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팔존 (4)
불권과 광명마교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천하제일인이 대립하는 것치고 두 사람의 기파는 놀랄 만치 조용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싸울 생각이 없는지 의문이 들 만큼 고요한 분위기.
“아까 했던 얘기의 반복이지만, 수명도 얼마 안 남은 그대가 기어나올 줄은 몰랐다.”
심상법 몽상정토. 가늠할 수 없는 거력으로 심상지경의 경지마저 초월한 괴물이 말했다.
“그 잘난 대웅전에서 죽을 때까지 웅크릴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대가 죽으면 소림은 과거의 부채를 맞닥뜨려야 하지 않나? 그대가 강호에 남긴 오래된 업보지.”
“...상당히 잘 아시는구려.”
“아무렴. 그대는 모르겠지만, 본좌는 오래전부터 그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만약 그대가 본교의 부활을 눈치챘다면 우린 시작하지도 못하고 끝났을 테니까.”
타오르는 검을 늘어뜨린 채 너스레를 떤 광명마교주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대와 염왕. 백도 무림에서 본좌를 막을 사람들을 꼽자면 두 사람이 유이했다.”
“그 시주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오?”
“진조의 후예 말인가?”
의미심장하게 웃은 그가 반문했다.
“그대가 보기엔 그놈이 정파의 협객 같던가?”
천하의 불권이 강엽의 기운을 못 알아볼 리가 만무.
그 연원까진 모른다 해도, 그가 어둠에 근원을 둔 마인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
“천기는 본좌와 녀석, 그리고 아직 부활하지 않은 혈마를 묶어 운명의 세 별이라 일컫더군. 그대도 천기를 볼 줄 안다면 이쯤은 짐작했을 거다.”
“....”
불권은 부정하지 않았다.
염왕이 그랬듯 그 역시 강엽을 본 순간 천기가 가리킨 세 흉성의 하나임을 알아본 것이다.
“후후, 혹시 고민하고 있나? 그놈을 어찌 처리할지....”
“지금은 교주에게 집중하고 있소.”
“암, 그래야지. 본좌를 두고 다른 사람부터 걱정했다면 몹시 언짢았을 것이야.”
공격은 느닷없이 시작됐다.
지면을 밟은 가죽신이 조금 들리면서 바짓단의 주름이 잘게 지는 순간, 광명마교주가 돌연 사라졌다.
...콰아아아아앙!
한 박자 늦게 울려퍼지는 굉음.
불권의 가사 자락이 바람결에 펄럭이는 가운데 충격파가 먼지를 이지러뜨리고, 백금광이 번쩍였다.
“일전에 염왕과 싸울 때는 준비가 미흡해서 제대로 싸울 겨를이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용세가의 가주전을 부수고 올라온 석탑.
등대처럼 사방에 드리운 환한 휘광이 광명마교주의 원영신을 굳건하게 떠받들고 있었다.
백금의 광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공간이 갈라지듯 미끄러지며 주변 사물들의 정경이 어긋난다.
허연 눈썹과 늘어진 주름 사이로 파묻힌 불권의 눈빛이 한층 우묵하게 가라앉았다.
‘무형의 심검을 유형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석탑으로 인해 강해진 것일까, 아니면 이제야 원래 무위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불권은 공간을 가르는 공능에도 두려움 없이 맞섰다.
심검의 범위에서 참격을 비껴내는 경신술.
간발의 차로 피하거나 호신강기 따위로 막아낸 게 아니었다.
“부동명왕보....”
정중동의 극한에 이른 보신 무공.
하나 불권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이 신형을 아홉 개로 나누어 광명마교주를 에워쌌다.
또다른 소림칠십이종절예인 연대구품(蓮臺九品).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피와 죽음만이 가득한 전장에서도 청량한 잔향을 자아낸다.
은은한 백광을 뿜은 아홉 송이의 연꽃에 광명마교주도 찬탄했다.
