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팔존 (3)
흑룡교를 토벌한 일등공신으로 지난 수십 년간 천하제일인으로 숭상받은 불권.
광명마교주가 무림맹을 뒤집어놓고, 염왕이 재출도함으로 인해 존재감이 조금 흐려진 감은 있지만, 그 기세는 지금도 태산처럼 굳건하다.
“무량수불... 교주, 이 땅을 수라장으로 만드셨구려.”
“.......”
정과 마를 상징하는 거인들의 대립.
소속을 막론하고 전장에 있는 모두가 숨죽인 채 마른침을 삼키면서 두 사람을 지켜봤다.
무림맹주와 총군사마저 조금 뒤에서 물러난 채 조용히 관망할 때.
광명마교주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큰 결심을 하셨군. 하늘이 부를 날이 얼마 안 남았을 텐데. 용케 여기까지 걸음할 생각을 했어.”
“노납이 큰 결심을 했다 한들 어찌 교주만 하겠소. 이런 식으로 천기를 뒤집으실 줄은 몰랐소이다.”
“필요한 일이었지.”
“수만의 목숨을 죽여 천하를 도탄에 빠트리는 게 말이오?”
“그 말은 동의하기 어렵군. 그들은 본좌가 마련한 피안에 머물 것이니, 속세의 번뇌와 고통을 잊고 영원한 평안을 얻을 것이다.”
“스스로 신이 될 생각이시오?”
“과연 어떨까.”
“교주의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외다.”
“하하, 세상 만사 뜻대로 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나? 다만 그 말은 법공(法供) 당신에게도 해당된다.”
광명마교주의 입가를 타고 뜻 모를 웃음기가 흘렀다.
“아니, 당신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군. 자신이 만든 ‘허물’도 감당 못하지 않았나?”
불권은 대답하지 않았다.
속을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깊고 그윽한 눈으로 광명마교주를 응시하기만 할 뿐.
그 무거운 침묵에 긍정이 서렸다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삼사도의 사기를 정화한 건 정말 인상적이었다. 예전의 당신이라면 할 수 없는 이적이지. 역시 자신의 허물을 버린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무량수불....”
쩌저저저적...!
불권과 무림맹의 고수들이 떨어졌던 천장.
광명마교주가 뚫어버린 구멍을 중심으로 사방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며 심법진의 정경이 이지러졌다.
이윽고 유리조각이 깨지듯 박살난 붉은 천장 사이로 찬연한 별빛이 언뜻 드러난다.
심법진이 무너지는 반동을 감내한 강엽은 치밀어오른 핏물을 도로 삼키며 조용히 기혈을 다스렸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혈라수가 잘렸으니 심법진이 깨져나가는 건 필연.
한데 때마침 불권과 맹주가 와서 적들의 시선을 끌어준 덕에 회복할 시간을 벌었다.
진조 역시 그걸 아는 만큼 재촉하지 않았고.
한편 광명마교주는 주변을 휙 둘러보다 넉살 좋게 웃었다.
“오사도와 육사도를 잃었고... 아무래도 여기서 더 싸워봤자 득보단 실이 더 많을 것 같군.”
“순순히 보내줄 것 같나?”
맹주가 호목을 번뜩였다. 무림맹의 무사들이 살기등등한 기세를 내뿜었고, 총군사 제갈의현도 진법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
사기에 침범됐던 이들은 아직도 쇠약했지만, 그들도 물러서지 않겠다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특히 모용세가의 무인들은 실추된 명예를 위해서라도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어야 했다. 여태껏 그들의 손으로 사도 한 명 죽인 적이 없었으니까.
“당신과 사도들도 그렇지만, 특히 마의는 무림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죄없는 이들을 학살했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맹주가 격노를 드러내는 한편 그 옆에 있던 불권은 눈을 반개한 채 불호만 반복했다.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건지, 아니면 결국 피를 보는 것을 안타까워하는지 모를 모호한 태도.
그때 내상을 회복한 강엽이 움직였다.
마신상을 두른 채 광명마교주를 넘어, 일행과 대치하고 있는 사도들을 향해서.
“어엇! 이 자식...!”
“사사도!”
가장 먼저 표적이 된 자.
사사도의 위기를 직감한 일사도가 뇌광을 뿌리며 달려들었지만 맹주가 그 앞을 막아섰다.
“자네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야!”
“...!”
미간을 찌푸린 일사도가 전신으로 황금빛 뇌기를 내뿜자 맹주의 대도 역시 푸른 벽력을 일으켰다.
하북팽가의 신공절학인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그와 함께 불권이 만든 연꽃의 감옥이 시들 듯이 꺼멓게 죽으며 마의가 가공할 살의를 흩뿌렸다.
[감히 내가 백 년간 품은 염원을...!]
“갈!”
제갈의현이 술법진으로 만든 회오리의 벽이 마의의 손발을 묶고, 무림맹의 무사들이 망자들을 향해 돌격.
