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72화 (366/450)

74화. 암야 (4)

채애애앵!

어두운 장내를 가른 차가운 이명.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기도 전에 짓쳐든 자색 검날이 암야마독을 향해 떨어졌다.

장내에 있던 암야각의 고수들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이루어진 기습.

커질 대로 커진 암야마독의 눈동자가 자색 검날을 비추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잘려나갔다.

상시로 둘렀던 호신강기가 종잇장처럼 베이면서, 시뻘건 선혈이 불쑥 치솟는다.

“각주님-!”

“적습이다! 이놈들이 감히...!”

흡사 시간이 분절된 것처럼 그 모든 광경을 목도한 암야각의 고수들이 새된 비명을 지르고,

몇 명은 적미성이 강엽의 동료라고 생각했는지 배후에서 쳤다.

꽈아아아앙!

한바탕 폭음이 울리면서 적미성에게 달려든 자들이 튕겨나갔다.

두 팔이 묶인 상황에서도 등근육을 불끈거려서 날붙이를 튕겨낸 것.

금강석처럼 단단한 육신과 하체에서 끌어올린 전신 발경의 조합.

그와 함께 두 팔의 결박한 사슬을 자의로 끊고 주먹을 뒤로 당기며 크게 내쏘았다.

콰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아!”

지진처럼 흔들리면서 흙먼지가 우수수 쏟아지는 가운데 강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보신권인가?”

소림칠십이종절예 중 하나.

수련자의 의념과 함께 공간을 초월한 절기는 강엽이 피하는 방향에 맞춰서 쫓아왔다.

‘같은 백보신권인데도 결이 다르군.’

실내인 것을 감안해서 위력은 줄인 것 같지만, 운용하는 법은 전강보다 몇 수나 윗줄.

등 뒤에서 들린 음성에 적미성이 태연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손목을 감싼 사슬을 끊었다.

“말없이 공격한 건 사과하지. 하지만 나도 그녀에게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강엽은 그 말에 답하는 대신 자성검에 묻은 핏물을 곁눈질했다.

‘손맛이 얕았어.’

암야마독이 반격한 데다 뒤에서 적미성이 공격하는 바람에 피륙을 베는 데 그쳤다.

“크, 이 개자식들이... 남의 집에서, 무슨 짓거리야...!”

부서진 세간에서 구시렁거리는 볼멘소리.

적미성이 태연하게 받아쳤다.

“봐라. 내 말이 맞지 않느냐?”

“하...!”

어이없는 듯 헛웃음을 삼킨 암야마독이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래서 넌 뭔데 다짜고짜 공격이야?”

“머리가 안 좋군. 아까 들었으면서.”

“아, 귀영?”

픽 웃은 암야마독이 몸을 일으켰다.

강엽의 검격이 몸통에 긴 상처를 남겼음에도 운신에 조금도 지장이 없는 듯한 행동거지.

쓰러진 세간을 넘은 그녀가 자세를 낮추었다.

“그래, 너에 대한 소문은 얼추 들었지. 운남부터 호광까지 전적이 굉장히 화려하다면서?”

“조심해라. 그는 심상지경의 고수다.”

적미성의 경고에 암야마독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조금 전 본인이 당한 것도 있는 만큼 한층 신중해진 기색으로 강엽의 빈틈을 살폈다.

“두 사람이 친한가 보군.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물어봐도 되나?”

“별 거 아니야.”

냉막한 긴장감이 어린 얼굴로 입술을 핥는다.

“예전에 잠깐 뜨거웠던 사이라고 할까?”

신기루처럼 흐려진 그녀의 신형이 곧장 측면에서 나타났다.

가녀린 외양과 걸맞지 않은 탄탄한 허벅지가 거센 회오리를 머금고 강엽을 강타한다.

투가아아아아앙!

“전부 튀어! 지침대로 행동해라!”

“각주님...!”

“빨리 꺼지라고!”

각주의 폭언에 간부들이 차마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비상통로로 퇴각하려는 찰나.

“본거지가 탄로나는 상황을 대비한 건가.”

“...!”

문득 회오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암야마독이 이를 악물며 적미성을 돌아보았다.

“뭐 해? 안 도울 거야!?”

적극적으로 개입한 좀 전의 모습과 달리 구경만 하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땐 네가 위험해서고.”

“지금도 위험해!”

“그럼 도와달라고 말해라.”

“윽...!”

암야마독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적미성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와 손을 잡겠다는 의미나 마찬가지.

하지만 당장 죽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제기랄... 알겠어! 손 잡을 테니까! 광명마교고 뭐고 손 털 테니까 도와줘!”

“그 말을 기다렸다.”

이를 드러내며 씩 웃은 적미성이 팔짱을 풀고 공력을 올올이 풀어내자 사방에 압력이 걸렸다.

“귀영, 좋은 말로 할 때 그녀를 놔줘라.”

“싫다면?”

강엽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었다.

회자결의 묘리로 막강한 경파를 퍼붓는 암야마독의 공격초에 맞춰, 태극반을 역방향으로 운용했던 것.