“허어, 금강대(金剛臺)인가?”
연대구품을 대성으로 이룬 경지.
아홉 연꽃 위에 선 아홉 명의 불권이 각기 다른 신공절학을 시전, 다양한 궤적과 간합을 가져갔다.
백보신권과 반야대능력, 탄지신통 등 소림칠십이종절예가 한 사람의 몸에서 쏟아진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봤다면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며 좋아했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그야말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천재지변.
-......!
소리는 없었다. 직후에 퍼진 상서로운 서광이 소리마저 잡아먹고 밤하늘을 밝게 물들였으니까.
심지어 충격파마저 그 안에서 순환하여 절기의 위력을 극대화하는 데 일조한다.
한참 지나서야 태풍처럼 풀려나온 진기의 잔흔으로 인해 흙먼지가 솟구칠 때.
불권이 몸을 날리며 일권을 찔렀다.
콰아아아아앙!
검과 권이 부딪치고, 충격파가 사방을 밀어내면서 방원 이십여 장이 둥글게 주저앉는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적수공권으로 광명마교주의 심검과 정면으로 맞서는 신위.
금강불괴의 신체 위에 심권을 덧입힌 불권이 주름에 파묻힌 노안을 번뜩였다.
“갈-!”
금나수로 광명마교주의 옷깃을 잡고 끌어당긴다. 작은 손짓 하나에 진기가 천변만화하며 광명마교주의 경혈을 압박했다.
그러나 광명마교주는 기름을 바른 것마냥 미끄러지면서 사방에 광점을 그려냈다.
“좀 전 무공의 보답이다.”
수많은 강선이 서로 다른 속도와 호흡으로 공간을 점하며 불권의 육신을 강타한다.
호신강기에 구멍이 뚫리고, 가사가 찢기고 불타는 참변에도 불권은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직후 모든 광점이 사라졌다.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
“이건...?”
손에 쥔 심검이 눈에 띄게 흔들리자 광명마교주의 얼굴에 어이없는 기색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덧없이 흐트러뜨리는 신공절학. 대상의 무공과 진기는 물론, 적의마저 지워내는 불패의 신공.
광명마교주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심검이 한순간이라도 흐트러진 것은 경악스러운 사태였다.
“과연 천하제일인... 존경스럽기까지 하군.”
지금이라면 왕년의 흑룡교주와 일대일로 싸워도 능히 불권 혼자서 싸움을 끝낼 수 있겠지.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은 광명마교주의 신형이 빛살로 화하면서 불권의 배후를 점했다.
-심상절예 천단.
무림맹을 절단냈던 심상절예.
날카롭게 벼려낸 심상의 일격이 천지를 가른다.
-......!
무려 십리까지 뻗어나가는 참격.
검의 궤적에 맞물린 공간이, 그 안에 있는 사물이 모조리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그야말로 전장의 판도를 바꿔버릴 경세적인 권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상절예 구현....
불권은 당하지 않았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서 등짝 일부가 잘려나가고 뼈와 근육이 드러났지만, 개의치 않는 기색.
심흔의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무상대능력과 함께 장전한 심상의 절기를 끌어올린다.
-무량여래지망(無量如來之網).
* * *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격언이 있다.
온갖 도술을 부리는 손오공이 날고 뛰어도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서유기의 전설.
일찍이 염왕의 제자인 하후진이 얼핏 엿봤던 심상절예가 펼쳐지는 순간, 광명마교주는 자신이 바로 그 손오공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거대한 손바닥에 자신을 올린 부처의 형상.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부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광명마교주의 수중에 쥐어진 심검은 연기를 내며 퓌쉬식 꺼졌다.
“그래, 기본적으로는 무상대능력에 바탕을 두되, 그 공능을 말도 안 되는 규모로 키운 건가?”
굳이 말하면 심검이나 심권이라보다는, 심기(心技)라고 해야 할 심상절예.
