다.

속절없이 궁지에 몰린 것치고는 너무나 태연한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리고 피식 웃었다.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는구나.]

“심상지경의 고수를 상대로 객기를 부리는 건 자살행위지.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심상절예를 쓰지 않은 것은 더 확실한 기회를 잡아서 판을 뒤집기 위함.

강엽이 검지를 들어올리자, 일백의 신장 사이를 절묘하게 통과한 빛살이 멀리 하늘까지 치솟았다.

뒤늦게 하늘을 올려다본 적미성은 머리 위에 거대한 먹구름이 드리웠다는 걸 알고 신음했다.

[설마 저건...!]

“싸움을 시작했을 때부터 만든 뇌운이지.”

창백한 전광이 우렁찬 우렛소리를 토해내면서, 백팔의 신장 위로 벽력을 떨구었다.

-천뢰무한.

초대 일월신교주 유익에게 배운 다중 심상.

자성검법을 대성 이상의 경지로 통달하면서 손에 넣은 심상의 힘이, 신장들을 부수고 불태웠다.

-......!

세상이 새하얗게 불타오르고, 인간의 청각을 뛰어넘은 굉음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저편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심상으로 전해지는 고통에 강엽은 말없이 양손을 교차했다.

백염과 빙백의 충돌이 반쯤 허물어진 신장들을 완전히 박살냈다.

* * *

“.......”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널따란 개활지였다.

두 사람이 격돌하고 심상절예까지 쏟아부은 여파가 일대의 지형을 바꾸고 초목을 밀어버린 것.

저 앞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향해 무심코 발을 내디딘 강엽은 은은한 통증에 쓰게 웃었다.

‘암만 그래도 완벽하게 제압하는 건 무리였나.’

뇌운까지 쓰면서 위력을 극대화한 천뢰무한.

덕분에 적미성의 심상절예를 부수고 판을 뒤집긴 했지만, 강엽 역시 그 과정에서 적의 반격을 당했다.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공격했던 신장들로 인해 다리가 부러지고 내장이 진탕당하는 피해를 입은 것.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은 강엽이 길게 숨을 골랐다.

‘유익에겐 백번 절해도 부족하겠군.’

양손에 새겨진 태양과 달의 문양이 발광하면서 그 안에 잠재된 기운을 사지백해로 퍼뜨렸다.

일월신교주를 죽이고 얻은 막대한 음양의 기운.

그 일부를 양손의 문양에 따로 보관했다가 심흔을 치유하기 위해 일주천을 한 것이다.

“확실히... 일사도보다는 훨씬 강하군. 그놈을 패퇴시켰다는 게 거짓부렁은 아닌 모양이야.”

“끄으윽....”

새카맣게 타버린 육신 위로 허연 김이 피어오른다.

그 잘난 금강불괴조차 뇌기를 완벽히 막지 못해 살갗이 벗겨지고 피와 진물이 흘러내리는 몰골.

하나 그런 꼴이 됐는데도 적미성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목소리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크윽! 네, 놈...!”

“...질긴 것만 따지면 일월신교주보다 더하고.”

물론 일월신교주는 빈사 상태에서 천뢰무한을 맞은 만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적미성의 맷집 역시 상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지였다.

필시 소림 불문의 내공과 금강불괴의 공능이 합쳐졌기 때문에 이런 가공할 생명력을 얻었을 터.

‘살려두면 위험하겠군. 이놈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적미성이 이 일로 원한을 품는다면 차후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적미성의 정수리를 내려치기 직전.

불현듯 어깨를 움찔한 강엽이 뒤를 돌아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은....”

* * *

백서희는 암야마독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미 앞서 강엽으로 인해 심극을 썼던 암야마독은 내공 수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수들을 상대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백서희는 그녀도 방심할 수 없는 강적.

주인 없는 검을 이용해 어검술까지 구사하니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큭, 이 젖비린내 나는 계집이...!”

“댁이랑 나랑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난다고.”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검격을 내찌른 백서희는 상대의 신형이 흐려지는 것을 보고 눈을 빛냈다.

‘은신술... 확실히 실력은 뛰어나네.’

타인의 감각을 비튼다는 면에선 그녀가 익힌 은신술과도 비슷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바로 앞에서 싸워도 감각이 왜곡되는 느낌에 허우적거렸겠지.

그러나 이런 싸움에 이골이 난 백서희는 당황하지 않고 암야마독의 움직임을 쫓았다.

인식의 사각에서 족격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던 암야마독이 흠칫 굳어졌다.

“너...?”

쉬아아아아악!

마찬가지로 사각을 파고든 백서희의 검이 허점을 정확히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일검법으로 이딴 짓을!”

구파의 정종 무학과 하찮은 살수 비기를 섞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호신강기가 베이면서 뺨에 긴 상처가 남자 암야마독의 눈빛이 샐쭉해졌다.

몸을 휘돌리며 일권을 뻗고, 백서희가 피한 틈을 타서 전각 지붕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아까 전 강엽에게 썼던 구명절초.

정작 강엽을 상대로는 별로 재미를 못 봤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피해봐, 애송이 계집아! 네가 피하면 건물 안의 사람들이 몰살당할걸!”

“이 비겁한 년이...!”

암야마독의 말대로였다.

피하는 건 쉽지만, 그랬다간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경파에 휘말리거나 매몰돼서 죽을 터.

-암야참룡각.

맨발에 모인 강대한 공력이 시퍼렇게 빛난다.

‘어검으로는 안 돼!’

이기어검은 강력하지만, 절세고수가 전력으로 발휘하는 구명절초를 파훼할 정도는 아니다.

하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여의치 않은 형편.

달을 등진 암야마독이 잔혹한 교소를 토하는 가운데, 백서희는 심호흡을 하며 기수식을 잡았다.

완성은커녕 이제 겨우 뼈대만 잡은 불안정한 절기.

그럼에도 망설이지 않고, 건물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의념을 집중했다.

-심극 전개.

어검을 얻을 적에 함께 떠오른 깨달음.

평생을 쌓은 살수 무학과, 점창파 장문인이 베풀어준 가르침이 녹아든 오의.

수많은 인연을 만나면서 간신히 손끝에 닿은 심상의 힘이, 올올이 풀려나온다.

암야마독의 눈빛이 치켜올라갔다.

“너 같은 애송이가 어떻게...!”

-무극검광(無極劍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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