장심에서 거꾸로 도는 역태극이 족격의 회오리와 맞물리면서 암야마독의 공력을 갉아먹는다.

“암야각은 산서의 민심을 크게 어지럽혔지. 그걸 알면서도 돕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나?”

“당연히 알고 있다.”

심드렁하게 대답한 적미성이 크게 일보를 내딛자 웅혼한 기파가 태극반의 운용을 방해한다.

“그녀가 멸마전의 휘하에 들어왔다는 뜻이 아닌가?”

“닥쳐! 누가 휘하야!?”

콰앙!

앙칼지게 외친 암야마독이 다리를 떼면서 강엽의 얼굴을 향해 일장을 폭사시켰다.

고개를 꺾어 장력을 피한 강엽은 자성검을 놓고, 팔뚝을 들어 안면을 찍었다.

타타타타타탓!

좁은 공간에서 쉴 새 없이 치고박는 두 사람.

강엽은 암야마독의 박투술이 상정하던 이상임을 깨달았다.

‘일격의 위력은 크지 않지만 빈틈이 없다.’

초식을 짧게 치는데도 몸놀림이 경쾌하다. 움직임 속에 견실함을 가져가는 동중정(動中靜)의 무학.

사전에 합을 맞춘 것처럼 하박과 어깨, 무릎을 부딪치는 가운데 불티가 튀기 시작한다.

입술을 핥는 암야마독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적미성의 말이 맞았네. 일대일로 마주쳤다면 뭘 해보지도 못하고 순살당했겠어.”

강엽은 그녀의 박투술에 감탄했으나, 반대로 그녀는 충격과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강엽이 손에서 놓은 자성검이 스스로 날아다니며 적미성을 견제하고 있었으니까.

눈앞의 적에 집중하면서도 틈틈이 의식을 나누어 또다른 강적을 상대하는 심어검의 경지.

“대단해. 광명마교주와 불권, 근래 재출도한 염왕을 제외하면 당신이야말로 천하제일이겠지.”

“내 위에 세 명이나 있는 시점에서 천하제일을 논할 계제는 아닌 것 같은데.”

“당신 사부를 건드린 건 사과하지. 원한다면 보상도 할게. 그럼 날 놔주겠어?”

“네 목숨이면 보상이 되겠군.”

느긋하게 말을 섞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주변에선 크고 작은 충격과 불꽃이 끊이지 않았다.

극한으로 압축한 격공이 쉴 새 없이 부딪치며 운신에 제약을 건다.

암야마독이 짜증을 냈다.

“벽창호 같은 새끼!”

꾸아앙!

채찍처럼 강타한 족격.

직후 그녀의 기척이 폭발적으로 확장하면서 농밀한 공력 파동이 회오리치듯 움트기 시작했다.

-심극 용풍비연각(龍風飛聯脚).

이제까지의 충격과는 비교도 안되는 공력의 밀집.

벽과 천장에 균열이 가자 적미성의 안색이 급변했다.

“지상의 사람들은 아직 대피하지 않았다, 운빙!”

그녀의 이름까지 부르면서 멈추고자 했지만 암야마독은 악을 썼다.

“네 탓이야, 귀영! 괜히 쳐들어와서! 저 사람들은 너 때문에 죽는 거라고!”

전신에서 태동한 회오리.

태극반으로도 못 막을 만큼 격한 용오름이 천장을 부수고 기루까지 솟구쳤다.

적미성이 팔뚝을 교차해 용오름을 막는 사이, 가장 가까이 있던 강엽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떠올랐다.

천근추로 무게중심을 낮춰도 용오름의 바람이 살아있는 것처럼 육신을 떠받쳐올린다.

[하아아아아아압!]

회오리 안에서 울려 퍼지는 전성.

낭랑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강렬한 풍압이 강엽을 걷어차 올렸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지하의 천장은 물론 기루의 누각까지 박살난다.

졸지에 횡액에 휘말린 기녀들과 손님들, 심지어 암야각의 고수들까지 한 줌의 핏물로 변했다.

[찢겨 죽어라, 귀영-!]

팔층의 누각을 넘어 밤하늘에 걸린 달 아래까지 뛰어오른 암야마독.

그녀의 몸에서 다시 한번 강대한 공력이 쏟아졌다.

-암야참룡각(暗夜斬龍脚).

촤아아아아아악-!

밤하늘을 찢어발긴 찬란한 빛줄기.

무려 이십여 장이나 이어진 빛살의 궤적은 타격점에서 강력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공기가 폭발하고, 강엽의 전신이 가히 음속에 버금가는 속도로 맞은편의 탑에 충돌한다.

산산조각 박살난 기왓장과 벽돌이 무너지는 가운데 그 아래 있던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제멋대로 구는 성미는 여전하군.”

아래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적미성이 미간을 구길 때였다.

“대사형! 무사하시오!?”

혼란에 빠진 인파를 넘어 단숨에 거리를 주파한 아라한들이 그의 주변에 모였다. 다들 밤하늘에서 일어난 광경을 보고 기함한 낯빛.