“의외로군. 그대의 심상절예는 본래 이런 형태가 아니었을 텐데... 흑룡교주의 머리통을 깼을 때도 심상절예를 쓰지 않았던가? 본좌가 아는 한 그대의 심상절예는 살계를 범하는 방향으로 수렴했다.”
대답은 없었다. 이 거대한 혼원에서 광명마교주는 망망대해의 무인도처럼 홀로 존재했던 것이다.
심검을 다시 일으켜서 부처를 향해 휘둘러도 소용없었다. 얼굴에 다가가지도 못했으니까.
오히려 그 사이에도 부처는 물론 광명마교주를 올린 손바닥은 점점 커지면서 원근감이 흐려진다.
불권이 허락하지 않으면 나갈 수도 없을 터.
“놀랍구나. 그야말로 살아있는 참회동이 아닌가?”
타다 남은 재처럼 흐릿해진 심검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원을 따라 걸은 광명마교주가 중얼거렸다.
“흠, 그래. 이런 심상절예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지난 ‘천 년간’ 무수한 심상을 접했으니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액면 그대로 들으면 마치 천 년간 살아왔다고 밝히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겠군. 불권 그대는 심상의 일부를 버렸다. 그로 인해 경지가 퇴보했기에 삼십 년 전 혈교가 난을 일으켰을 때 나설 수 없었지. 단순히 약해진 걸 넘어 목숨이 위험할 만큼 쇠락했을 터.”
지금껏 쌓은 경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왜 그런 선택을 내렸던 걸까.
광명마교주가 빙긋 웃었다.
“심마겠지. 흑룡교와의 싸움이 발단이 됐나. 내면의 마구니를 그냥 뒀다면 결국 미친 마인이 됐겠지. 그래서 자신을 대신해서 싸워줄 외소림을 키운 건가?”
무한한 태허처럼 드넓은 허공을 향해 말을 건다.
“심상이 주인의 몸을 얌전히 벗어나진 않았을 거다. 아마 사대금강과 십팔나한의 도움을 받았겠지. 심상을 버린 이후로도 그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터.”
불권의 심상절예만 보고도 지난 수십 년간 소림이 겪은 비사를 통찰하는 직관.
불권이 무거운 전성으로 물었다.
[...대관절 시주는 누구요?]
광명마교주가 맞냐고 묻는 게 아니다.
천 년의 세월을 언급한 것을 비롯해 흑룡교주와의 대전을 직접 견식한 것처럼 말하는 태도.
이면에 숨겨진 뭔가가 있지 않고서야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본좌는 광명교의 교주이며, 가루라의 화신이다. 오직 그것만이 본좌를 정의하지. 본좌뿐만 아니라 역대 광명교주 모두 그러했느니라.”
[그게 무슨...?]
“다시 말해주랴? 초대부터 전대까지, 우리에겐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필요가 없었지. 왜냐하면....”
찰나, 푸쉬식 꺼져갔던 심검이 들불처럼 타오르면서 황금빛 대붕의 형상으로 화한다.
그를 손바닥에 올려둔 부처, 그 이상으로 커지면서 타오르는 부리로 부처의 머리를 쪼개기 시작했다.
[......!]
“우린 모두 한 사람이니까.”
가루라의 영성을 통해 천 년간 전생한 마인.
과거 혈마에게 사육당해 종처럼 부려졌던 원한을 뼛속 깊이 새긴 가루라의 화신이 말했다.
“강호의 호사가들은 본좌를 신마(神魔)라고 부른다지? 별호 따위는 관심 없지만....”
손을 뻗자 부처를 부수어대던 대붕이 빛기둥처럼 거대한 검으로 화해 수중에 쥐어진다.
“본좌는 혈마와 진조를 멸하고 지상을 거니는 유일한 마가 될 것이다.”
그리고 태양처럼 뜨거운 심검이, 부처를 가르고 심상의 광경을 산산조각 쪼개버렸다.