모용세가의 태상가주 비연검군이 호응했다.
“감히 본가를 침범한 악적들을 척결하라!”
“와아아아아아아-!”
숫자는 여전히 망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무림맹과 모용세가의 무인들은 기세를 탔고, 결정적으로 광명마교주가 불권에게 막혔다.
‘마신상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한계에 다다랐어.’
심법진의 파편이 남아있는 덕에 마신상이 당장 사라지진 않았으나, 유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끽해야 반 각, 어쩌면 그보다 짧을지 모른다.
그동안 적의 숫자를 하나라도 더 줄여야 할 터.
마신상과 함께 암신을 쓴 강엽은 순식간에 사사도의 뒤를 잡고, 마신상의 주먹을 치켜들었다.
상반신만 이 장이 넘는 거구에도 음속을 아득히 넘은 출수 속도.
한달음에 뒤를 잡힌 사사도가 해쓱하게 질린 안색으로 호신강기를 집중시켰다.
“오냐, 끝까지...!”
꾸아아아아아아앙!
마치 벌레를 밟아죽이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참혹하게 으깨진 형상.
단 일격으로 사사도를 때려죽인 신위에 무림맹의 사람들까지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사사도...!”
오사도와 육사도, 나아가 사사도까지.
맹주에게 막혀 오도 가도 못한 일사도가 결연한 각오를 품은 얼굴로 의념을 발했다.
-심극.
밤하늘을 가르는 찬란한 은하수.
달빛과 별빛마저 삼킨 빛의 대하로부터 무수한 벼락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와 지상을 강타한다.
한순간에 완성된 심극이, 맹주의 벽력도를 튕겨내고 전장 전역을 자신의 권역에 두었다.
-광해진천하(光海鎭天下).
찰나 세상이 압도적인 섬광에 휩싸였다. 사방팔방에 황금빛 벼락을 동반한 검의 소나기가 쏟아진다.
수십 자루의 어검을 동반한 비전의 절기. 무림맹과 망자들을 가리지 않고 습격한 광검은 그 자리에서 터져나가며 부수적인 피해를 입혔다.
“......!”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찰나에 이루어진 심극은 마신상을 두른 강엽도 막지 못할 만큼 빨랐으니까.
그저 백서희를 비롯한 일행을 지키며 그들이 죽지 않도록 막는 게 최선이었다.
‘온다.’
밤하늘을 가로지른 거대한 강줄기.
스스로 벼락이 된 일사도가 찰나에 공간을 좁히고 들어오며 섬뜩한 척초를 날렸다.
마신상의 안에 있는 강엽을 향해!
콰아아아아앙!
놀랍게도 일사도의 검격은 마신상을 절반 가량 파고들어왔다.
광명마교주의 심상절예조차 버틴 마신상이 어처구니없게도 고작 심극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단지 일사도의 검이 강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쯧, 시간 다 됐다.]
심법진의 힘이 다하면서 마신상 또한 허공에 녹듯 흐려지고 있었다.
“흐읍!”
두 눈으로 뇌광을 발하는 일사도의 모습.
강엽은 직감적으로 그가 심상절예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니, 어쩌면....’
그런 강엽의 직감이 맞다고 말해주듯 일사도의 몸에서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의념이 흘러넘쳤다.
심상을 받은 일사도의 검이 마신상의 상처를 억지로 헤집고, 상처를 벌려가고 있었다.
마음속 깊숙이 잠든 심상의 힘을 억지로 끌어내서 일시적으로나마 한계를 넘어선다.
지난날 점창파의 전전대 장문인 낙일신검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심상절예를 짜냈던 것처럼.
-심상절예 구현....
강엽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그렇게 둘 순 없지.’
그의 뒤엔 일행이 있었다. 여기서 밀리면 그들 전부 일사도의 심상에 휘말리고 말 터.
강엽은 검에 찔린 마신상의 손바닥에 공력을 집중, 사라지려는 마신상을 다잡으며 반격을 꾀했다.
일사도의 검을 그러쥐고, 반대쪽의 손으로 일권을 그러쥐어 일사도의 측면을 강타한다.
하지만 뜻밖의 반격이 날아왔다.
투아아아앙!
-생사역전.
어느새 제갈의현의 술법진을 풀고 나온 마의가 심상절예를 휘둘러 마신상의 주먹을 튕겨낸 것.
타인의 심상절예를 되돌리는 반탄기예.
심검으로 구현한 이화접목에 맞은 마신상의 팔뚝이 폭발하듯 터져나가면서 강엽 역시 기혈이 터져나갔다.
“커억!”
간신히 잡아놓은 심흔이 터지면서 선혈이 흘러내린다.
[이제는 정말 한계다. 안타깝지만 더 이상은 짐이 도와줄 수 없을 것 같구나.]