텁석부리 쌍둥이 중 한 명이 뺨을 긁적였다.

“허어, 저만하면 무조건 뒈졌겠는데....”

사람이라면 저런 걸 맞고 무사할 리가 없다.

그러나 적미성은 코웃음을 쳤다.

“모르는 소리. 상대는 귀영이다.”

“그가 왔습니까?”

갈마중이 안색이 변해서 묻자 다른 이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특히 일전에 그 때문에 망신을 당한 초륜은 눈을 부릅뜨고 밤하늘을 노려봤다.

“심상지경의 고수쯤 되면 반은 요괴나 다름없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초인을 얕보지 마라.”

말이 씨가 된다는 걸 방증하듯 지하에서 또 다른 빛살이 파편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유성처럼 꼬리를 그리며 날아가는 자색 섬광.

바람에 의존해서 공중에 체류하던 암야마독은 밑에서 쏘아진 이기어검에 깜짝 놀랐다.

쾅!

단숨에 땅을 박찬 적미성이 검면을 때려 자성검을 날려보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암야마독과는 달리 능공허도로 허공에 떠오른 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멋대로 행동하지 마라. 네가 사람들을 죽이면 죽일수록 나도 비호해주기 힘들단 말이다.”

“썅, 그럼 어떻게든 해봐! 저 새끼가...!”

표독하게 소리친 암야마독이 순간 멍해졌다.

적미성의 표정도 굳어졌다.

“그걸 맞고도 아무렇지 않다고?”

* * *

탑 정상에 오른 강엽의 모습.

바람결에 흔들리는 흑포와 얼굴엔 흙먼지가 엉켰지만, 피를 흘린 흔적 따위는 없었다.

“.......”

시선을 내린 곳엔 혼란에 빠진 군중이 있었다.

때 아닌 절세고수들의 싸움에 휘말린 사람들은 충격과 두려움에 빠졌고, 주저앉거나 도망치다 서로 얽힌 채 뒤엉키고 있었다.

인파 사이에서 나온 척마대가 군중들을 피난시키지 않았다면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터.

“강엽!”

연분홍빛의 장삼을 나부끼는 여인. 끝만 곱게 땋은 긴 머릿결이 바람결에 흩날린다.

강엽의 옆에 선 백서희가 건너편을 노려봤다.

“저거 외소림의 그놈이지? 그놈이 왜 온 거야?”

“암야마독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왔다던데.”

“뭐? 그럼 저게...?”

적미성의 옆에 있는 여인을 발견한 백서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검파로 손을 가져갔다.

“암야마독은 사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 제자쯤 되는 건가?”

“암야마독 맞다. 알고 보니 역용술의 대가더군. 살수 기예도 쓰고.”

“살수엔 살수로 맞서는 법이지. 저년은 내가 맡을 테니 넌 저 놈팽이를 상대해.”

“심극을 쓴다. 조심해.”

사도십대고수를 넘어 팔존의 위치를 넘보는 초고수.

그러나 백서희는 개의치 않았다.

“나도 그동안 꽤 강해졌어. 이 기회에 사도십대고수 꺾고 저 자리 빼앗지 뭐.”

글쎄, 점창파의 제자인 그녀가 사도십대고수를 이긴다면 정도십대고수에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강엽은 딴죽을 거는 대신 자성검을 내주었다.

“그걸로는 저 여자의 공력을 감당하기 힘들 거야.”

강엽에게 자성검을 돌려준 뒤 그녀는 적당한 검을 구해서 쓰고 있었다. 다만 평범한 검은 암야마독의 족격을 맞으면 부러질 공산이 크다.

“괜찮겠어? 저쪽도 만만치 않아 뵈는데.”

그렇게 물으면서도 자성검을 향해 손을 뻗는다.

수중에 들어간 자성검이 웅웅 하고 검명을 토해내자 강엽의 표정이 묘해졌다.

“널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

“우린 궁합이 좋거든.”

자의로 내줬는데 왜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까.

강엽이 복잡한 기분에 휩싸여 입맛을 다실 때, 저편에서 적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생각을 바꿀 뜻은 없는 것 같군, 귀영.”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그녀는 장차 광명마교와의 전쟁에서 큰 도움이 될 거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작은 원한은....”

“개소리는 그만하고 자세나 잡아라.”

적미성과 이렇게 빨리 충돌할 줄은 몰랐지만, 이 기회에 외소림의 힘을 견식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후우우우우우웅...!

수류의 능력과 호풍환우의 술.

서로 다른 계통의 힘을 한데 엮은 가운데 시커먼 안개가 솟구치며 먹구름으로 화한다.

“흑무암쇄진...!”

절세의 술법진을 알아챈 적미성이 눈썹을 치켜뜰 때.

하늘 위에 먹구름을 만든 강엽이 손을 뻗자 뇌성이 터지면서 창백한 벼락이 빗발쳤다.

“미리 말하지만 봐주지는 않을 거다.”

-천뢰.

적미성을 향해 굵직한 벼락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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