그 너머에서 피를 흘리면서 합장을 하는 불권을 향해 역수로 쥔 심검을 투창처럼 던진다.
황금빛 꼬리를 그리며 날아간 심검이 불권의 몸통을 관통하는 찰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육성보다 빨리 흘러나온 의념.
심지어 빛살처럼 움직이는 심검보다 빨랐다.
[이 세상 모든 중생의 안에 부처가 계시니, 타인을 등불 삼아 속세를 거닐 필요가 무엇인가.]
“설마 심상을 이중으로...!”
또다른 심상이 움튼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광명마교주가 드물게 경악성을 지를 때.
[교주를 이기진 못하나 지지도 않을 것이오.]
그리고 불권의 육신을 갈라야 했을 심검이, 그대로 불권의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탈각다비(脫殼茶毘).
“허튼 짓을! 스스로 진원을 불태우며 심검을 봉인해!? 너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는 짓이다!”
[어차피 살 날 얼마 남지 않은 땡중이외다. 하나 교주께선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심검을 못 쓰실 것이오.]
“...!”
심상의 전경이 완전히 깨져나간 현실에서 피를 흘리는 염불을 외는 늙은 승려의 모습.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심검을 잃어버린 광명마교주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불권을 노려봤다.
“...심검을 잃었다 하나 진기는 남아있다. 하나 네놈은 본좌의 심검을 봉인한 영향으로 무공을 잃었지.”
일신의 공력을, 진원까지 써가면서 심검을 봉인하는 데 할애했으니 무공을 잃은 것과 진배없다.
그렇게 검결지를 뻗어 불권의 심장을 찌를 때.
쐐애애애애액!
불현듯 밤하늘을 가로지른 자색 검날이 광명마교주의 정수리를 쪼개고 들어왔다.
급히 검결지를 위로 들어올려 검날을 막은 광명마교주의 낯짝이 일그러졌다.
“너, 진조의 후예...!”
피투성이가 된 강엽이 씩 웃었다.
“당신도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군?”
“방해하지 마라!”
“염병.”
화아아아악!
강엽도 내공이 거의 남지 않은 상황.
단전의 내공을 쥐어짜서 광명마교주의 목숨을 노렸지만, 광명마교주는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크윽...!”
간신히 낙법을 취했지만 충격이 남았다.
너절한 육신을 간신히 일으키며 자성검을 지팡이 삼아 균형을 잡는 것이 한계.
그때 뇌광에 휩싸인 일사도와 오른팔이 망가진 구사도가 광명마교주의 좌우에 시립했다.
“삼사도는?”
“...송구합니다.”
일사도가 면목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광명마교주의 입가에 씁쓸한 기색이 잔바람처럼 번졌다.
“그런가. 정말 득보다 실이 많구나. 사도를 네 명이나 잃다니....”
“속히 피하셔야 합니다.”
원영신의 몸으로 강림했기에 이 자리에서 몰살당해도 결국 이사도만 죽을 뿐이다.
하지만 본신에도 막심한 타격이 가겠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연이어 겹쳤구나. 소림과 무당의 거성을 떨어트린 걸로 만족해야 하는가.”
“누가 보내준다고 했나?”
강엽의 도발에 일사도와 구사도가 병장기를 쥐는 순간, 광명마교주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심검을 빼앗겨 분노한 마음은 잠시 억누른 듯 한결 차분해진 신색이었다.
“간신히 서 있는 주제에 혓바닥은 잘 놀리는군. 정히 끝장을 보고 싶거든 본교의 성지로 오거라.”
“뭐?”
광명마교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접근하는 기척을 느끼면서 입맛을 다실 뿐.
“맹주와 불권은 선발대였나.”
와아아아아아아!
푸른 도복을 입은 무당파의 도사들과 자색 무복을 입은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몰려온다.
“...가자. 그대들마저 잃을 수는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