결국 마신상의 거체가 사그라들면서 강엽만 덩그러니 남아 피를 게워내고 있었다.
“강엽!”
백서희를 비롯한 일행이 달려와서 강엽을 막자 마의가 피식 웃는 소리를 내며 소검을 들었다.
[익숙한 광경이군. 하지만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이번엔 우리도 당하지 않아.”
[그런 몸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이냐?]
만전이어도 상대가 안 되는데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뭘 할 수 있겠는가?
마의가 조소하는 그 순간이었다.
“그들만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앞서 일사도의 심극을 맞고 날아갔던 맹주가 산발이 된 몰골로 대도를 들고 나왔다.
제갈의현 역시 피투성이가 된 꼴로 옆을 보조하며 마의와 일사도를 차례로 노려봤다.
“기어이 끝을 보자는 거군.”
일사도의 말에 제갈의현이 차갑게 일갈했다.
“호광이 이 지경이 되었을 때부터, 아니 당신들이 무림맹을 침범했을 때부터 끝을 볼 수밖에 없었소.”
모용세가 정도로 심하지는 않지만 제갈세가 역시 망자들과의 싸움에서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수많은 혈족들과 무사들이 죽었고, 아들인 제갈세옥 역시 생사가 불분명한 판국.
맹주가 노호성을 토하며 벽력도를 휘둘렀다.
“노부가 두 눈 뜨고 살아있는 한, 마도천하가 도래하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그럼 죽어라.”
일사도 역시 뇌광을 두른 채 맞서는 그때.
휘우우우우웅!
한 줄기 바람과 함께 백발과 백염을 휘날리는 흐릿한 귀신이 검결지를 휘둘러 마의를 날려보냈다.
제갈의현을 비롯한 일행이 그를 알아보고 경악했다.
“장문인!?”
[송구하오. 적의 술수에 당해 한동안 꼼짝 못했소.]
이제는 목소리도 불문명했다. 동굴에서 말하는 것처럼 왠지 깊은 울림을 띠는 전성.
검선이 빙그레 웃자 제갈의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선천지기를 쓰신 겁니까?”
본래라면 광명마교주에게 당한 시점에서 원영신을 스러지고 본래의 육신으로 돌아왔겠지.
하나 검선은 싸울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진신의 선천지기를 끌어쓰는 강수를 두었다.
제갈의현의 말에 멀리 있던 일행도 깜짝 놀랐다. 특히 청수는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빈도는 틀렸소. 원영신을 쓸 때부터 사기를 도저히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
“하오나 법공 대사께서....”
[불가의 법력이 사마외도의 상극이긴 하나, 마의가 빈도에게 건 술법은 지독했소. 소림 방장께서 힘써주신다 한들 얼마 못 버틸 것 같구려.]
“그럴 수가.”
검선까지 유명을 달리한다면 백도 무림은 궁검과 검성에 이은 세 번째 팔존을 잃게 된다. 이러면 백도 무림에 남은 팔존은 맹주와 불권뿐.
‘낭왕이 있다지만 너무나 불리하다.’
게다가 낭왕도 북해로 간 뒤엔 소식이 두절되지 않았던가. 만약 낭왕까지 잘못된다면 이는 백도 무림이 감당할 수 없는 초유의 참사였다.
[허허, 장강의 앞물이 뒷물에 밀려나는 건 당연한 게지. 우리가 죽어도 저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강엽을 감싼 일행을 돌아보았다. 청수를 비롯한 이들이 울컥해서 병장기를 들었다.
“장문인, 저희도...!”
[아서라. 너희가 목숨을 걸 곳은 여기가 아니리라.]
어느새 벌떡 일어서서 비릿란 안광을 내뿜는 마의를 향해 한 시대의 거인이 선언했다.
[백 년 묵은 노괴야, 이제 그만 망집을 끝내자꾸나.]
[헛소리.]
마의가 목뼈를 두둑 꺾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 몸의 심상절예가 뭔지 알면서도 덤비겠다는 용기는 높이 사주마. 하지만 그따위 불안정한 상태로 심상절예를 쓸 수 있을....]
그 순간 마의의 목소리가 멎었다.
일행 사이에서 심신을 추스린 강엽이 공간을 접듯이 배후를 덮치며 심검을 내치는 게 아닌가?
[흥, 그토록 죽고 싶다면...!]
그렇게 두 사람의 심검이 맞닿은 찰나.
-심상절예....
검선의 전신에서 환한 빛이 뿜어지며 마의의 전신을 감싸고 돌았다.
[네놈, 기어이...!]
-순천태극(順天太極).
하늘의 섭리를 따르는 태극의 검로.
검선 자신을 담보로 한 심검이 마의의 심검을 잡아당겨 지남침처럼 이끌었다.
그리고 강엽의 심검은 마의의 어깻죽지를 깊숙이 파고들어, 오래전에 굳어진 심장을 두 동강 냈다.